국회에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 '불꽃'이 튀기고 있다. 다시 말해, 지난 23일 정의화 국회의장(새누리당)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며 직권 상정한 '테러방지법'에 대해서, 야당 의원들이 무제한 토론 방식으로 문제점을 지적하고 통과를 지연시키고 있다. 이는 '합리적 의사진행 방해'로도 불리며 다수당의 독주를 소수당이 합법적으로 막는 방식이다.
야당이 2월 임시국회가 끝나는 3월 10일까지 무제한 토론을 이어가면, 테러방지법 통과는 무산된다. 하지만 그전에 선거구획정안을 통과시킬 수 없으므로 총선은 연기된다. 만약 총선을 예정대로 4월 13일에 치르길 선택한다면, 어쩔 수 없이 테러방지법을 표결에 부쳐야 한다. (관련 기사: 테러방지법 필리버스터, 사실상 26일이 시한) 이 경우 과반이 넘는 새누리당 의원들이 법안을 통과시킬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야당은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다. '총선'이냐, '테러방지법 저지'냐의 문제다. 그런데 테러방지법 저지를 선택하는 게 꼭 나쁜 선택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우선 야당은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다. 그러려면 우선 필리버스터를 '불꽃'으로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해, 현재 대중이 '테러방지법에 분노'하기보다는 '필리버스터에 열광'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아, 물론 야당의 테러방지법 비판은 나름 '합리적'이다.
이 법이 규정하는 '테러위험인물'이 뜻하는 바는 모호하다. 동시에 '테러위험인물'에 대한통신이용·금융거래 등과 같은 민감한 정보의 수집·조사 권한을 국정원이 대폭 가져간다. 대상은 모호한데 권한은 넓고, 심지어 '영장주의'(형사절차에서 강제처분을 할 때는, 법원 또는 법관이 발부한 영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에 벗어나는 독소조항도 다수 포함한다.
국민에 대한 무차별적 사찰과 인권침해가 우려되는 부분이다. 하필 권한을 가져가는 쪽이 2012년 대선 당시 정치개입 댓글 사건과 유우성씨 간첩사건 조작을 저지른 '국정원'이라는 점도 민감하다. 총선을 앞둔 시기에 미확인 첩보를 근거로 '국가비상사태'를 조성하며, 급하게 법안을 직권 상정하고 처리를 강행하려는 새누리당의 태도도 의심을 사는 중이다.
많은 시민들도 알고 있는 부분들이다. 하지만 이성적 대화의 과정인 '의회 정치'만을 염두에 둔다면, 시민들과의 교감을 지속시키기 어렵다. 다시 말해 불꽃이 들불로 번지기 위해서는 필리버스터가 '토론 이상의 무언가'로 승화되어야 한다.
한국은 '독일'이 아니다
독일의 철학자 하버마스는 시민사회의 이상적 모델로 '커피숍 모델'을 꼽았다. 커피숍에서 대화를 나누듯, 시민들이 합리적인 토론을 일상화한다면 정치·사회적 현안을 공론화해 자본과 국가 권력의 독주를 견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독일인들처럼 어려서부터 토론이 몸에 밴 사람들에게는 제법 맞아떨어질 법한 이야기다.
하버마스의 제자 호네트는 하나를 덧붙였다. 단지 이성적 토론의 결과로 사람들이 곧바로 사회 변혁에 뛰어든다기보다는, 존엄성을 무시당하는 경험에서 느끼는 '도덕적 울분'이 더 직접적 계기가 된다는 설명이다. 시민의 분노가 존엄성을 '인정받기 위한 투쟁'(인정투쟁)을 위한 힘이 될 때, 사회의 진보를 이끌어왔다는 걸 인류 역사가 증명한다는 뜻이다.
이 역시 풀뿌리 민주주의 정치가 발달해 있고 어려서부터 자기표현에 친숙하도록 교육을 받는 독일인들에게는 제법 맞아떨어질지 모른다. 하지만 '커피숍 모델'도 '인정투쟁 모델'도 한국의 맥락으로 가져오면, 100% 맞아떨어지는 건 아니다. 한국인들이 독일인들보다 이성적 능력이 모자라거나 인정욕구가 없어서가 아니다.
