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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December 13, 2015

붕괴하는 시장과 국가라는 질서, 그것으로부터의 해방 ②

붕괴하는 시장과 국가라는 질서, 그것으로부터의 해방 - 새로운 가치, 새로운 삶을 추구하며 -

기존의 이론이나 사고의 틀로 해석되지 않는 일들이 만연하고 있다. 공권력의 폭력으로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농민’에게 공권력은 사과를 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를 ‘폭도’로 매도하기에 여념이 없다. 누구를 위한 공권력인가.

비슷한 현상을 사회 도처에서 목격할 수 있다. ‘집회와 결사의 자유’가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데, 누군가를 체포하겠다고 ‘조계사’ 주변은 공권력이 바다를 이루고 있다. 시간이 1980년대로 돌아간 듯하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실현한 사회에 나타난 이 어처구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글은 왜 이런 역사의 퇴행이 일어나고, 그 퇴행에 동참하는 세력에 대한,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이 전환의 시대에 제대로 된 좌표를 설정하고 실천하지 못했을 때, 역사에서 경험했듯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파시즘’이라고, 말이다. 프랑스 지방 선거에서 극우 정당이 최다 득표 정당이 되듯이 말이다. 이 번역글은 분량이 길어 3편에 나누어 게재합니다 - 역자 주
우치야마 다카시山內節
1950년생. 철학자. NPO법인·숲을 만드는 포럼 대표이사 등을 지냈다. 『노동 과정론 노트』『자연과 인간의 철학』『생명의 장소』『반半시장 경제』『산골 마을의 낚시』 등의 저서가 있다.

카오스 속에 방치된 정치와 경제

지금까지의 질서가 유효성을 상실해 가는 시대에는, 다양한 혼돈도 또한 나타난다. 예를 들면, 코미디 독설 탤런트 같은 대통령 후보가 미국에서 인기를 누린다거나 하는 일도 그런 현상이지만, 그것도 또한 전후적戰後的 질서 속에서 미국의 쇠퇴가 시작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렇든 저렇든 미국의 기반이 흔들리기 때문에, 이러한 현실도 생겨나는 것이다.

정책보다도 강한 대통령이나 수상, 정치가를 연기함으로써, 대중을 사로잡으려고 하는 수법도 세계에 만연해 있다. 일본에서도 고이즈미小泉 정권이 이 방법으로 성공한 이래,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듯이 연기하는 수상이나 정치가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외국 여러 나라를 보아도, 세계적인 비판에도 꿈적하지 않는 강한 러시아 대통령, 이제는 EU를 움직이게 된 강한 독일 수상, 대국의 지도자에 어울리는 중국의 강한 국가 주석, 그런 사람들이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지도자의 강함을 연기하는 시대란, 역사가 방향성을 상실한 혼돈의 시대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20세기 전반 파시즘의 대두기에도 볼 수 있던 현상이었다. 

제국주의 시대에 만들어진 질서를 바꾼다고 하는, 그것 자체만 보면 정당한 목표를 내건 운동이, IS(이슬람 국)를 만들어내 버린 현실에도, 또한 아랍의 봄이 내전의 시대로 가 버린 모양새에도, 카오스의 시대가 반영되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전후 세계 질서에 대한 도전을, 구태의연한 대국 건설만으로 생각하여 그 구상에 몰두하는 중국적 아나크로니즘(시대착오)마저 발생하면, 지금부터는 아무도 통치할 수 없는 국가마저 태어날 것이다. 카오스 시대란 그런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지금까지의 질서가 기능하는 것처럼 논의하더라도 풀리지 않는다. 그것은 오늘날의 일본 정치 상황에 대하여도 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안보법제와 관련하여, 여론조사에서도 이 법안을 조기에 채택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국회 밖에서의 반대 운동도 날이 갈수록 고조되어 갔다. 그러나 이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정치, 사회 개혁으로 유도해 갈 수 있는 정당은 존재하지 않았고, 예전의 60년대 안보 투쟁 때처럼, 기시岸정권에서 이케다池田 정권으로 전환함으로써 국민을 회유해 간 보수의 역동성도 존재하지 않았다. 여기에도 또 하나의 카오스가 발생하고 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오늘의 카오스적 상황을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는 있다. 예를 들면, 전후적戰後的 세계 질서를 떠받치고 있었던 커다란 요소는, 선진국과 개발도상국과의 압도적인 경제적 격차였다. 따라서 선진국은 세계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할 수가 있었고, 세계는 결코 평등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구조하에서는, 개발도상국의 대부분이 독재 국가이기도 했다. 민주주의는 강한 경제적 기반을 지닌 나라만이 성립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근대적인 정치 원리로서 제시되고 있었던 민주주의는, 세계를 가지고 보면, 일부 나라의 원리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 구조 위에, 마치 민주주의가 공통의 원리인 것처럼 세계 질서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여기에 있던 것은, 독재 국가가 존재함으로써 세계 질서가 만들어지고, 그 세계 질서 안에서 민주주의가 이야기된다는 기만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기만을 무너뜨리려고 했던 것이, 아랍의 봄으로 상징되는 민주화의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많은 나라에서 혼란과 내전을 초래하고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라는 이념을 축에 놓고 수용해 온 세계 구조라는 기만의 표면화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찬가지 일을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 민주주의는 불완전한 형태로 성립할 수밖에 없었다. 항상 다수파의 폭주를 낳고, 소수 의견은 무시된다. 선거는, 어떤 수단을 사용하더라도 유권자의 지지를 얻는다면 이긴다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완전한 민주주의 따위는 어디에도 성립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사회는 민주주의를 가진 선진국이라는 공통 의식을 정착시킴으로써, 국민 통합의 원리로서 사용되어 왔다는 측면도 민주주의에는 있었다.

