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이 권력의 흥망성쇠에 따라 어떻게 표변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나폴레옹의 엘바섬 탈출과 파리 입성’에 관한 보도이다. 그 일화는 아주 잘 알려져 있지만 다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돼 황제 자리에서 쫓겨나 엘바섬으로 실질적 ‘유배’를 당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1814년 2월28일 추종자들을 이끌고 그 섬을 탈출했다. 그가 3월20일 파리에 입성하기까지 프랑스 신문의 머리기사 제목은 시시각각으로 달라졌다.
3월9일: 괴물 대역적 엘바섬 탈출. 10일: 코르시카 태생의 식인귀(食人鬼), 주앙에 상륙. 11일: 맹호, 숨 가쁘게 나타나다. 13일: 악마, 리용에 있다. 18일: 찬탈자, 60시간이면 수도에 도착. 19일: 보나파르트, 무장군 이끌고 전진 중. 20일: 나폴레옹, 내일 파리 도착, 입성은 힘들 듯. 21일: 황제 나폴레옹, 지금 퐁텐블로궁에 계시다. 22일: 황제 폐하, 어젯밤 틸릴리궁에 환궁.
4월13일의 20대 총선이 새누리당의 참패로 끝나자 권력 언론이자 수구·보수언론인 조선·중앙·동아일보가 대통령 박근혜를 향해 융단폭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조선은 총선 이튿날인 14일자 사설(‘박근혜 대통령과 친박의 오만에 대한 국민적 심판이다’)에서 박근혜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박 대통령은 임기 초에는 인사 실패를 거듭했고, 안하무인의 태도로 불통 시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박 대통령 주도로 선진화법을 만들어 주요 국정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매번 의사 결정이 지연되면서도 국민에게 사과 한 번 하지 않고 국회 탓만 했다. 이제 국정 주도력이 국민 불신을 받음으로써 사실상 임기 말 레임덕이 그 어느 정권보다 빨리 시작됐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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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14일자 사설. |
중앙은 같은 날짜 사설(‘중간선거에 참패한 여권···국민 이기는 권력 없다’)에서 “박근혜 정권의 참패는 민심이 분노하면 선거 구도를 삼켜버릴 정도로 무섭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박 대통령은 국민 이기는 권력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동아 역시 사설(“성난 민심 ‘선거의 여왕’을 심판했다”)을 통해 “‘선거의 여왕’으로 불린 박근혜 대통령이 노 전 대통령 탄핵 때의 성적표를 받아든 것은 충격적”이라며 “기득권에 빠져 국정은 도외시하고 자신들의 안위만 염두에 둔 ‘웰빙 새누리당’에 국민이 철퇴를 내린 것”이라고 ‘단죄’했다.
2012년에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섰고, 박근혜 정권 ‘지킴이’ 구실을 충실하게 했던 신문들의 사설이라고 믿기에는 내용이 너무나 강경하고 직설적이다.
가장 섬뜩한 것은 조·중·동과 같은 부류에 속하는 문화일보 4월 14일자 기사 제목(“박근혜·이한구·김무성·최경환·윤상현 새누리 ‘참패 5적’”)이다.
이 기사는 “독선과 불통으로 당청 관계나 당정 관계의 혼선과 혼란을 초래한 청와대, 새누리당 공천 과정에서 유아독존 식으로 칼날을 휘두른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 ‘옥새 파동’으로 정치를 희화화 한 김무성 대표, 친박 마케팅과 진박 코스프레의 주역 최경환 의원, ‘막말 파문’으로 몸 담았던 당 전체의 표를 잠식한 것으로 평가되는 윤상현 의원 등이 그들”이라며 박근혜를 ‘참패 5적’의 첫 번째 인물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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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일보 14일자 보도. |
‘5적’이라는 말은 1970년에 시인 김지하가 발표한 담시(譚詩) <오적>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그는 1905년에 나라를 일본에 팔아넘긴 ‘을사오적’에 빗대어 박정희 독재정권 시기의 ‘오적’을 소재로 ‘이야기 시’를 썼다.
