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을 정치자원 삼아 사람들 순응 유도… 집권 후반기 국정 장악력 위해 활용
희생. 불안. 위기.
박근혜 대통령은 이 세 단어를 힘주어 말했다. 2월 24일 국회에서는 테러방지법 직권상정에 반대하는 더불어민주당 은수미 의원의 필리버스터가 진행 중이었다. 같은 시간 청와대에서는 경제자문회의가 열렸다. 박근혜 대통령의 말이다. “많은 국민이 희생을 치르고 나서 통과를 시키겠다는 얘기인지, 이것은 그 어떤 나라에서도 있을 수 없는 기가 막힌 현상들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불안하고 어디서 테러가 터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경제가 발전할 수 있겠나.” “세계 경제 둔화와 북한의 도발로 남북 긴장이 고조되면서 우리는 안보와 경제, 다 같이 어려운 복합 위기상황에 처해 있다.” 유권자들의 불안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발언들이다. 박 대통령은 그 불안과 공포의 책임자로 국회를 지목했다.
‘공포’는 박근혜 대통령을 설명하는 키워드다.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을 역임한 인명진 목사는 박근혜 대통령의 지난 3년을 “무서웠다”는 한마디로 표현했다. 박 대통령 취임 3주년 전날인 2월 24일 인 목사가 CBS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자유당 정권 때 대통령부터 겪어봤지만, 이렇게 유난히 박근혜 정부만큼 찬바람이 쌩쌩 나는 한겨울 같은, 그런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다.”
당장의 테러방지법만이 아니다. 박 대통령은 자신의 정책이 반대에 부딪힐 때마다 유권자들의 공포 감정을 자극하는 발언을 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할 때다. 2015년 11월 10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박 대통령은 말했다. “자기 나라 역사를 모르면 혼이 없는 인간이 되는 것이고,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생각하면 참으로 무서운 일….” 지난해 12월 여당 지도부를 만난 자리에서도 극단적인 비유를 든 공포 발언은 이어졌다. 박 대통령은 노동법 등 쟁점법안의 처리가 지연될 경우 경제도 일자리도 다 죽는다며 “죽기 전에 치료하고 빨리 살려내야 한다”고 말했다. 개성공단 폐쇄가 강행된 직후인 2월 16일 국회에서 열린 ‘국정에 관한 연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이대로 변화 없이 시간이 흘러간다면, 브레이크 없이 폭주하고 있는 김정은 정권은 핵·미사일을 실전배치하게 될 것이고, 우리는 두려움과 공포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공포 정치. ‘공포 정치’는 ‘사람들의 불안의식을 하나의 정치적 자원으로 삼아 사람들의 순응을 유도함으로써 목적을 실현하고자 하는 정치’를 뜻한다. 2013년 출간된 프랭크 푸레디의 책 <공포 정치>는 공포 정치를 이와 같이 정의했다. 공포는 정치인들에게 하나의 정치적 자원이다. 특히 북한이라는 공포의 수단이 상존한 한국에서 북한발 ‘공포’는 보수정치세력이 언제든 손쉽게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다. 집권 이후 박근혜 대통령은 이 자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국정원 권력 강화를 독소조항으로 갖고 있는 ‘테러방지법’ 외에도 ‘통합진보당 해산’ ‘노무현 전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등이 대표적이다. 모두 북한발 ‘공포’를 정치적 자원으로 삼았다.
박 대통령의 ‘공포 정치’는 취임 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 대통령은 ‘복지’와 ‘경제민주화’를 전면에 내세웠다. 박 대통령을 지지하는 것은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시대로 회귀하는 것이라는 야권의 비판이 무색하게 박 대통령은 ‘공포 정치’와는 무관한 행보를 보였다. 그러나 임기가 시작되자마자 박 대통령은 돌변했다. 2012년 선거를 도왔던 측근들이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고 표현할 정도의 드라마틱한 변화였다. 이 변화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프랭크 푸레디의 ‘공포 정치’를 이론적 기반으로 한 책 <감정은 어떻게 사회를 움직이는가>(박형신·정수남, 한길사)는 이 간극을 ‘공포’라는 감정을 통해 설명한다. 이 책은 ‘공포 정치’와 ‘복지 정치’라는 틀로 한국 보수정권의 감정정치를 분석한다. ‘공포 정치’와 ‘복지 정치’ 사이의 거리는 일견 멀어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은 ‘공포 정치’와 ‘복지 정치’ 모두 보수정치세력의 ‘권력상실 공포’라는 한 뿌리의 감정에서 나왔다고 분석한다. ‘공포 정치’와 ‘복지 정치’는 보수정치세력에 동전의 양면처럼 언제든 뒤집을 수 있는 정치행태라는 게 이들의 지적이다.
