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독자 여러분 그리고 10만인클럽 회원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지난 6월 14일부터 23일까지 일본 순회강연을 마치고 6월 24일부터 7월 9일까지 북녘의 수양딸을 찾아 북한을 여행했습니다. 또 지난 10월 초에도 북한을 한 번 더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새 연재 '수양딸 찾아 북한으로'를 통해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을 전하려 합니다. - 기자 말
치유되지 않는 상처
우리 일행은 서점을 찾아 평양 시내를 한참 동안 헤맸다. 안내원 김혜영 선생도 처음 찾아가 본다는데, 대체 간판이 없으니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다. 김혜영 선생은 연신 "분명 여기 어디라고 그랬는데…"라면서 건물이란 건물은 다 들어가 본다. 나는 서점보다 길거리를 구경하며 사진 찍는 데 더 관심이 있으니 차라리 잘된 일이다.
길거리에 학생들이 줄지어 걸어간다. 일부는 '미제와 결판을 내자' '미제야 함부로 날뛰지 말라'라는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간다. 오늘이 무슨 날이냐고 김혜영 선생에게 묻자 "오늘은 미국놈들이 전쟁을 일으킨 날"이라고 답한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6월 25일이다. 남이나 북이나 아직도 이날을 이런 식으로 기념한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북한은 '미제'에 대한 적개심을, 남한은 '북괴'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한다는 것이다.
남한에 의한 통일에 결정적 장애 역할을 한 것이 중국인데, 남한에서 '중공 오랑캐'에 대한 성토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남한의 대통령은 '중공 오랑캐' 군대의 열병식에 참석해 축하마저 한다. 이렇듯 세상은 변하고 있다. 이제는 이날을 한국전쟁 때 희생된 모든 분들을 위해 묵념하며 애도하는 날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북한 아파트값이 얼마인가요?"
서점을 찾아 헤매다 보니 주민들이 사는 아파트 동네에 이르렀다. 덕분에 구석구석 구경할 수 있었다. 아파트는 우리 수양딸들이 사는 아파트보다 훨씬 깨끗하고 좋다. 휴식하는 공간(휴식터)도 크고, 각 가정에서 비둘기를 키우는지 공동 비둘기장도 있다. 또 여기저기 상점들도 있고, 채소나 과일·음료수 등을 파는 가판대도 있다.
우리 수양딸들도 이런 아파트로 옮겨주고 싶어 값이 얼마나 되는지 물었다가 망신만 당했다. 김혜영 선생으로부터 "그동안 북을 그렇게 많이 왔으면서도 아직도 아파트값을 묻느냐"라는 핀잔을 들었다. 이곳에서는 부동산을 사고팔지 않는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했다.
한편, 남쪽에서 들려오는 언론 보도에 의하면 북한에서도 아파트 거래를 한다고 하는데, 뭐가 진실인지 알 수 없다. 우리 딸들이 사는 아파트를 재건축하면 현재 입주자들에게 우선권을 준다고 하니 그냥 그때까지 기다려 보는 수밖에.
북한 여행 '서당개 3년'
겨우 서점을 찾았다. 들어가 보니 창문 한구석에 작은 글씨로 '서점'이라고 적혀 있다. 밖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다. 박 교수가 찾는 영화DVD나 음악CD 등이 얼마 없어 우리는 또 다른 서점이나 상점을 찾아 나섰다.
오늘은 온종일 쇼핑으로 시간을 보냈다. 남편은 그저 북한의 술과 담배에만 관심이 있다. 온갖 종류의 북한 담배를 마구 사들인다. 이곳에서 '구럭지'라고 부르는 비닐 쇼핑백에 담배만 한가득이다.
나는 '봄향기'라는 상표의 화장품과 샴푸와 린스, 인삼 제품, 꿩털로 만든 부채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 줄 과자 등을 샀다. 상점에서 나오면서 과자를 하나 먹어보니 우유나 버터가 거의 들어가 있지 않아 맛이 아주 담백하다. 그러나 우유와 버터맛에 길들여진 우리 아이들은 별로 좋아할 것 같지 않다.