한국인들의 이성과 인정욕구가 상당 부분 '잠재력'으로 묶여있거나 '왜곡'될 수 있다는 게 문제다. 우리 대부분은 이성적 능력을 자립시키기는 토론 교육보다는 '주입식 교육'을 받아왔다. 또한 주류 문화는 솔직한 감정 표현을 권장하기보다 '더러워도 참는 게 능력이다' '누구나 고통 하나쯤 있다' '개인이 노력이 부족한 걸 왜 남 탓을 해'와 같은 말들로 감정을 삭이고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회피하도록 조장해온 측면이 있다.
이때 응어리진 감정은 부당한 권위에 순응하고 수직적 분노로 분출되지 못했으나,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감정은 오히려 수평 폭력으로 뒤집혀 분출되기 십상이다. 약자들끼리 편을 가르고 물어뜯는 '혐오'가 만연한 이유다. 쏟아지는 뉴스들을 손쉽게 접하면서도 결국 서로의 만남이 컴퓨터 모니터와 스마트폰 액정 앞에서만 이뤄질 때, 서로를 '가볍게 판단'하고 '냉소'하게 된다.
사람들끼리 물리적 거리가 멀면 교감의 거리도 멀다. 교감이 멀면 '연대'가 약해지고, 연대가 약해지면 민주주의 공동체는 감정적 기반에서부터 '잠식'된다. 기득권에게 권리를 침해당하는 동안, 혐오와 냉소가 만나 약자들끼리 물어뜯는 '헬조선'이 되는 이유다.
국정원 대선 여론조작 사건, 유우성씨 간첩조작 사건, 세월호 참사 진실규명, 역사 교과서 국정화 추진, 일자리 쪼개기와 쉬운 해고, 젠더 불평등 문제, 수저계급론 등. 이 문제들에 대해서 어느 하나라도 시민사회에 공론화가 만족스럽게 이뤄지고, 연대가 지속돼 국가주의를 견제하는데 성공했을까. 우울하지만 '예'라고 답하기 힘들다.
필리버스터가 '들불'로 번지려면
결국 시민사회와 의회 정치 사이에 미스매치가 있다. 전자가 이성과 도덕적 분노에 기반한 공론장과 인정투쟁장과는 아직 거리가 있지만, 의회 정치는 양당 구도 하에서 '이성적 설득'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필리버스터 열광은 시민사회와 의회 정치 사이에 드문 불꽃을 연출한다. 시민들 스스로 필리버스터가 '토론 이상의 무엇'이어야 하는지 정치권에 신호를 보내고 있다. 바로 일종의 종교적 의례, 다시 말해 '축제'로서의 기능이다.
시민들은 '테러방지법'에 분노하기보다 '필리버스터'에 열광한다. 가령 더불어민주당, 국민의 당, 정의당 의원들이 밤을 새우며 테러방지법의 내용과 문제점을 낭독할 때, 이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김광진 의원 힘내라'는 따뜻한 말을 건네는 사람들은 100만 명이나 된다. 은수미 의원의 눈물에 함께 눈물짓기도 한다. 이성이나 도덕적 분노 이상의 무언가의 힘이 필리버스터 열광을 만드는 게 아닐까.
사회학자 뒤르켐은 '집단 열광'이 군중들로 하여금 잃어버린(혹은 잊힌) '성스러운 것'을 다시 느끼게 함으로써, 사회 변혁을 위한 감정적 에너지를 재충전시켜 준다고 설명한다. 필리버스터에서 '성스러운 것'은 대의 민주주의, 즉 "저의 주인이신 국민은 포기할 수 없는 존재"(은수미)라는 말을 '진정성 느껴지게'할 수 있는 정치인이 살아있다는 현실이다.
이때 시민들이 느끼는 감정은 테러방지법에 대한 '분노'라기보다는, 국회의 의사진행 발언대 앞에 서 있는 '혼이 깃든'(진정성 있는) '샤먼'(제사장)들을 매개로 '정(情)'과 '한(恨)'의 정서를 나누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자신들에게 정을 주는 정치인에게 정을 주고, 한을 토로하는 정치인의 눈물을 보고같이 눈물짓는 것이다.
필리버스터는 계속되어야 한다
이점이 야당이 새누리당과의 물밑 접촉을 중단하고, 필리버스터를 3월 10일까지 이어가야 하는 이유다. 선거구획정안을 통과시키는 건, 의회 정치가 '정상적인 기능'을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 때나 가능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기능'이란, 정당 간에 이성적인 토론과 설득이 가능하다는 걸 말한다.