2012년 총·대선을 앞두고 보수정당인 새누리당은 왜 복지정책을 쏟아냈을까. 핵심 기저에는 보수정치세력의 공포가 있었다. 권력 상실, 권력 축소에 대한 공포다. 대선 직전인 2012년 10월 ‘한국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명박 대통령의 3분기 지지율은 23%였다. 역대 대통령 임기말보다 낮은 수치였다. 퇴임을 앞둔 동일한 기간에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지지율이 28%,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27%였다. 이명박 전 대통령보다 지지율이 낮았던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유일하다. IMF 외환위기로 전국이 패닉 상태에 빠졌던 때다. 당시 새누리당으로서는 권력 상실이라는 공포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새누리당은 전략이 필요했다. <감정은 어떻게 사회를 움직이는가>는 보수정치세력이 권력 상실, 권력 축소 공포에 대응하는 전략을 두 가지로 분석한다. ‘복지 정치’와 ‘공포 정치’다. 첫째, 복지 정치는 유권자의 지지를 재확보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성찰적 반성을 통해 미래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전략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권력 유지를 위해 전통적 지지세력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중도세력을 비롯한 새로운 지지기반을 적극 확보하기 위해 복지 정치를 전면에 부각시키는 전략이다. 둘째, 공포 정치는 외부 세력이 초래할 위험을 더욱 강조함으로써 공포를 외부로 표출하는 공포 유발 정치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새로운 지지세력의 확보보다는 공포를 동원해 기존 지지세력의 이탈을 방지하고 반대세력에 대한 지지를 저지하거나 반대세력 내의 연대를 약화시키는 게 목적이다.
‘복지 정치’와 ‘공포 정치’ 모두 보수정치세력의 권력 상실에 대한 ‘공포’에서 기인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공포’에 대응하는 전략이 ‘복지’와 ‘공포’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발현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책은 ‘공포의 진원지’에 따라 전략이 달라진다고 분석했다. 권력 상실에 대한 공포가 자신들의 실정 내지 실책에서 기인한다고 판단했을 경우, 보수정치세력은 ‘복지 정치’를 택할 가능성이 크다. 반면 보수정치세력이 처한 정치적 불안과 위기의 원인이 외부세력에 의한 것이라고 인식한다면 ‘공포 정치’를 강행할 확률이 높다. 2012년 새누리당이 가졌던 권력 상실에 대한 공포의 핵심에는 이명박 정부의 낮은 지지율이 있었다. 공포의 진원지가 내부에 있었기 때문에 보수정치세력은 ‘복지 정치’를 선택했다. 전략이 성공해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승리하면서 이와 동시에 공포도 사라지고 공포의 진원지도 사라졌다. 2013년 ‘복지 정치’에서 ‘공포 정치’로 탈바꿈한 박근혜 대통령의 변신은 ‘공포의 진원지’가 바뀐 보수정치세력의 자연스러운 행로였던 셈이다.
북한이라는 수단을 주요 자원으로 한 박 대통령의 ‘공포 정치’는 집권 4년차에 접어들면서 ‘개성공단 폐쇄’와 ‘테러방지법’으로 정점을 찍고 있다. 권력자의 ‘공포 정치’ 배후에는 권력자 본인의 ‘공포’가 있다는 것이 프랭크 푸레디의 분석이었다. 콘크리트 지지율 40%, 분열된 야권, 여당 내 ‘진박 경쟁’이 불거질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는 박 대통령에게 ‘권력 상실’의 공포가 있을까.