김지하가 지칭한 5적은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이었다. 그런데 문화일보는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를 ‘4·13 총선 참패 5적’의 ‘수괴’로 꼽은 것이다. 조·중·동 못지않게 박근혜 정권을 지지하고 엄호해 온 신문에 실린 그 표현을 본 독자들은 ‘이게 문화일보 맞는가’ 하고 놀랐을 것이다.
중앙일보 4월15일자 사설은 “헌정 사상 최대 참패라면 내각과 청와대 참모가 총사퇴하는 게 책임지는 모습”이라며 “정치권에서 여당을 탈당한 대통령의 거국 내각, 야당까지 아우르는 대탕평 인사를 거론하는 것을 주목한다”고 강조함으로써 박근혜가 새누리당을 떠나 거국 내각을 구성하라고 주장했다.
박근혜가 그렇게 할 인물이 아님을 명백히 알 텐데도 이렇게 강한 논조의 사설을 내보내니 한겨레나 경향보다 훨씬 더 진보적으로 보인다.
같은 날짜 조선일보 사설은 “집권당이 이 정도로 크게 선거에서 졌다면 대통령이 나서서 그동안의 잘못을 반성하고 국정 쇄신에 대한 새로운 각오를 밝히는 게 옳다”며 박근혜를 이렇게 꾸짖었다.
“그게 선진국 대통령들이 흔히 보여주는 모습이다. 더구나 이번엔 박 대통령과 친박의 무리한 공천 보복이 여당 참패의 주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 청와대가 집권당의 참패를 남의 일처럼 말하면 박 대통령 스스로 남은 임기 동안 가시밭길로 걸어들어가는 꼴이다.”
동아일보 사설 역시 “박근혜 대통령의 오만에 대한 심판이 20대 총선의 민의”라며 “박 대통령이 그런 민의를 읽고도 침묵하는 것이라면 남은 임기도 ‘마이웨이’를 하겠다는 뜻으로 읽혀 섬뜩하다”고 비판했다.
집권당의 총선 참패가 확정된 14일 오전 박근혜가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청와대 대변인 정연국은 두 줄짜리 논평을 내놓았다. “20대 국회가 민생을 챙기고 국민을 위해 일하는 새로운 국회가 되길 바란다.”
그러자 동아일보는 15일자 사설에서 박근혜를 정조준했다. “민심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는 흔한 표현조차 없다. 마치 총선 결과와 청와대는 아무 상관이 없고, 그저 남의 일을 논평하는 것 같다. (···) 박 대통령이 앞으로 어떻게 국정을 운영해 나갈지 국민에게 직접 밝히는 게 옳다. 그것이 정권을 맡기고 중간평가에서 엄중하게 경고한 국민에 대한 예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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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3일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 제1투표소에서 제20대 국회의원 총선거 투표를 하고 있다. 보수 언론은 선거 참패 원인으로 박 대통령을 꼽고 있다. (사진=청와대) |
조선·중앙·동아일보는 일간지 시장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 신문들은 박근혜가 새누리당의 ‘진박’을 통해 ‘반박’을 몰아내고 실정법에 어긋나는 것이 분명한 선거운동을 노골적으로 벌이던 때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리고 왜 새누리당이 총선에서 180~200석을 얻을 수 있다는 ‘여론조사 전문가들’과 새누리당 집행부의 주장을 ‘경마 중계방송’ 하듯이 보도했는가?
그 신문들이 진정으로 주권자들의 입장에서 박근혜의 행태를 비판했다면 총선 참패 뒤 그에게 던지는 화살이 표적을 제대로 향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박근혜는 총선 참패로 ‘레임덕’을 넘어 ‘데드덕(죽은 오리)’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박근혜가 기상천외한 ‘묘책’으로 데드덕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조·중·동은 2009년에 ‘노무현 죽이기’를 하던 때처럼 수시로 박근혜를 인정사정 없이 비판하고 닦달할 것이다.
그러나 그 보다 더 명확한 사실이 있다. 조·중·동은 앞으로 19대 대통령 선거 시기가 다가오면 언제나 그랬듯이 새누리당 후보를 음양으로 적극 지원할 것이다. 세습·족벌 언론과 수구·보수 정치세력은 운명과 이익을 공유하는 일심동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