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2일부터 중앙일보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증언록 ‘소이부답(笑而不答)’을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증언록은 중앙일보 기자들과 작가까지 동원돼 114회까지 이어졌고, 웹툰으로 재구성됐으며 책으로도 만들어질 중요한 역사적 자료입니다. 하지만 증언록 곳곳에는 역사왜곡과 미화의 흔적이 보입니다. 미디어오늘은 이를 검증하는 차원에서 증언록의 이면을 살펴보고 중앙일보가 하지 않은 김종필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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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피를 먹기 전에 먼저 빵을 먹고 자란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JP)가 중앙일보 증언록 ‘소이부답’에서 군부독재시절 경제성장을 치적으로 내세우며 한 말이다. 미국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남긴 명언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애국자와 압제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가 변형돼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라고 통용되던 것을 빗댄 것이다.
18년간 이어진 박정희 정권은 자신의 정당성을 경제성장에서 찾는다. 당시 경제성장의 원동력은 1965년 한일협정으로 일본에 받은 청구권 자금(무상 3억 달러 등 총 8억 달러)과 1964년부터 1973년까지 9년간 베트남(월남)전쟁에 젊은이들을 보내 번 돈(전쟁특수 포함 약 10억 달러)이었다. JP가 말한 ‘빵’은 국민의 핏값이었다.
베트남전, 뭘 위해 싸웠나?
베트남전에 파병된 군인은 32만 명이 넘는다. 그리고 사망자 5099명, 부상자 1만1000여명, 정확한 집계조차 힘든 고엽제 피해자들이 있다. 박정희 정권은 뭘 위해 국민의 피를 이국땅에 뿌렸을까? JP는 “월남이 사실상 공산군에 포위된 상태였다”며 “자유 우방들은 월남을 시급히 구출해야 할 상황이었다”고 참전 이유를 설명했다.
▲ 1966년 10월13일 김종필 공화당의장이 월남에 파병된 백마부대를 방문했다. 사진=국가기록원 |
1967년 1월 박정희 전 대통령은 대전 유세에서 “만약 한국군이 파견되지 않았다면 당시 내 추측으로 주한미군 2개 사단이 베트남으로 갔을 것”이라며 “한국의 국방을 위해서도 한국군이 월남에 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고 말했다. 종합하면 베트남의 공산화돼 중국 하에 놓이는 걸 막아야 하는데 주한미군이 빠져나갈 수 있으니 한국군이 대신 간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캄보디아·라오스 등 동남아 전체가 공산화돼 중국 영향력에 놓일 것이라는 ‘도미노 이론’을 주장하며 전쟁에 뛰어들었다. 사실 미국의 베트남 개입은 1954년부터 있었다. 베트남은 한국과 다르게 1945년 2차대전이 끝나고도 프랑스의 지배가 끝나지 않다가 1954년 제네바협정 결과 17도선에서 남북으로 분단돼 북베트남(월맹)에는 공산당, 남베트남에는 친미정권(베트남공화국)이 들어섰다.
북베트남이 지원하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은 남베트남 농민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았다. 남베트남 정부가 친불(한국으로 보면 친일)정권에서 친미정권으로 주인만 바꿨을 뿐 부정부패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트남전쟁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내전이었고, 미국의 개입은 명분이 부족했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박태균 교수는 “만약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베트남 공산당과 중국 공산당 갈등이 조기에 나타났을 것”이라며 “베트남이 통일된 지 4년도 되지 않아 양국이 충돌한 것을 봐도 그렇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도미노 이론’이 오판이었다는 분석이다. 뿐만 아니라 전쟁 개입과정도 매끄럽지 않았다.
JP는 “64년 8월 미군의 구축함이 월맹군의 어뢰정 공격을 받아 침몰하는 ‘통킹만 사건’이 벌어져 월남전은 전면전으로 확대됐다”며 자신이 64년 9월 미 상원의원들에게 ‘한국군이 월남전에 참전하겠다’는 뜻을 드러냈다고 말했다. 하지만 북베트남이 통킹만에서 미국 매독스 호를 선제공격했다는 ‘통킹만 사건’은 조작됐다는 기정사실로 하고 있다.