하지만 정작 새누리당이 과연 19대 국회 동안 야당을 '설득과 토론'의 상대자로 존중했다고 동의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야당이 필리버스터까지 하지 않고서는 국가주의에 제동을 걸 수 없는 상황까지 된 것 아닌가.
시민들에게 테러방지법의 내용도 '여전히' 추상적이다. 국정원의 지난 행적들이 어느 정도 위기감을 낳지만, 인권침해 우려는 '아직은' 관념적으로 다가온다. 반면에 죽은 줄만 알았던 민주주의는 '당장 눈앞에 살아있다' 어느 쪽이 현실적일까.
물론 2016년의 필리버스터 열광은, 비록 그 배경이 비극적이라는 점에서 시민들로 하여금 양가적인 감정을 들게 한다. 하지만 공감을 이끌어내고 긍정적인 만족을 제공한다. 또한 사람들의 이성적 능력과 자기표현 능력은 모든 분야에서 평등한 게 아니다. 테러방지법을 '쉽게' 해설하는 건 기자들이 할 일이다(그때 시민의 잠재적인 이성은 현실화된다). '테러방지법의 내용을 너는 아니 모르니' 시민들끼리 계몽적으로 굴 이유도 없는 셈이다.
야당 의원들이 할 수 있고, 현재 또 해야 하는 역할은 이 필리버스터를 계속하는 것이다. 정부와 새누리당이 반대 목소리를 듣고 독주를 멈추겠다는 구속력 있는 합의를 할 때까지, 의회 정치를 '일시 정지'시켜야 한다. 의회 정치의 정상화는 오히려 의회 정치 바깥에서 찾을 수도 있다. 시민들은 아직 인터넷 공간 안에서 머무르고 있어서, '눈에 보이는' 야당 의원들의 진정성에 '눈에 보이는' 답례를 못 하고 있다.
그리고 아직 그 기회가 있다. 바로 2월 27일 민중총궐기다. 집합 열광이란 결국 직접적인 '교류'가 있을 때 성숙하기 때문이다. 광장에 야당 의원들이 나온다면, 시민들과 더욱 연대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필요한 건 투표가 아닌 투쟁, 국가주의자들에게 '한 맺힌 시민들'이 무엇인지 함께 보여주는 게 아닐까.
야당이 2월 임시국회가 끝나는 3월 10일까지 무제한 토론을 이어가면, 테러방지법 통과는 무산된다. 하지만 그전에 선거구획정안을 통과시킬 수 없으므로 총선은 연기된다. 만약 총선을 예정대로 4월 13일에 치르길 선택한다면, 어쩔 수 없이 테러방지법을 표결에 부쳐야 한다. (관련 기사: 테러방지법 필리버스터, 사실상 26일이 시한) 이 경우 과반이 넘는 새누리당 의원들이 법안을 통과시킬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야당은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다. '총선'이냐, '테러방지법 저지'냐의 문제다. 그런데 테러방지법 저지를 선택하는 게 꼭 나쁜 선택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 '10시간 18분' 필리버스터 마친 은수미의 '눈물' 은수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24일 오후 직권상정된 테러방지법 처리를 저지하기 위해 국회 본회의에서 10시간 18분동안 무제한토론(필리버스터)을 진행 한 뒤 이종걸 원내대표 등 동료들과 포옹을 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 |
ⓒ 권우성 |
우선 야당은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다. 그러려면 우선 필리버스터를 '불꽃'으로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해, 현재 대중이 '테러방지법에 분노'하기보다는 '필리버스터에 열광'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아, 물론 야당의 테러방지법 비판은 나름 '합리적'이다.
이 법이 규정하는 '테러위험인물'이 뜻하는 바는 모호하다. 동시에 '테러위험인물'에 대한통신이용·금융거래 등과 같은 민감한 정보의 수집·조사 권한을 국정원이 대폭 가져간다. 대상은 모호한데 권한은 넓고, 심지어 '영장주의'(형사절차에서 강제처분을 할 때는, 법원 또는 법관이 발부한 영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에 벗어나는 독소조항도 다수 포함한다.
국민에 대한 무차별적 사찰과 인권침해가 우려되는 부분이다. 하필 권한을 가져가는 쪽이 2012년 대선 당시 정치개입 댓글 사건과 유우성씨 간첩사건 조작을 저지른 '국정원'이라는 점도 민감하다. 총선을 앞둔 시기에 미확인 첩보를 근거로 '국가비상사태'를 조성하며, 급하게 법안을 직권 상정하고 처리를 강행하려는 새누리당의 태도도 의심을 사는 중이다.
