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보위사령부(보위사) 소속 공작원이 탈북자를 가장해 국내에 잠입한 뒤 적발돼 국가보안법상 간첩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됐다.’
2014년 3월 서울중앙지검은 ‘보위사 직파간첩’ 홍강철씨(43)를 적발해 구속기소했다고 밝혔다. 국가정보원이 탈북자 합동신문센터(현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에서 그를 조사 하던 중 간첩 혐의를 밝혀냈다는 것이었다. 당시 언론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탈북자로 위장한 간첩이 국내에 암약하고 있다’는 의심으로 여론은 떠들썩했다. 일부 언론에서는 댓글 공작 의혹으로 궁지에 몰렸던 국정원의 필요성이 재확인된 것이라며 여론을 몰아갔다.
하지만 불과 반년 만에 검찰의 발표는 뒤집어졌다. 2014년 9월 서울중앙지법은 홍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은 항소했지만 지난 19일 서울고등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보위사 직파 간첩’이라던 홍씨는 1심 판결 이후 석방돼 ‘자유의 몸’이 됐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남한의 사법부가 북한의 간첩에게 농락 당하고 있기라도 한 걸까.
지난 25일 서울 마포구 서강대 예수회센터에서 홍씨를 만났다. 이날 이 곳에선 홍씨의 변호를 맡은 ‘민들레·국가폭력 피해자와 함께 하는 사람들’ 후원 행사가 열렸다. 행사를 앞두고 2시간에 걸쳐 사건 전반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의 목소리는 수시로 높아졌다. 홍씨의 이야기와 1·2심 법원 판결문을 바탕으로 ‘보위사 간첩 사건’을 들여다봤다.
■법원의 판단… ‘의문스럽고, 의심스럽고, 앞뒤도 안 맞는 국정원·검찰 수사’
검찰 수사는 의외의 지점에서 허점을 드러냈다. 1심과 2심 재판부 모두 검찰이 8차례에 걸쳐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 중 일부에 대해 “증거 능력이 없다”고 판시했다. 형사소송법 244조의 ‘진술거부권’과 ‘변호인 조력권’이 홍씨에게 불분명하게 고지됐다는 것이다. 진술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자신의 의사대로 한 것인지 입증할 만한 영상녹화가 없었다는 지적도 따랐다. 검찰 수사는 그 시작부터 허술했던 셈이다. 홍씨는 그의 기소 사실을 공표된 뒤에야 구치소에 면회를 온 변호사와 처음 만났다.
검찰 수사의 허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검찰이 제기한 공소 사실에 따르면 홍씨는 1998년 평양 강건종합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99년 조선노동당에 입당해 2012년 5월 보위사 공작원으로 선발됐다. 보위사령부는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보안부와 함께 북한의 3대 정보·사찰기관으로 이 중 군을 정치적으로 감시하는 기관이다. 한국으로 치면 국군기무사령부에 해당된다.
검찰에 따르면 홍씨는 2013년 6월 보위사 ‘윗선’의 지령에 따라 북한과 중국 접경 지역에서 탈북 브로커 ㄱ씨를 납치하려다 미수에 그친 혐의를 받았다. 또 그 해 8월 홍씨는 탈북자와 탈북자 단체 동향을 파악하라는 등의 임무를 받고 국내에 잠입한 혐의도 받았다.
하지만 재판부는 홍씨가 받고 있는 혐의를 모두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홍씨, 애초 홍씨를 국내 경찰에 제보한 ㄱ씨, 이들과 연관된 다른 탈북자들 등이 한 진술과 법정 증언을 대비하면서 검찰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1심과 2심 재판부는 검찰 주장에 대해선 의문과 의심을 드러냈고 홍씨의 주장이 더 설득력 있다고 봤다.
재판부는 검찰이 파악한 홍씨의 국내 잠입 경위에 대해선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취지로 판시했다. 홍씨가 북한 국경을 넘기 위해 택한 우회 경로와 이후 중국, 라오스, 태국을 거쳐 국내로 입국한 과정에 대해서 재판부는 “보위사의 정식 공작원이 그 정도로 복잡하고 고생스러운 경로를 거쳐 탈북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 그는 독방서 84일 동안 1000여장의 자필진술서를 써야만 했다.