그런데 박 교수가 산 해바라기씨로 만든 과자는 정말 고소하고 첨가물도 거의 없어 건강에도 좋을 것 같다. 맛도 꽤 좋다. 어른, 아이 누구나 다 좋아할 것 같은 맛이다. 이 정도라면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함께 동행한 박 교수는 해바라기씨 과자를 북한 여행하는 내내 가방 속에 넣고 다닐 정도로 그 맛에 푹 빠졌다.
우리는 차를 호텔로 돌려보내고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지하철에서 전철을 기다리는 동안 신문 게시대로 가니 <로동신문>이 걸려 있다. 사람들이 게시대를 빙 둘러싸고 심각한 표정으로 집중하면서 신문을 읽는다. 파고 들어갈 틈이 없어 고개를 내밀어 굵직한 활자만 읽어본다.
톱 기사의 제목은 '경애하는 김정은 동지께서 완공된 평양국제비행장 항공역사를 현지지도하시였다'. 내 짐작이 맞았다. 평양에 도착하던 날, 심양에서 비행기가 연착한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북한 여행에 관록이 붙으니 이제는 별 짐작이 다 맞아떨어진다. 이제는 '척 하면 삼천리'다.
'변화'는 여성들로부터
지하철역을 나서자 브라스밴드 연주가 쾅쾅 거리를 울린다. 출퇴근 시간에 평양 거리에서 자주 목격하는 장면이다. 나는 연주보다 여학생들의 신발에 시선이 갔다. 남학생들의 신발은 모두 같은데 여학생들의 신발은 각양각색이다. 게다가 여학생들의 교복 웃옷도 조금씩 모양이 다르다. 짧은 소매, 긴 소매, 흰색, 하늘색…. 학교에서 정해준 디자인인 검정 구두에 동일한 교복을 입어야 했던 내 중고등학교 시절보다 비교적 자율성이 있어 보인다.
변화는 북한 주민들의 복장에서도 드러난다. 학생들은 나름 멋을 부리고 성인 또한 그들만의 패션으로 치장한다. 심지어 '폴로' 상표가 달린 셔츠를 입고 다니는 어린이들도 있다. 어른들의 옷 색상도 더 밝아지고 디자인도 화려해진다. 여성들의 치마는 짧아지고 구두 굽은 높아졌다. '멋쟁이' 북한 여성들에게 귀걸이·팔찌 그리고 스마트폰은 기본이고 화려한 양산은 필수 아이템이다. 여성들이 외모를 가꾸고 치장을 하려는 건 어딜 가나 같다. 북한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게다가 정부의 외국어 강화 정책에 따라 학생들을 비롯해 주민들 사이에는 외국어 학습 열풍도 대단하다. 비록 외부와는 아직 연결이 안 되지만 국내에서 사용하는 인트라넷이 있다. 북한의 IT산업 역시 발전하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 10년, 아니 5년 정도만 지나도 북한은 지금과는 또 다른 모습일 것이라 예상해본다. 내가 북한을 처음 방문했던 2011년과 지금 2015년 사이에도 눈에 띄게 큰 변화가 있었으니 말이다.
북한에서 먹은 뉴질랜드산 소고기
평양 시내 여기저기를 걷다 보니 어느덧 호텔이 있는 평양역에 도착했다.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프다. 남편도 박 교수도 옆에서 배고프다며 저녁 먹으러 가자고 아우성이다. 마침 역 앞에 있는 한 식당에서 숯불구이 냄새가 우리 일행을 유혹한다. 우리는 서로 눈을 몇 번 마주치고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그 식당으로 향한다. '은하수 음식점'이라는 간판이 달려 있다.