많은 시민들도 알고 있는 부분들이다. 하지만 이성적 대화의 과정인 '의회 정치'만을 염두에 둔다면, 시민들과의 교감을 지속시키기 어렵다. 다시 말해 불꽃이 들불로 번지기 위해서는 필리버스터가 '토론 이상의 무언가'로 승화되어야 한다.
한국은 '독일'이 아니다
독일의 철학자 하버마스는 시민사회의 이상적 모델로 '커피숍 모델'을 꼽았다. 커피숍에서 대화를 나누듯, 시민들이 합리적인 토론을 일상화한다면 정치·사회적 현안을 공론화해 자본과 국가 권력의 독주를 견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독일인들처럼 어려서부터 토론이 몸에 밴 사람들에게는 제법 맞아떨어질 법한 이야기다.
하버마스의 제자 호네트는 하나를 덧붙였다. 단지 이성적 토론의 결과로 사람들이 곧바로 사회 변혁에 뛰어든다기보다는, 존엄성을 무시당하는 경험에서 느끼는 '도덕적 울분'이 더 직접적 계기가 된다는 설명이다. 시민의 분노가 존엄성을 '인정받기 위한 투쟁'(인정투쟁)을 위한 힘이 될 때, 사회의 진보를 이끌어왔다는 걸 인류 역사가 증명한다는 뜻이다.
이 역시 풀뿌리 민주주의 정치가 발달해 있고 어려서부터 자기표현에 친숙하도록 교육을 받는 독일인들에게는 제법 맞아떨어질지 모른다. 하지만 '커피숍 모델'도 '인정투쟁 모델'도 한국의 맥락으로 가져오면, 100% 맞아떨어지는 건 아니다. 한국인들이 독일인들보다 이성적 능력이 모자라거나 인정욕구가 없어서가 아니다.
▲ 위르겐 하버마스의 <공론장의 구조변동>. | |
ⓒ 나남 출판 |
이때 응어리진 감정은 부당한 권위에 순응하고 수직적 분노로 분출되지 못했으나,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감정은 오히려 수평 폭력으로 뒤집혀 분출되기 십상이다. 약자들끼리 편을 가르고 물어뜯는 '혐오'가 만연한 이유다. 쏟아지는 뉴스들을 손쉽게 접하면서도 결국 서로의 만남이 컴퓨터 모니터와 스마트폰 액정 앞에서만 이뤄질 때, 서로를 '가볍게 판단'하고 '냉소'하게 된다.
사람들끼리 물리적 거리가 멀면 교감의 거리도 멀다. 교감이 멀면 '연대'가 약해지고, 연대가 약해지면 민주주의 공동체는 감정적 기반에서부터 '잠식'된다. 기득권에게 권리를 침해당하는 동안, 혐오와 냉소가 만나 약자들끼리 물어뜯는 '헬조선'이 되는 이유다.
국정원 대선 여론조작 사건, 유우성씨 간첩조작 사건, 세월호 참사 진실규명, 역사 교과서 국정화 추진, 일자리 쪼개기와 쉬운 해고, 젠더 불평등 문제, 수저계급론 등. 이 문제들에 대해서 어느 하나라도 시민사회에 공론화가 만족스럽게 이뤄지고, 연대가 지속돼 국가주의를 견제하는데 성공했을까. 우울하지만 '예'라고 답하기 힘들다.
필리버스터가 '들불'로 번지려면
결국 시민사회와 의회 정치 사이에 미스매치가 있다. 전자가 이성과 도덕적 분노에 기반한 공론장과 인정투쟁장과는 아직 거리가 있지만, 의회 정치는 양당 구도 하에서 '이성적 설득'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필리버스터 열광은 시민사회와 의회 정치 사이에 드문 불꽃을 연출한다. 시민들 스스로 필리버스터가 '토론 이상의 무엇'이어야 하는지 정치권에 신호를 보내고 있다. 바로 일종의 종교적 의례, 다시 말해 '축제'로서의 기능이다.