박 대통령이 강행한 ‘개성공단 폐쇄’ ‘테러방지법’은 총선 승리용 ‘북풍’이라는 진단은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것이 당장의 총선보다 총선 이후 남은 2년의 임기에 대한 공포에서 기인한다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 새누리당 관계자는 총선 이후 대통령의 당내 입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시간이 정하는 게 아니겠나. 박근혜 대통령이라는 태양은 지는 해다. 총선이 지나면 친박이 얼마나 남겠나. 친박이 아마 공천 단계에서 불이익을 받지는 않을지라도, 당선되더라도 친박이었다가 딴 데로 갈 상황이다. ‘나 친박 아니다’라고 할 사람도 나올 것이다. 지금도 친박이 수적으로 적다. 마지막까지 박 대통령을 결사옹위하는 사람이 20명이나 될까.” 박근혜 대통령에게 공포는 당장의 총선이 아니라 총선 이후 벌어질 레임덕이라는 것이다. 가파른 권력 상실이 우려되는 박 대통령에게 집권 후반기를 틀어쥘 국정 장악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테러방지법’은 테러 방지를 목적으로 국가정보원이 국가권력을 장악할 수 있게 하는 법안이다. 국가정보원은 대통령 직속기관이고, 테러방지법을 통해 대통령의 권력은 더욱 강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의 분석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20대 국회와 2017년 대선을 운용하기 위한 핵심 수단이 바로 국정원이다. 국정원을 손에 잡지 못하면 집권 하반기에 국정운용을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국정원의 권력 강화는 향후 남은 2년을 박 대통령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20대 국회가 구성되면 박근혜 대통령은 새누리당을 자기 마음대로 못할 것이다. 새누리당을 자기 마음대로 운영하고 야당도 제압하려면 국정원을 잡아야 한다.” 서 연구위원은 이것이 남은 임기 2년 동안 박 대통령 집권 구상의 핵심이라고 분석했다. “박 대통령은 차기 정부가 구성될 때 자신에게 적대적인 정부가 구성되면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려면 남은 2년 동안 자신의 페이스대로 국회를 움직여야 하는데, 20대 국회에서는 친박이 다수파를 구성하기 어렵다. 잠재울 수 있는 핵심 수단은 국정원일 것이다.”
집권 3년 동안 계속됐던 박 대통령의 ‘공포 정치’는 남은 임기 2년 동안에도 계속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2월 24일 <한국일보> 보도에 따르면 안보상황에 불안감을 느끼고 정부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도입과 잇따른 개성공단 중단 발표에 대해서는 긍정 평가가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안보상황이 ‘매우 불안’(15.9%)하다거나 ‘대체로 불안’(43.2%)하다고 느끼는 응답자가 ‘안정적’(13.5%)이라고 느끼는 쪽보다 4배 이상 높았다. 사드의 국내 배치는 응답자의 절반(50.4%)이 찬성했고, 정부의 개성공단 중단에 대한 긍정 평가는 55.5%로 부정 평가(36.9%)보다 높았다. 정한울 고려대 평화민주주의연구소 교수는 “개성공단 중단이나 사드 배치 등의 여론을 보면 북한에 강경하게 대응하는 데 대한 평가가 나쁘지 않다. 박 대통령 취임 3주년 평가에서 여전히 박 대통령에 대해 소신이 있고 위기 대처능력이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데, 이는 안보분야에 대한 평가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상일 아젠다센터 대표는 “박근혜 대통령의 핵심 지지층은 최저 수준으로 봐도 30%이다. 임기 3년차인 지금 여론조사도 나쁘지 않다. 집권 후반기에도 가감없는 기조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정치의 본령이 국민들의 공포를 끊임없이 유발하는 일일까, 국민들에게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일일까. ‘복지 정치’로 대권에 도전했던 박 대통령은 ‘공포 정치’로 5년의 임기를 채워나가고 있다. <감정은 어떻게 사회를 움직이는가>는 보수정치세력의 복지 정치에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보수정권의 복지 정치는 집권 보수세력의 권력 상실 또는 권력 축소의 공포에서 연원한다…. 이러한 복지 정치는 자신의 공포가 사라지거나 약화되는 순간 단순한 레토릭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 가능성이 크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러한 보수정치세력의 한계와 실체를 그대로 보여주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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