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에도 청년은 '시잌'했다
사회 혼란·격변기에 조어 봇물
외환위기 이후 경제관련 늘어
외래어 차용 가파른 증가세
"혼란·반감" "적응 필요" 양론
“외래어를 풍부하게 받아들임은 우리말의 주검을 의미하는 게 아니고 도리어 생장하는 것이다.”(국어학자 김태종)
“고도의 문화를 담은 말은 보다 저급문화를 가진 사회로 부단히 침입한다. 이것은 마치 높은 곳에 있는 물이 낮은 데로 흐름과 같아서 그 추세는 막을 수 없는 강대한 힘을 가졌다.”(국어학자 이희승)
언어 사용의 변화는 시대를 막론하고 사회적으로 예민한 문제다. 문화 생산자와 소비자의 경계가 무너진 요즘 줄임말 형식의 신조어 급증이 세대간 단절 우려를 높이고 있지만 멀리는 청나라 잡문에 대한 반발로 정조의 문체반정이 있었고, 1930년대는 외래어 홍수를 놓고 시끄러웠다.
▦언어 변동은 시대를 막론한 논란거리
당시 신문이나 문인 등이 외국어를 다투어 이식하고 나열하는 세태에 대해 ‘외국어 틈입(闖入ㆍ함부로 들어감)시대’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문화제국주의에 대한 경계와 비판의 소리가 컸지만 문화 접변 과정에 외래어 유입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입장도 적지 않았다. 1937년 국어학자 이종극은 “외래어의 조선말화(Koreanization)를 통해 외래어가 조선어 어휘 집합 내에 정착할 가능성이 있다”며 신문, 잡지, 문학작품 등 당대 여러 문헌에 실린 외래어를 1만 4,000여 표제어로 정리한 ‘모던조선외래어사전’을 펴내기도 했다. 최초의 종합 외래어사전이다. 근대 조선의 사회 문화를 반영하는 콘텐츠로서 당시 통영되던 외래어 새 낱말이 대거 포함됐다. 세련되고 멋지다는 의미로 요즘 많이 쓰이는 ‘시크(chic)하다’도 이 사전에 실렸다. 그 용례로 이광수의 ‘흙’(1932)에 등장한 ‘청년은 시잌한 모양을 내고 싶다’는 문장이나 신동아 3권(1932)의 ‘어데로 보나 첨단적이고 보기조코 남의 마음을 끄는 물건을 시익하다고 부른다’ 등의 사례가 소개됐다.
▦신조어는 시대상의 반영
신조어는 초기에 사용자가 제한적이고 생경해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사회 변화와 시대상을 반영하는 척도가 된다.
경제개발의 상징어가 된 ‘새마을운동’은 산업화 시대인 1970년대에 등장한 신조어였다. 1975년에는 현대자동차의 국산차 모델 포니가 출시되면서 개인 소유의 자동차를 뜻하는 ‘마이카’ 시대의 단초가 마련됐다. 이즈음 등장한 미니스커트는 ‘따오기’로 불렸다.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이라는 가사가 포함된 동명의 동요에서 따왔다.
신조어는 사회가 불안하거나 혼란이 있을 때 많이 만들어진다.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위기에는 이와 관련한 신조어가 쏟아져 나왔다. 정리해고를 당하지 않으려면 납작 엎드려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엎드려서도 머리를 부지런히 굴려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자조가 담긴 ‘복지뇌동’이라는 말이 이 때 나왔다. 결혼을 했지만 기혼 여성부터 해고하려는 회사 방침을 알고 처녀 행세를 하는 여성들은 ‘IMF처녀’로 불렀다.
IMF 외환 위기 이후로는 경제 관련 신조어가 꾸준히 늘었다. IMF 직후 등장한 ‘조기’(조기 퇴직), ‘명태’(명예퇴직), ‘황태’(황당하게 퇴직) 등 생선 시리즈는 2000년대 중반 이후 ‘동태족’(한겨울에 명퇴한 사람), ‘알밴 명태족’(퇴직금을 두둑이 받은 명퇴자) ‘생태족’(해고 대신 타 부서로 전출 당한 사람) 등으로 바뀌었다. 지난 몇 년 간은 청년실업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면서 20대 태반이 백수라는 ‘이태백’, 30대 절반이 실업 상태라는 뜻의 ‘삼태백’, 비정규직 일자리로 내몰리는 20대를 일컫는 ‘88만원 세대’, ‘3포 세대’, ‘5포 세대’ 등의 신조어가 잇따라 회자됐다.
2000년대 중반에 등장한 눈에 띄는 신조어는 ‘몸짱’, ‘몸꽝’ 등 외모와 관련한 단어나 ‘퍼뮤니케이션’(다른 사람이 인터넷에 올린 콘텐츠를 스크랩해 다른 사이트에 게시하는 ‘펌’에 의한 커뮤니케이션)과 같은 정보통신 분야의 말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이용이 대중화된 2010년 이후로는 ‘소셜테이너’(사회적 발언을 하는 연예인), ‘프레지’(SNS로 협업할 수 있는 프레젠테이션 도구) 등 관련 용어를 비롯한 외래어 조어 비중이 부쩍 커졌다.
▦뜻 모를 복합어에 대한 반감도
이처럼 경제, 문화, 사회 할 것 없이 지속적으로 생성되는 신조어는 언어활동을 풍부하게 하고 생각의 지평을 넓혀 주는 긍정적 역할을 한다. 하지만 세대, 계층 간 소통 단절을 초래하는 역기능 문제도 끊임없이 제기된다. 특히 외래어 조어가 급증하는 데 따른 반감이 크다. 매년 국립국어원이 조사ㆍ발표하는 신조어를 보면 새로 만든 것보다는 2개 이상의 단어를 붙인 복합어가 상당수다. 이 중 외래어 차용이 가파르게 늘고 있다. 외래어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단어 자체로는 뜻을 알 수 없는 외래어 조어는 혼란스럽다. 예컨대 지난 3월 국립국어원이 발표한 2014년 신조어 중 복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복지 비용을 위한 증세에는 반대하는 사람을 뜻하는 ‘눔프(NOOMPㆍNot Out of My Pocket)족’ 등은 단어 그 자체로는 의미를 유추하기 어렵다. 최용기 국립국어원 교육진흥부장은 “시대상을 반영한 요즘 신조어는 언어의 ‘정보전달’ 기능에 충실한 경우가 많다”면서 “언어의 본질인 창조성, 역사성과 정서적 의미가 무시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렇지만 매체 발달과 함께 말의 생성과 성장, 소멸의 순환이 빨라진 현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낯선 말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보다는 신조어가 언중(言衆) 사이에 안착할 수 있는 체계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외국 문화가 빠른 속도로 퍼지면서 이에 대응하는 외래어도 함께 끊임없이 유입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한샘 연세대 언어정보연구원 교수는 “외래어 신조어 자체가 문제가 되기보다 ‘순화어’라는 이름으로 국립국어원이 새 낱말을 제시했을 때 혼란이 더 커지는 경우도 있다”며 “신조어 사용에 따른 혼란은 결국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새로운 정보와 어휘를 적절한 우리말로 대체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못한 데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고 진단했다.
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