박 교수는 저녁 일정을 위해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을 그녀의 안내원 송영혜씨에게 역 앞 '은하수 음식점'으로 빨리 오라고 연락을 넣었다.
북한의 음식점은 남한과 달리 반찬을 하나하나 따로 주문해야 한다. 우리는 전식으로 떡볶이, 해삼냉채, 양배추 보쌈김치, 미역무침, 소불고기, 소갈비, 모듬야채를 주문했다. 그리고 주식으로는 냉면과 쟁반국수를 주문했다.
소고기를 보니 첫 북한 여행이 생각났다. 2011년 10월 북한을 처음 여행했을 때 북한에서의 첫 식사 메뉴가 불고기였다. 소고기가 어찌나 질긴지 도저히 씹어지지 않았다. 보다 못한 안내원(지금은 내 수양딸이 된 김설경)이 눈치를 채고 "뱉으십시요"라고 했을 정도였으니까. 나중에 들은 것이지만, 북한에서 국가가 소를 관리하며 식용으로 소를 도축하는 건 불법이란다. 그렇다면 아마도 당시 내가 먹은 소불고기는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늙은 소를 도축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그 후 여러 번의 북한 여행을 하면서 육회와 소적쇠구이를 맛있게 먹었다. 고기가 상당히 부드러워서 그 사이 법이 바뀌었는지 의아했는데 이번에 그 의문이 풀렸다. 종업원에게 "이 소고기는 국내산이에요?"라고 묻자 "뉴질란드 수입 소고기입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갈비는 미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위 'LA갈비'가 틀림없어 보였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북한과 미국 사이에 교역이 없으니 아마 제3국을 통해 들어왔으리라 짐작된다.
나는 북한이 외국으로부터 소고기를 수입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아마 국가가 수입하는 게 아니라 독립채산제로 운영되는 식당들이 무역업자를 통해 구입하는 것이라고 추측한다. 국가기관에 소속돼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사기업으로 운영되는 이런 비즈니스들이 전국에 퍼져있는 장마당과 함께 지금 북한의 민간경제를 주도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조국에 사랑의 묘약을
식당 밖 먹자골목은 사람들로 붐빈다. 예전에 봤던 체육복권 판매대도 그대로다. 역 앞에는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 차있다. 2012년 5월 이곳에서, 신병훈련을 막 마친 병사들이 더플백(duffle bag)을 깔고 앉아 임지로 가는 열차를 기다리던 모습이 떠오른다. 키가 아주 작고 나이도 어려 보이는 병사들을 보고 얼마나 가슴이 아렸는지….
당시 나는 그 어린 병사들과 일부러 눈을 마주쳐 눈인사를 해주곤 했다. 어린 아들을 군대에 보내놓고 그 어머니는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눈시울을 적셨을까. 똑같은 심정으로 눈시울 적실 남녘의 어머니들을 생각하며 민족의 화합과 조국의 평화 통일 염원을 가슴에 새기는 순간이기도 했다. 즐거웠던 하루가 갑자기 우울해진다. 무기력한 발걸음에 허공을 바라보며 토하듯 기도한다.
"주여, 70년 분단의 상처로 피멍울진 우리 민족! 형제의 심장에 총을 겨눠야 하는 자식을 철책선으로 보내놓은 우리의 어머니들은 오늘도 먼 하늘 바라보며 앞치마 움켜쥐고 눈물을 흘립니다. 주여, 제발 자비를 베푸소서!"
▲ 서점을 찾아 평양 시내를 헤매면서. | |
ⓒ 신은미 |
▲ 한 학생이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평양 시내를 활보하고 있다. | |
ⓒ 신은미 |
치유되지 않는 상처
우리 일행은 서점을 찾아 평양 시내를 한참 동안 헤맸다. 안내원 김혜영 선생도 처음 찾아가 본다는데, 대체 간판이 없으니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다. 김혜영 선생은 연신 "분명 여기 어디라고 그랬는데…"라면서 건물이란 건물은 다 들어가 본다. 나는 서점보다 길거리를 구경하며 사진 찍는 데 더 관심이 있으니 차라리 잘된 일이다.