시민들은 '테러방지법'에 분노하기보다 '필리버스터'에 열광한다. 가령 더불어민주당, 국민의 당, 정의당 의원들이 밤을 새우며 테러방지법의 내용과 문제점을 낭독할 때, 이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김광진 의원 힘내라'는 따뜻한 말을 건네는 사람들은 100만 명이나 된다. 은수미 의원의 눈물에 함께 눈물짓기도 한다. 이성이나 도덕적 분노 이상의 무언가의 힘이 필리버스터 열광을 만드는 게 아닐까.
▲ 네이버 검색 1위에 오른 '김광진 힘내라' | |
ⓒ 오준승 |
사회학자 뒤르켐은 '집단 열광'이 군중들로 하여금 잃어버린(혹은 잊힌) '성스러운 것'을 다시 느끼게 함으로써, 사회 변혁을 위한 감정적 에너지를 재충전시켜 준다고 설명한다. 필리버스터에서 '성스러운 것'은 대의 민주주의, 즉 "저의 주인이신 국민은 포기할 수 없는 존재"(은수미)라는 말을 '진정성 느껴지게'할 수 있는 정치인이 살아있다는 현실이다.
이때 시민들이 느끼는 감정은 테러방지법에 대한 '분노'라기보다는, 국회의 의사진행 발언대 앞에 서 있는 '혼이 깃든'(진정성 있는) '샤먼'(제사장)들을 매개로 '정(情)'과 '한(恨)'의 정서를 나누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자신들에게 정을 주는 정치인에게 정을 주고, 한을 토로하는 정치인의 눈물을 보고같이 눈물짓는 것이다.
필리버스터는 계속되어야 한다
▲ 김광진 의원, 테러방지법 반대 무제한 토론 정의화 국회의장이 지난 23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테러방지법을 직권상정하자, 더불어민주당 김광진 의원이 본회의 의결을 막기 위해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을 하고 있다. | |
ⓒ 남소연 |
이점이 야당이 새누리당과의 물밑 접촉을 중단하고, 필리버스터를 3월 10일까지 이어가야 하는 이유다. 선거구획정안을 통과시키는 건, 의회 정치가 '정상적인 기능'을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 때나 가능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기능'이란, 정당 간에 이성적인 토론과 설득이 가능하다는 걸 말한다.
하지만 정작 새누리당이 과연 19대 국회 동안 야당을 '설득과 토론'의 상대자로 존중했다고 동의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야당이 필리버스터까지 하지 않고서는 국가주의에 제동을 걸 수 없는 상황까지 된 것 아닌가.
시민들에게 테러방지법의 내용도 '여전히' 추상적이다. 국정원의 지난 행적들이 어느 정도 위기감을 낳지만, 인권침해 우려는 '아직은' 관념적으로 다가온다. 반면에 죽은 줄만 알았던 민주주의는 '당장 눈앞에 살아있다' 어느 쪽이 현실적일까.
물론 2016년의 필리버스터 열광은, 비록 그 배경이 비극적이라는 점에서 시민들로 하여금 양가적인 감정을 들게 한다. 하지만 공감을 이끌어내고 긍정적인 만족을 제공한다. 또한 사람들의 이성적 능력과 자기표현 능력은 모든 분야에서 평등한 게 아니다. 테러방지법을 '쉽게' 해설하는 건 기자들이 할 일이다(그때 시민의 잠재적인 이성은 현실화된다). '테러방지법의 내용을 너는 아니 모르니' 시민들끼리 계몽적으로 굴 이유도 없는 셈이다.
야당 의원들이 할 수 있고, 현재 또 해야 하는 역할은 이 필리버스터를 계속하는 것이다. 정부와 새누리당이 반대 목소리를 듣고 독주를 멈추겠다는 구속력 있는 합의를 할 때까지, 의회 정치를 '일시 정지'시켜야 한다. 의회 정치의 정상화는 오히려 의회 정치 바깥에서 찾을 수도 있다. 시민들은 아직 인터넷 공간 안에서 머무르고 있어서, '눈에 보이는' 야당 의원들의 진정성에 '눈에 보이는' 답례를 못 하고 있다.
그리고 아직 그 기회가 있다. 바로 2월 27일 민중총궐기다. 집합 열광이란 결국 직접적인 '교류'가 있을 때 성숙하기 때문이다. 광장에 야당 의원들이 나온다면, 시민들과 더욱 연대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필요한 건 투표가 아닌 투쟁, 국가주의자들에게 '한 맺힌 시민들'이 무엇인지 함께 보여주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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