▲ 1966년 8월18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베트남전에 참전한 백마부대를 시찰하고 있다. 사진=정부기록사진집 |
2003년 ‘전쟁의 안개’라는 다큐멘터리 영화(2004년 아카데미 영화제 작품상 수상)에서 로버트 맥나마라 베트남전 당시 미 국방부 장관은 미 의회에서 참전의 결정적 계기가 됐던 1964년 8월4일 북베트남의 미국 공격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미 국무부 ‘특별국가정보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참전 반년 전인 64년 5월 미국 존슨행정부는 북베트남에 대한 적극적 군사작전을 고려했고, 통킹만 사건 초기에도 곳곳에서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조작해 베트남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그렇게 참전한 미국은 선전포고조차 없었다. 미군들조차 이 전쟁의 목표가 무엇인지, 왜 싸워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적이 북베트남인지,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베트콩인지 알 수 없었다. 베트콩에 우호적인 남베트남 민중은 포섭해야 할지 배척해야 할지도 기준이 없었다.
미국은 23개국에 파병을 요청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물론 미국의 핵우산 아래 있던 일본도 파병 요청을 거부했다. 결국 미국은 아시아 국가들에 수당을 지급한다는 조건을 걸었고 대만, 필리핀 등 6개국이 참전했다.
미국은 용병 수당뿐 아니라 박정희 정부에 1억5000만 달러의 차관을 약속했다. 왜 그랬을까?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인종전쟁’이라는 비난을 피하고자 아시아 군인의 비용을 부담했다는 증언이 있다.
강원용 목사는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 인터뷰에서 “미국이 결국 한국군의 무력이 필요한 게 아니라 프랑스가 싸우다 나가서 백인 대 황인종의 전쟁인데 미국으로서는 이것을 면하지 않고서는 전쟁을 할 수 없다”며 “황인종 나라가 전쟁에 참여했어야 한다”고 주한 미 대사관 정무참사관 필립 하비브의 말을 옮겼다.
▲ 비호 6호 작전은 1966년 1월 19일부터 1월 10일까지 고보이 평야지대에서 1연대의 2개 대대 병력이 투입된 최초의 연대급 작전이다. 이 작전중 병사를 공중투입시켜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 작전 결과 적 사살 196명, 포로 49명, 용의자 773명, 소화기 58정, 공용화기 2정 등의 전과를 올렸다. 사진은 비호 6호 작전 수행중 헬리콥터가 지원하는 장면. 사진=정부기록사진집 |
6개국 중 대규모 전투병력 파병은 한국이 유일했다. 한국의 월남 파병은 이렇게 시작됐다.
피 팔아 얻어낸 빵은 충분했나?
한국군 베트남 파병으로 미국은 명분만 얻은 게 아니다. 1970년 미 상원외교위원회에서 열린 월남 참전국 미국 지원내역에 대한 ‘사이밍턴 청문회’에 따르면 1인당 군 유지비용은 미군이 1만3000달러, 한국은 5000달러였다. 미국 입장에서는 1인당 8000달러를 절약할 수 있다. 한국군 32만명을 파병했으니 미국은 약 25억6000만 달러를 아꼈다고 볼 수 있다. 미국 내에서도 한국군 파병이 늘어날수록 실제 비용도 적게 들고 미 참전군 숫자를 줄일 수 있어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한국군 수당은 심지어 자기 나라를 지키는 월남군보다도 낮았다. 1967년 합동연감에 따르면 이병 수당을 보면 미군은 235달러, 월남군 55달러였지만 한국군은 51달러였다. 장교들 수당도 낮은 수준이었다. 미군은 569달러, 필리핀 475달러, 태국 406달러였지만 한국군은 190달러였다. 미군과 동일한 수준으로 대우하겠다던 미국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미국이 베트남전에 쓴 돈이 총 1조110억 달러인데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한국이 받아온 총액은 10억3600만달러였다. 군 병력 10%를 채워주고 미국 전비의 0.1%를 얻어온 것이다. 그런데도 JP는 베트남전 파병에 대해 “한국으로선 군이 살아있는 전투경험을 쌓고, 경제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고 추켜세웠다.
피로 얻어낸 빵은 어디로 갔나?