길거리에 학생들이 줄지어 걸어간다. 일부는 '미제와 결판을 내자' '미제야 함부로 날뛰지 말라'라는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간다. 오늘이 무슨 날이냐고 김혜영 선생에게 묻자 "오늘은 미국놈들이 전쟁을 일으킨 날"이라고 답한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6월 25일이다. 남이나 북이나 아직도 이날을 이런 식으로 기념한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북한은 '미제'에 대한 적개심을, 남한은 '북괴'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한다는 것이다.
남한에 의한 통일에 결정적 장애 역할을 한 것이 중국인데, 남한에서 '중공 오랑캐'에 대한 성토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남한의 대통령은 '중공 오랑캐' 군대의 열병식에 참석해 축하마저 한다. 이렇듯 세상은 변하고 있다. 이제는 이날을 한국전쟁 때 희생된 모든 분들을 위해 묵념하며 애도하는 날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북한 아파트값이 얼마인가요?"
▲ 평양 시내의 한 아파트에 있는 가판대. | |
ⓒ 신은미 |
서점을 찾아 헤매다 보니 주민들이 사는 아파트 동네에 이르렀다. 덕분에 구석구석 구경할 수 있었다. 아파트는 우리 수양딸들이 사는 아파트보다 훨씬 깨끗하고 좋다. 휴식하는 공간(휴식터)도 크고, 각 가정에서 비둘기를 키우는지 공동 비둘기장도 있다. 또 여기저기 상점들도 있고, 채소나 과일·음료수 등을 파는 가판대도 있다.
우리 수양딸들도 이런 아파트로 옮겨주고 싶어 값이 얼마나 되는지 물었다가 망신만 당했다. 김혜영 선생으로부터 "그동안 북을 그렇게 많이 왔으면서도 아직도 아파트값을 묻느냐"라는 핀잔을 들었다. 이곳에서는 부동산을 사고팔지 않는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했다.
한편, 남쪽에서 들려오는 언론 보도에 의하면 북한에서도 아파트 거래를 한다고 하는데, 뭐가 진실인지 알 수 없다. 우리 딸들이 사는 아파트를 재건축하면 현재 입주자들에게 우선권을 준다고 하니 그냥 그때까지 기다려 보는 수밖에.
북한 여행 '서당개 3년'
▲ 평양의 지하철 풍경. | |
ⓒ 신은미 |
겨우 서점을 찾았다. 들어가 보니 창문 한구석에 작은 글씨로 '서점'이라고 적혀 있다. 밖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다. 박 교수가 찾는 영화DVD나 음악CD 등이 얼마 없어 우리는 또 다른 서점이나 상점을 찾아 나섰다.
오늘은 온종일 쇼핑으로 시간을 보냈다. 남편은 그저 북한의 술과 담배에만 관심이 있다. 온갖 종류의 북한 담배를 마구 사들인다. 이곳에서 '구럭지'라고 부르는 비닐 쇼핑백에 담배만 한가득이다.
나는 '봄향기'라는 상표의 화장품과 샴푸와 린스, 인삼 제품, 꿩털로 만든 부채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 줄 과자 등을 샀다. 상점에서 나오면서 과자를 하나 먹어보니 우유나 버터가 거의 들어가 있지 않아 맛이 아주 담백하다. 그러나 우유와 버터맛에 길들여진 우리 아이들은 별로 좋아할 것 같지 않다.
▲ 평양의 기념품 판매점에서. | |
ⓒ 신은미 |
▲ 남편은 북한 담배를 사들이기에 바빴다. | |
ⓒ 신은미 |
그런데 박 교수가 산 해바라기씨로 만든 과자는 정말 고소하고 첨가물도 거의 없어 건강에도 좋을 것 같다. 맛도 꽤 좋다. 어른, 아이 누구나 다 좋아할 것 같은 맛이다. 이 정도라면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함께 동행한 박 교수는 해바라기씨 과자를 북한 여행하는 내내 가방 속에 넣고 다닐 정도로 그 맛에 푹 빠졌다.
