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9주기…사위 곽상언 변호사 인터뷰
“서거하시기 며칠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비서관이 제게 전화를 걸어 어르신을 바꿔줬어요. ‘잘 견뎌주게. 우리 딸 부탁하네. 고맙네’라고 하셨어요. 어르신이 제게 전화를 하신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요.”
오는 23일은 노무현 전 대통령 9주기다. 노 전 대통령의 사위 곽상언 변호사(47·사진)는 지난 14일 경향신문과 만나 그동안 자신과 가족이 겪은 시간과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노 전 대통령이 취임하기 직전인 2003년 2월8일 노정연씨(43)와 결혼한 그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과 가족 이야기를 한 것은 처음이다. 2건의 공익소송(주택용 누진제 전기요금 부당이득 반환청구소송·박근혜 전 대통령을 상대로 낸 위자료 청구소송)의 대리인 자격으로 2016년부터 드물게 언론에 등장하긴 했지만 개인적인 이야기는 철저히 함구했다. 그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자신의 말 때문에 행여 “아내와 아이들이 아픔을 겪거나, 노 전 대통령께 누가 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곽 변호사는 “가족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농담을 잘하고 잘 웃는 쾌활한 성격으로 보였다. 하지만 특히 아내가 겪어야 했던 고통을 말할 때면 입을 앙다물고 허공을 응시하거나 잠깐이지만 눈시울이 붉어지는 등 힘겨워했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을 ‘어르신’ 또는 ‘노 대통령’이라고 했다. 그는 “어르신 생전에 한번도 같이 술을 마셔본 적이 없다”며 “그게 아쉽다”고 말했다.
봉하 가던 길에 비보…휴게소서 “아빠가 좋아한 국수” 펑펑 운 아내
- 이명박(MB) 정부 때 국가정보원이 권양숙 여사를 미행했고 상시적으로 사찰한 것으로 보인다는 보도가 얼마 전 나왔어요.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그럴 수 있었겠다고 생각했어요.”
- 짐작한 일이라는 뜻인가요.
“MB에게 누군가 저에 대한 동향까지 수시로 보고한 내용이 담긴 2011년 청와대 문건을 지난해 9월에 이재정 의원(더불어민주당)이 공개했잖아요. 그때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르신이 퇴임하시면 좀 자유로워질 줄 알았는데 전보다 오히려 더 저희를 지켜보는 눈들이 있다고 개인적으로 느꼈거든요. 어르신의 대통령 임기 5년은 그것이 긍정적 의미이든, 부정적 의미이든 당연히 엄중한 감시를 받아야 하는 것이지만요.”
- 2013년 1월에 페이스북에 쓴 글도 그런 맥락에서였겠군요. “나에게 자유는 없다. 손발이 풀려 돌아다닐 수 있다고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시선으로 갇혀 있고 그로 인해 고통받고 있으면 수형생활을 하는 것이다”라고 했어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때와 비교하면 조금은 자유로워졌어요. 2012년 가을부터 6개월간 몸이 많이 아팠어요. 눈에서 고름이 나오고 앞이 안보였죠. 의사가 실명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3개월을 누워 지내야 했어요. 그런 어느날 아침 일어났는데 가슴이 ‘쿵’ 하는 거예요. 죽음의 징조로 느꼈고, ‘이렇게 허망하게 죽는구나’ 싶었어요. 많은 생각을 했고, 이후 삶의 태도를 바꿨어요. 매일 무엇을 하든 최선을 다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살자고요. 이후 한번도 아픈 적이 없었어요.”
2012년은 그의 가족에게 좋은 일과 나쁜 일이 한꺼번에 닥친 해였다. 셋째 아이가 태어났고, 부인 노정연씨가 수사와 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MB정부의 검찰이 정연씨를 수사한 것은 2009년 노 전 대통령 일가의 640만달러 수수 의혹 수사에 이어 두 번째였다. 2009년 5월 노 전 대통령의 서거로 수사는 결론없이 종결됐다. 하지만 3년이 흐른 2012년 1월 말 한 보수언론이 2009년 의혹의 연장선상에서 정연씨의 외화 밀반출 의혹을 보도하자 검찰은 다시 칼을 빼들었다. 4·11 총선을 불과 1개월여 앞둔 시점이어서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곽 변호사는 당시 아내의 변호인으로 나섰다. 이듬해 1월 정연씨는 1심에서 징역 4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항소했다가 취하했다.
- 2012년 부인을 직접 변호했더군요.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없었고, 제 앞에서 고통받고 있는 아내를 외면할 수 없었으니까요.”
- 의혹과 관련해 부인은 어떻게 설명하던가요.
“아내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요. 고통을 헤집는 것은 사람이 할 일이 아닙니다. 오직 수사기록만을 가지고 재판에 임했고, 수많은 밤을 새워 재판을 준비했어요. 아내는 결국 형사처벌을 받았지만 저는 수사기록을 보면서도 제 아내가 처벌을 받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어요.”