사망자와 부상자에 대한 보상도 충분하지 않았다. 1966년 기준으로 하사 이하 사병들의 경우 전사 및 장애 1급인 경우 34만원(1320달러)이 지급됐는데 당시 직장인 1년 치 월급을 조금 웃도는 액수였다. 베트남전쟁 특수가 있었던 건 사실이며 ‘한강의 기적’의 원동력임은 사실이지만 돈을 번 과정이 정당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박태균, ‘베트남 전쟁’ 참고)
군인뿐 아니라 기업 소속 기술자·근로자로 간 사람들도 대가를 제대로 못 받긴 마찬가지였다. 급기야 1971년 2월에는 ‘한진 파월기술자 미지불임금 청산 투쟁위원회’가 결성됐다. 이들은 몽둥이를 들고 서울 남대문로 대한항공 빌딩에 몰려가 매표실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농성자 13명에겐 징역 1~5년이 선고됐지만 한진이 어떤 제재를 받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윤충로, ‘베트남 전쟁시기 월남 재벌의 형성과 파월 기술자의 저항’ 참고)
전쟁으로 번 돈은 노동자들에게 가지 않고 어디로 흘러갔을까? 한진그룹 창업주 조중훈과 박정희 정권의 밀월관계를 살펴보자. 백악관 출입기자 출신 문명자의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에 따르면 김대중 납치사건을 해결한 사람은 조중훈이었다. 그는 박정희 비자금의 운반책이었다. 박정희가 ‘김대중 납치사건’ 무마를 위해 일본 총리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栄)를 정치자금 3억~4억엔으로 매수하는데 조중훈이 핵심 역할을 했다.
1973년 11월에는 JP가 박정희 친서를 갖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총리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사죄했다. 당시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한일관계가 악화돼 있었다. 문명자에 따르면 오사노가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반(半)국영기업인 대한항공 주식을 10%나 가지고 있었고, 72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조중훈씨가 오사노를 통해 다나카 수상에게 1억엔을 헌금했다.
김대중 납치사건 1주일 후인 1973년 8월15일 청와대로 불려간 조중훈은 박정희로부터 김대중 사건 해결을 위해 다나카를 매수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문명자에 따르면 조중훈은 다음 날 도쿄로 가서 오사노를 통해 이 뜻을 전하고 일본 돈 1억 엔을 건넸고, 그리고 8월18일 귀국하자마자 바로 청와대로 가 이 사실을 박정희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9월21일 드디어 하코네에서 다나카를 만나 외환은행에서 인출해 상자에 넣은 김대중 사건 정치적 해결 사례금 2억 엔을 다나카에게 건넸다.
이후 한진은 박정희 정권의 비호 아래 성장했다. 조중훈의 자서전에 따르면 한진은 790만 달러 규모의 군수물품 수송 계약을 주베트남 미군사령부와 체결하는 등 베트남 전쟁 특수를 누렸다. 한진은 66년부터 71년까지 1억5000만 달러를 베트남에서 벌어들였다.
그렇게 얻은 빵은 떳떳한가?
JP는 증언록에서 “무엇보다 5000년 한민족사에서 우리 군사력의 해외 진주는 전례 없는, 역사의 드문 경험”이라며 “맨날 침략만 받던 나라가 대의를 위해 파병한 경험은 민족의 진취적 기상으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국 방어조차 힘들었던 한국의 베트남전쟁 참전은 과연 자랑스러웠던 일일까.
당시 박정희 정부는 ‘타도하자 베트콩’ 등의 구호를 내걸며 월남 참전군을 ‘평화의 십자군’으로 포장했다. 전시 인권유린의 위험성은 지워졌다.
▲ 베트남파병 당시 포스터. 박정희 정부는 '타도하자 베트콩', '평화의 십자군' 등의 포스터를 통해 베트남전 참전을 독려했다. |
베트남 평화활동가 구수정 박사에 따르면 베트남전쟁 기간 중 한국군이 80여건에 걸쳐 약 9000명의 민간인들을 집단학살했다. 베트남엔 3기의 한국군 증오비와 50여기의 위령탑이 서있다.
최용호 전쟁평화연구소장의 ‘통계로 본 베트남전쟁과 한국군’에 따르면 한국군 재판기록에 65년~72년까지 총 1384건의 범죄행위가 발생했는데 이중 살인 35건, 강간 21건, 과실치상 523건 등이 있다. 대부분 민간인 학살과 관련돼 있다. 당시 베트남에선 한국군에 대해 ‘잘 싸우지만 잔인하다’고 평가했다.
박태균 교수의 저서 ‘베트남 전쟁’은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JP 말대로 “역사의 드문 경험”이었던 베트남 전쟁에 대해 한국 사회는 한국군이 저질렀던 학살의 기억은 잊은 채, 오로지 전쟁으로 얻은 경제적 이익만 기억하고 있다. 베트남전 전사자는 총 110만명이고, 민간인 사망자는 이보다 많은 150만명이다. 군인보다 민간인이 더 많이 희생당한 전쟁이었다.