우리는 차를 호텔로 돌려보내고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지하철에서 전철을 기다리는 동안 신문 게시대로 가니 <로동신문>이 걸려 있다. 사람들이 게시대를 빙 둘러싸고 심각한 표정으로 집중하면서 신문을 읽는다. 파고 들어갈 틈이 없어 고개를 내밀어 굵직한 활자만 읽어본다.
톱 기사의 제목은 '경애하는 김정은 동지께서 완공된 평양국제비행장 항공역사를 현지지도하시였다'. 내 짐작이 맞았다. 평양에 도착하던 날, 심양에서 비행기가 연착한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북한 여행에 관록이 붙으니 이제는 별 짐작이 다 맞아떨어진다. 이제는 '척 하면 삼천리'다.
▲ 퍙양 지하철의 신문 게시대. | |
ⓒ 신은미 |
'변화'는 여성들로부터
지하철역을 나서자 브라스밴드 연주가 쾅쾅 거리를 울린다. 출퇴근 시간에 평양 거리에서 자주 목격하는 장면이다. 나는 연주보다 여학생들의 신발에 시선이 갔다. 남학생들의 신발은 모두 같은데 여학생들의 신발은 각양각색이다. 게다가 여학생들의 교복 웃옷도 조금씩 모양이 다르다. 짧은 소매, 긴 소매, 흰색, 하늘색…. 학교에서 정해준 디자인인 검정 구두에 동일한 교복을 입어야 했던 내 중고등학교 시절보다 비교적 자율성이 있어 보인다.
▲ 길거리에서 연주하는 밴드부 학생들. | |
ⓒ 신은미 |
▲ '멋쟁이' 북한 여성.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다. | |
ⓒ 신은미 |
▲ 한 북한 여성이 굽이 매우 높은 신발을 신고 있다. | |
ⓒ 신은미 |
▲ 북한 여성들의 의상이 많이 밝아졌다. '평양 멋쟁이'에게 양산은 필수 아이템이다. | |
ⓒ 신은미 |
▲ '폴로' 상표가 새겨진 셔츠를 입은 북한 어린이(노란색). | |
ⓒ 신은미 |
변화는 북한 주민들의 복장에서도 드러난다. 학생들은 나름 멋을 부리고 성인 또한 그들만의 패션으로 치장한다. 심지어 '폴로' 상표가 달린 셔츠를 입고 다니는 어린이들도 있다. 어른들의 옷 색상도 더 밝아지고 디자인도 화려해진다. 여성들의 치마는 짧아지고 구두 굽은 높아졌다. '멋쟁이' 북한 여성들에게 귀걸이·팔찌 그리고 스마트폰은 기본이고 화려한 양산은 필수 아이템이다. 여성들이 외모를 가꾸고 치장을 하려는 건 어딜 가나 같다. 북한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게다가 정부의 외국어 강화 정책에 따라 학생들을 비롯해 주민들 사이에는 외국어 학습 열풍도 대단하다. 비록 외부와는 아직 연결이 안 되지만 국내에서 사용하는 인트라넷이 있다. 북한의 IT산업 역시 발전하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 10년, 아니 5년 정도만 지나도 북한은 지금과는 또 다른 모습일 것이라 예상해본다. 내가 북한을 처음 방문했던 2011년과 지금 2015년 사이에도 눈에 띄게 큰 변화가 있었으니 말이다.