- 억울한 부분이 있다는 이야기인가요.
“누구든 잘못하면 처벌을 받아야죠. 그런데 비난도, 처벌도 그 행위에 상응해야 해요. 하지만 한국 사회는 그런 점에서 공정하지 않아요. 누구는 행위보다 훨씬 가혹한 처벌과 비난을 받고, 또 누구는 힘이 있다거나, 증거가 없다거나, 혹은 수사역량이 떨어진다는 이유 등으로 법망을 벗어나니까요.”
- 실명 위기와 죽음의 징조까지 겪었다고 하니, 얼마나 힘든 시간이었을지 짐작돼요.
“제가 미국에 집을 불법적으로 매입했다는 오명도 썼어요. 심지어 저로 인해 어르신께서 서거하시게 됐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고요. 억울했지만 참고 있습니다. 저는 변호사 일을 하면서도 한번도 법을 어기거나 세금을 내지 않은 적이 없어요. 기질적으로도 그렇게 안 해요.”
- 지난해 10월에는 자유한국당이 2009년 제기된 640만달러 수수 의혹과 관련해 노 전 대통령 일가를 또 고발했어요.
“저도 실체가 뭔지 알고 싶어요. 결코 숨고 싶지 않거든요. 앞서 수형생활이라고 표현했듯이, 사람들이 그런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저와 가족을 바라본 기간이 어르신 재임기간까지 더해 15년이에요. 그 시간 동안 저와 제 가족은 일정한 틀에 옭아매져 있었어요. 저들은 다양한 명목으로 수시로 저희 가족을 소환했고, 그때마다 저희는 매우 많은 비난을 받아야 했어요.”
- 지난달 9일 이명박 전 대통령이 구속 기소됐어요. 이에 앞서 이 전 대통령은 측근들이 검찰 수사를 받던 지난 1월에 성명서를 내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정치보복”이라고 했어요.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중요한 순간에 자신도 모르게 자백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죽음에 이른 것이고, 자신이 그 죽음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을요.”
- 곧 노 전 대통령 9주기예요. 준비는 잘 돼갑니까.
“저와 아내는 어르신의 공식행사는 더 이상 관여하지도, 참가하지도 않아요. 수많은 시선에 의해 아내를 위축되게 하고 싶지 않아서예요. 대신 공식행사 전에 다녀오죠.”
시간을 되돌려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2009년 5월23일의 이야기를 꺼냈다.
- 서거 소식은 어떻게 들었습니까.
“그날 이른 아침에 울린 전화벨 소리에 가족 모두가 깼어요. 어르신이 위중하다는 내용이었어요. 아내의 불안한 목소리에 전날 마신 술이 덜 깬 상태에서 저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어요. 왜 그때 하필 검은색 양복을 입고 나섰는지 모르겠는데 어떤 나쁜 예감이 들었던 것 같아요. 봉하로 내려가기 전에 두 아이를 남양주에 사는 여동생 부부에게 맡기기 위해 차를 운전하고 가다 라디오를 켰어요. 어르신이 돌아가셨다는 보도가 나왔어요.”
- 충격이 컸겠어요.
“라디오 보도를 함께 들은 아내는 오열했고, 영문을 모르는 두 아이는 불안해하며 눈치만 살폈죠. 토요일이라 차가 많이 밀렸는데 이럴 때 사고로 가족을 잃으면 안되니까 저는 규정속도를 지키며 오직 운전에만 집중했어요. 아이들을 맡긴 후 봉하로 향하는데 여러 대의 차들이 저희 차를 추월해 나갔어요. 모두 언론사 차들이었어요.”
그는 그날의 기억 한 토막을 들려줬다.
“중간쯤 휴게소에 한번 들렀을 때 국수를 주문해 아내에게 권했어요. 아내는 국수가 담긴 그릇을 내려다보더니 ‘아빠가 국수 좋아하셨는데…’ 하면서 또 서럽게 울었어요.”
- 노 전 대통령이 서거 전에 곽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고요.
“서거하시기 며칠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비서관이 제게 전화를 걸어 어르신을 바꿔줬어요. ‘잘 견뎌주게. 우리 딸 부탁하네. 고맙네’라고 하셨어요. 어르신이 제게 전화를 하신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요.”
- 그때 뭐라고 답했나요.
“ ‘예. 제 역할은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어요. 으레 건네는 당부 말씀이겠거니, 하면서도 이렇게 전화까지 하신 걸로 보면 특별한 의미가 있겠다, 정도 생각했어요. 그게 제가 들은 어르신의 마지막 목소리였어요.”