그러니까 이 불완전한 제도에 대해서는, 그것이 완벽한 제도가 될 수 있을까와 같은 비판을 계속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상理想에 입각하여 비판하고 행동함으로써만, 이 제도는 가일층 퇴폐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안보법제를 둘러싼 국회의 동향에서 알 수 있었던 것은, 민주주의가 갖는 불완전함이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고정화되어 있는 현실이었다. 민주주의 속에 내재화되어 있던 기만이 전면적으로 되어 버렸다.

오늘날의 경제에도 비슷한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다. 현재는 일하는 사람들의 40% 가까이가 비정규직이라는 현실, 거기에서 생겨난 양극화 사회. 그것은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해도 상관없지만, 전후적戰後的 질서하에서는 이 자본주의가 갖는 성격도, 주로 두 개의 요인에 의해 은폐되고 있었다. 달리 말해 고도 성장기의 노동력 부족이 많은 사람들에게 경제적 풍요를 가져다주었다고 함으로써, 게다가 소비에트 연방에 대항하기 위해 국내의 불만이 높아지는 것을 저지해야 함으로써, 국가는 통제된 자본주의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해 버리자, 나타난 것은 고삐가 풀린 자본주의였으며, 그 결과는 불완전 고용과 양극화 사회의 확대였다. 그렇다고 하면 이 문제도 또한 전후적戰後的 경제 질서 속에 숨겨진 형태로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 겉으로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기만에 찬 질서를 타파하는 젊은이들

이렇게 생각해 가노라면, 현재의 혼돈 상황은, 지금까지의 질서 속에 내재하고 있었던 것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지금까지의 질서에 근거한 사고로는, 오늘의 현실을 타파할 수 없게 되어 있다. 하지만 그 사실에 비관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런 시대 상황하에서는, 지금까지의 질서로는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과, 이 질서에 기만을 느끼고 있던 사람들의 손으로, 새로운 발상이나 행동을 넓혀 가고, 그런 동향도 반드시 일어나기 때문이다.

실제로 반反안보법제의 움직임 속에서는, 젊은이들의 움직임이 두드러졌다. 이 젊은이들은 고도성장의 분위기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이며, 그 대부분이 지금까지의 질서에 의해 보호받지도 못한 사람들이다. 오늘날은 대학 신규 졸업자의 4분의 1이 비정규직이 되는 시대이며, 취업자의 약 40%가 비정규직이 되고 있다. 비정규직의 평균 연봉은 2백만 엔을 밑돌고 있으며, 게다가 비정규직에서 탈출의 길이 폐쇄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더 문제는, 정규직 안에 질 나쁜 정규직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 점이다. 비정규직 수준의 임금으로 서비스 잔업을 시키기 위해 정규직으로 전환하거나, 대우는 개선하지 않지만 이직자는 줄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모양만 정규직으로 하는 듯한 경우를 우리는 목격하게 된다. 또한 정규직에서도, 사실상의 퇴직 강요나 노동 강화 등이 도처에서 발생되고 있다. 정규직 취업이 곧 안전한 취직이라고는 할 수 없는 현상이 만연하고 있다.

게다가 파탄에 다가가고 있는 국가 재정을 고려하면, 이제부터라도 증세와 사회 보장 수준의 삭감이 실행되리라는 점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징병제’ 문제도, 젊은이들에게는 현실감 있는 문제인 것이다. 전전戰前처럼 국민 모두가 병역 의무를 가지는 징병제는, 앞으로도 거의 실시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 징병제’는 현실적인 문제이다. 비정규직 수입으로 자식을 대학에 보낸다는 게 되면, 자위대에 입대하는 것과 연동되어 특별 장학금을 받는다는 것이, 필요하게 되는 경우가 앞으로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질서로는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상황이 그러한 이상, 현재의 동향은 반反안보법제만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경제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 앞으로 사회 자체의 존재 양태를 어떻게 바꾸어 갈 것인가, 어떠한 생활 방식이 자신들에게 행복감을 줄 것인가라는 점과 그것은 일체적으로 생각해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과제가 되고 있다.

비슷한 과제가, 다른 영역에서도 발생하고 있다. 농촌, 산촌, 어촌이나 지방 도시 등에서도, 지금까지의 질서에 의존만 해서는 쇠퇴할 뿐이었다. TPP에 의해서, 농업, 농촌은 더욱 위기가 깊어지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도 새로운 사회 디자인과 경제 디자인을 결합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실제로, 이러한 영역에서는 새로운 시도가 생겨나기 시작하고 있다.  지속 가능한 지역을 만들기 위한 시도도 다양한 형태로 시작되고 있다. 

젊은이들은 협동 그러니까 공동체 만들기를 진행하고 있다. 공유 셰어 하우스share house도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하나의 생활 스타일로서 정착해 왔다. 농촌, 산촌, 어촌이나 지방 도시로 이주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고, 농촌적 기반과 연계를 가지면서, 도시에서 사는 생활스타일도 확산을 나타내고 있다.<계속>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1001&table=ji_kim&uid=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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