▲ 비호 6호 작전은 1966년 1월 19일부터 1월 10일까지 고보이 평야지대에서 1연대의 2개 대대 병력이 투입된 최초의 연대급 작전이다. 이 작전중 병사를 공중투입시켜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 작전 결과 적 사살 196명, 포로 49명, 용의자 773명, 소화기 58정, 공용화기 2정 등의 전과를 올렸다. 사진은 비호 6호 작전 수행중 숨어있던 베트콩을 생포하고 있는 모습이다. |
민주주의는 빵을 먹고 자랐나?
한국이 미국과 함께 남베트남을 지원했다면 북한도 북베트남을 지원했을까? 당시 한국군이 참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주한미군이 있어서다. 베트남 파병은 60년대 미국에서 제기됐던 주한미군 감축 정책을 지연하는 역할을 했다. 북한은 전투 병력을 지원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반도의 긴장을 높여 한국의 추가 파병을 막는 형식으로 북베트남을 지원한 것으로 평가된다.
1967년 11월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북한의 대남 도발건수는 67년에 급증했다. 비무장지대 주요 사건이 65년 42건, 66년 37건이었지만 67년 423건으로 약 10배가 늘었다. 1968년은 안보위기의 해로 불린다. 1월21일 김신조 등 북한 무장부대는 청와대를 습격하려했고, 1월23일에는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납치됐다. 같은 해 11월에는 120명의 북한 무장공비가 울진·삼척에 침투했다.
한국 내에서 베트남 전쟁의 명분은 ‘자유와 안보를 지키자’는 것이었는데 오히려 불안감이 커졌다. 북한의 전략은 유효했다. 실제로 1968년 여름에 예정됐던 5차 파병은 1968년 안보위기로 무산됐다.
같은 시기 국내 독재체제는 공고해졌다. 박정희는 대통령을 3연임할 수 있는 개헌을 69년에 통과시켰고, 72년에는 유신체제를 만들었다. 징병제가 강화됐고, 주민등록제 제도화도 이 시기에 완료됐다. 적어도 베트남전쟁에 참여하는 동안 민주주의는 급속도로 후퇴했다.
베트남 전쟁이 남긴 것, 생명보다 돈
베트남전 파병을 결정했던 64년으로 돌아가 보자. JP는 ‘굴욕’적인 한일협정 반대투쟁을 피해 2차 외유(6월18일~12월31일)를 떠난 상황이었다. ‘4·19혁명 계승·민족주의’를 집권이념 중 하나로 제시했던 군사정부는 65년 한일협정으로 정권의 실체적 성격을 드러낸 상태였다. JP가 “2차 외유 중 파병을 계획”한 이유는 악화된 여론을 돌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파병을 계기로 1965년 5월 박정희가 미국을 방문하자 박정희 정부에 대한 비판여론은 잦아들었다. 박정희 정부는 베트남전 특수로 경제성장의 원동력을 얻었고, 이를 이용해 장기집권을 이어갔다. 박정희 정권의 권력은 공고해졌지만 그들이 내건 베트남전의 애초 목표는 얼마나 달성됐을까?
베트남 파병을 통해 공산화와 중국 영향력 확대를 막자는 목표는 1975년 월남이 패망하면서 실패했다. 1968년 안보위기와 1971년 주한미군 1개 사단감축을 보면 한미동맹이 굳건해지고 주한미군의 감축을 막자는 목표 역시 실패했다.
베트남전 이후 해외파병을 판단하는 잣대는 경제적 득실로 굳어졌다. 지난 2003년 이라크 파병을 결정하는 과정에서도 경제적 이득만이 강조됐다. 이제 한국에서는 전쟁은 ‘누군가의 고통’이라는 이미지보다 ‘돈 벌러 가는 곳’이란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게 됐다. 이 역시 베트남전의 후유증이다.
명분 없는 전쟁으로 인한 국가 이미지 실추, 수십만 명이 국가 폭력에 쉽게 동원되는 현상, 지금은 조용하지만 언젠간 제기될 베트남 민간인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잊혔다. JP는 이에 대해 해명하고 사과해야 할 사람이다. JP에게 듣는 베트남전은 반쪽의 기억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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