“홍씨가 탈북자 합동신문센터에서 대부분 기간 동안 격리된 채 혼자서 조사를 받았던 점, 지속적으로 진술서를 반복 작성하도록 요구받았던 점, 피의사실에 부합하는 진술서를 작성하기까지는 국정원 수사관으로부터 수정·보완을 요구받기도 했던 것으로 보이는 점….”
2심 재판부는 또한 홍씨가 합동신문센터에서 쓴 진술서 중 상당 부분의 증거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검찰 수사는 물론 앞서 진행된 국정원의 조사 역시 법정에서는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다.
합동신문센터는 탈북자들이 국내에 들여와서 처음 머무는 공간이다. 이곳 조사를 무사히 통과하면 하나원으로 옮겨진다. 합동신문센터는 국가보안시설 최고수준인 ‘가’급으로 지정돼 있다. 국정원, 기무사, 경찰 등이 합동으로 ‘위장간첩’ 여부 등을 심사하는 곳으로 국정원 산하기관에 가깝다.
앞서 홍씨는 2013년 8월 국내에 입국한 뒤 합동신문센터에서 9월 3~17일 1차 조사를 받았다. 이어 그 해 10월15일부터 다음해 1월6일까지 84일간 2차 조사를 받았다. 홍씨의 변호인이 재판부에 제출한 의견서에 따르면 홍씨가 당시 쓴 자필진술서는 1차 조사에서 250여장, 2차 조사에선 1000여장에 이른다. 재판부는 2차 조사 당시 홍씨가 쓴 진술서에 대해 “특신상태(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에서 이뤄졌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정말 아무도 모르게 개죽음 당할 것 같았어요.” 홍씨는 합동신문센터에서 국정원 수사관으로부터 조사를 받던 때를 떠올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 때 진술이 이렇게 발전했어요. 처음엔 수사관이 ‘보위부 공작원하다가 입국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라고 얼렀어요. 거기서 주는 담배를 얻어서 폈는데, 한번은 ‘담뱃값을 하라’고 하기에 그 말에 담긴 뜻을 눈치 못 채고 ‘담뱃값이 얼마냐’고 물어본 적도 있어요(웃음). 나중엔 ‘내가 공작원이라고 하면 수사관들이 상금 타나보다’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내가 보위부는 조직도 잘 모르니까 보위사 공작원을 했다고 합시다’, 이렇게 말하게 된 거예요.”
■ 홍씨, “국정원 수사관이 ‘3류 첩보소설 쓰지 마라’고 했다”
홍씨는 1973년 함북 무산에서 태어났다. 1992년 전문학교, 1998년 초급장교 양성기관에서 공부했다.
홍씨는 1999~2002년 북한과 중국 접경 지역에서 국경경비대로 근무했다. 당시 중국 밀수꾼들이 그에게 ‘뒷돈’을 주는 일이 잦았다고 했다. 이것이 보위사에 발각돼 7개월 동안 조사를 받으면서 보위사를 어느 정도 알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2013년 8월 탈북했다.
검찰의 공소 사실에 따르면 홍씨는 2013년 5월 함경북도 내 보위사 사무실에서 김모 초소비서에게서 공작원이 돼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는 김모 비서에 대해 “국경경비대를 그만둔 뒤 직접 밀수 사업을 하면서 뒷돈을 쥐어줬던 관리들 중 하나”라고 했다.