북한에서 먹은 뉴질랜드산 소고기
평양 시내 여기저기를 걷다 보니 어느덧 호텔이 있는 평양역에 도착했다.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프다. 남편도 박 교수도 옆에서 배고프다며 저녁 먹으러 가자고 아우성이다. 마침 역 앞에 있는 한 식당에서 숯불구이 냄새가 우리 일행을 유혹한다. 우리는 서로 눈을 몇 번 마주치고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그 식당으로 향한다. '은하수 음식점'이라는 간판이 달려 있다.
박 교수는 저녁 일정을 위해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을 그녀의 안내원 송영혜씨에게 역 앞 '은하수 음식점'으로 빨리 오라고 연락을 넣었다.
북한의 음식점은 남한과 달리 반찬을 하나하나 따로 주문해야 한다. 우리는 전식으로 떡볶이, 해삼냉채, 양배추 보쌈김치, 미역무침, 소불고기, 소갈비, 모듬야채를 주문했다. 그리고 주식으로는 냉면과 쟁반국수를 주문했다.
소고기를 보니 첫 북한 여행이 생각났다. 2011년 10월 북한을 처음 여행했을 때 북한에서의 첫 식사 메뉴가 불고기였다. 소고기가 어찌나 질긴지 도저히 씹어지지 않았다. 보다 못한 안내원(지금은 내 수양딸이 된 김설경)이 눈치를 채고 "뱉으십시요"라고 했을 정도였으니까. 나중에 들은 것이지만, 북한에서 국가가 소를 관리하며 식용으로 소를 도축하는 건 불법이란다. 그렇다면 아마도 당시 내가 먹은 소불고기는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늙은 소를 도축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그 후 여러 번의 북한 여행을 하면서 육회와 소적쇠구이를 맛있게 먹었다. 고기가 상당히 부드러워서 그 사이 법이 바뀌었는지 의아했는데 이번에 그 의문이 풀렸다. 종업원에게 "이 소고기는 국내산이에요?"라고 묻자 "뉴질란드 수입 소고기입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갈비는 미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위 'LA갈비'가 틀림없어 보였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북한과 미국 사이에 교역이 없으니 아마 제3국을 통해 들어왔으리라 짐작된다.
나는 북한이 외국으로부터 소고기를 수입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아마 국가가 수입하는 게 아니라 독립채산제로 운영되는 식당들이 무역업자를 통해 구입하는 것이라고 추측한다. 국가기관에 소속돼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사기업으로 운영되는 이런 비즈니스들이 전국에 퍼져있는 장마당과 함께 지금 북한의 민간경제를 주도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조국에 사랑의 묘약을
▲ 평양역 앞 스낵코너 풍경. | |
ⓒ 신은미 |
식당 밖 먹자골목은 사람들로 붐빈다. 예전에 봤던 체육복권 판매대도 그대로다. 역 앞에는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 차있다. 2012년 5월 이곳에서, 신병훈련을 막 마친 병사들이 더플백(duffle bag)을 깔고 앉아 임지로 가는 열차를 기다리던 모습이 떠오른다. 키가 아주 작고 나이도 어려 보이는 병사들을 보고 얼마나 가슴이 아렸는지….
당시 나는 그 어린 병사들과 일부러 눈을 마주쳐 눈인사를 해주곤 했다. 어린 아들을 군대에 보내놓고 그 어머니는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눈시울을 적셨을까. 똑같은 심정으로 눈시울 적실 남녘의 어머니들을 생각하며 민족의 화합과 조국의 평화 통일 염원을 가슴에 새기는 순간이기도 했다. 즐거웠던 하루가 갑자기 우울해진다. 무기력한 발걸음에 허공을 바라보며 토하듯 기도한다.
"주여, 70년 분단의 상처로 피멍울진 우리 민족! 형제의 심장에 총을 겨눠야 하는 자식을 철책선으로 보내놓은 우리의 어머니들은 오늘도 먼 하늘 바라보며 앞치마 움켜쥐고 눈물을 흘립니다. 주여, 제발 자비를 베푸소서!"
▲ 평양역 앞의 모습. | |
ⓒ 신은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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