“날마다 ‘숙제’를 내줘요. ‘오늘은 김모 비서에 대해 한번 써봐’. 쓰고나면 ‘제대로 된 것 같지 않으니 다시 써오라’고
했거든요. 그렇게 계속 쓰는 거예요. 수사관이 ‘공작원은 맹세문을 읽고 서약서와 이력서를 쓴다더라’고 알려주면서 ‘이력서 한번 써봐라’고 시키기도 했죠. ㄱ씨 납치 사건에 대해서도 처음엔 ‘내 장모가 ㄱ씨가 남한 간첩인 것 같으니까 납치해서 보위부에 넘기고 (당시 탈북 브로커를 하다 붙잡혀 있던) 아내를 꺼내오자고 했다’고 썼더니 ‘사람 놀리냐’면서 다시 쓰라고 해요. 나보고 ‘3류 첩보 소설 쓰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나쁜 토대’ 지닌 ‘보위사 공작원’… “국정원이 북한을 이렇게 모를까”
검찰은 국정원 수사관들이 “북한서 여유로운 생활을 했다”는 등의 홍씨의 진술을 의심해 추궁한 끝에 그가 보위사 공작원이란 걸 밝혀냈다고 했다. 홍씨는 어이없어했다. 그는 북한서 그가 돈을 버는 데 집착한 계기가 ‘나쁜 토대’에 있다고 했다. ‘출신 성분’을 따지는 북한에서 출세를 할 수 없자 대신 돈을 많이 벌어 보상받고자 했다는 것이다.
홍씨는 북한의 수재들이 모인 강건종합군관학교를 졸업했다. 하지만 한국전쟁 당시 우익단체인 ‘서북청년단’의 한 분파에 소속돼 전투를 벌이다 사망한 큰아버지 때문에 홍씨가 출세할 길은 막혀 있었다. 이 때문에 국경경비대에 근무할 때부터 엇나가기 시작해 밀수와 탈북 브로커 등 ‘돈이 되는 일’에 손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제도에 대한 반감이 있으니까 그런 일을 한 거죠. 당에 대한 충심이 있으면 그랬겠어요. 국경경비대에 있으면서 탈북자들 잡는 걸 보고 ‘당장 굶어죽게 생겼는데 중국 가서라도 먹고 살아야지, 사회주의가 대체 인민한테 좋은 게 뭐냐’고 생각했죠. 나중엔 돈이 생기니까 경찰·군인·고위관리 죄다 나한테 ‘설설’ 기더라고요. 그런데서 쾌감을 느낀 거죠.”
홍씨는 일종의 북한 ‘건달’이었던 셈이다. 그는 “주먹세계에서 조금 날렸다”면서 “다만 조폭은 아니었다”고 했다.
그는 이러한 사정에 대해서도 설명했지만 국정원 수사관들에게 먹히지 않았다고 했다. 합동신문센터 조사 초기엔 수사관들에게 “머저리들, 그런 수준으로 어떻게 대북 첩보를 하느냐”고 대들기도 했단다. 북한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르더라는 것이다. 그가 밀수꾼을 하면서 보위부 관리들에게 뇌물을 줬다고 하면 수사관들이 되려 “북한 보위부가 어떤 곳인데 그런 돈을 받느냐”고 했다고 한다. 홍씨는 “국정원 사람들이 남한이 아니라 북한 보위부 편에 서서 말하는 것 같더라”고 말했다.
■“탈북자 인권 철저히 무시하는 합동신문센터 조사 방식 바꿔낼 것”
1·2심에 걸쳐 무죄를 선고 받은 홍씨는 나중에 대법원서 최종적으로 무죄임이 확정된다면 한국에서 무역업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홍씨가 그보다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 그가 겪었던 합동신문센터 조사 방식을 바꾸는 일이다. 그는 ‘독방 폐지’ ‘변호사 등 접견권’ ‘자유로운 통행권’ 등을 언급했다.
“독방에 들어가니까 세상 밖에 버려진 기분이 들었단 말이죠. 저 같은 경우엔 제 뒤로 수사관 한 명이 걸어다니면서 ‘(책상에) 손 올려라’ ‘손 모아라’ ‘바로 앉아라’ 등 제 자세까지 일일이 지적했어요. 탈북자들은 북한 보위부처럼 수사기관은 응당 그렇게 하는 걸로 받아들이는 거죠. 인생 밑바닥에서 살았다고 탈북자들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봐요.”
현재 홍씨는 가톨릭 신부들의 지원을 받아 서울 모처에서 생활하고 있다. 아직 ‘보위사 공작원 홍강철씨 사건’에 대한 검찰의 상고 여부는 결정되지 않은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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