사명감 강했던 장인 노무현
일에 영향 줄까 술도 안 드셨던 분
자신의 욕망 위한 부끄러운 짓은
기질적으로 못하시는 분이었는데
MB ‘노무현 죽음에 정치보복’ 성명
정치적 영향력 행사한 것 자백한 셈
노무현 전대통령이 서거한 2009년 5월23일 분향소가 마련된 봉하마을에서 딸 정연씨가 눈물을 흘리며 남편 곽상언씨와 함께 헌화하고 있다. 서성일기자
노 전 대통령의 장례는 국민장으로 7일 동안 진행됐다. 그는 장례 기간 자신의 상태와 풍경, 인상의 조각을 2017년 1월28일 페이스북에 기술했다. 그는 “장례를 마칠 때까지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장례 기간 내내 잠을 자지 못했다. 이상한 경각심으로, 지금 주어진 일을 실수 없이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눈물도 흘리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지낸 것 같다”고 썼다.
그러나 그가 정작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글 말미, 안희정 당시 충남지사에 관한 것이었다. ‘슬프고 분주한 장례식장에서 언론과 인터뷰를 하며 고인에 대한 사랑과 미안함을 말했고 그분을 돌아가시게 한 세상과 권력을 원망하며 포효하기도 한’ “안희정 지사를 의심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나는 전직 대통령이 되신 어르신이 수사를 받고 모든 언론의 표적이 되었던 그때 그가 무엇을 했는지 도무지 기억하지 못한다”고 썼다. 언론이 주목하자 곽 변호사는 이 글을 비공개로 바꿨다가 얼마 후 다시 공개했다.
- 당시 안희정 지사를 비판한 특별한 배경이 있었습니까.
“저는 사람에 대해 관심이 많아요. 특히 특별한 상황에서 특별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주목하죠. 그런데 그 특별한 행동 혹은 패턴이 반복되면 우발적인 게 아닌 거죠. 제가 글을 쓴 당시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탄핵절차가 진행 중이었고 촛불의 염원이 아직 실현되기 전이었어요. 그런 엄중한 시기에 정치인들은 대통령 출마 선언을 앞다퉈 했어요. 가장 먼저 누가 출마선언을 하는지 지켜봤죠. 민주당에선 아니나 다를까 안 지사가 가장 먼저 선언했어요. 저는 그의 패턴이 반복된다고 봤어요.”
“640만달러 수수 의혹에 10년간 옭아매져…나도 실체를 알고 싶다”
안희정 ‘DJ·노 적자’ 운운에 의심
성폭력 미투 불거진 건 노코멘트
- 패턴이 반복됐다는 게 무엇을 말하는 건가요.
“10년 이상 ‘정치인 안희정이 노무현 대통령 대신 감옥에 다녀왔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안 지사가 자기 홍보를 위해 이렇게 말했거나 고의로 방치했다면 그는 어르신을 한낱 건달로 취급한 거예요. 조직을 위해 진범 대신 다른 사람을 감옥에 보내는 것은 건달세계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니까요. 또 그는 수많은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을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자이자 적자, 민주세력의 적통이라고 홍보했어요. 하지만 저는 장자의 칭호에 걸맞게 그가 DJ나 노무현의 정치를 지향하는 세력을 책임지고 돌봤다거나 그들을 위해 헌신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어요.”
- 안 전 지사는 자신의 정무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얼마전 불구속 기소됐어요. 정치적 생명도 끝났다는 게 일반적 시각이에요. 안 전 지사와 관련한 미투가 불거졌을 때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잠시 생각하더니)노코멘트할게요.”
- 김경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6·13 지방선거에서 경남지사 후보로 추대되면서 공석이 된 경남 김해을 보궐선거에 처남인 노건호씨 차출설이 한동안 돌았어요. 노건호씨는 현재 LG전자 중국법인 소속으로 중국 베이징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처남의 정계 입문을 권양숙 여사가 반대한다는 이야기도 있더라고요.
“처남의 생각은 알 수 없어요. 처남의 생각과 결정에 제가 개입할 권한도 없고요. 다만 제가 아내에게 오래전부터 한 이야기는 있어요. 아버지가 비명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들은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고요. 만약 정치참여가 아버지를 위한 가장 효율적이고 적합한 일이라면 해야 한다고요. 그러나 그것이 아버지의 그늘에서 살라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2011년 노 전 대통령 2주기에 참석한 유족. 경향신문 자료사진
2012년 불거진 사건이 아니더라도 노 전 대통령 서거 후 그의 가족은 보통의 평범한 삶을 살지 못했다. 그는 “사는 곳도, 일터도 자주 바꿔야 했고 가족의 안위를 걱정해야 했다”고 말했다.
-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제 첫 직장은 법무법인 화우였고, 두 번째 직장은 1년간 몸담았던 미국의 대형로펌 스캐든(skadden) 법률사무소였어요. 2007년 하반기에 귀국했지만 저를 받아주는 로펌이 없었어요. 폐를 끼치기도 싫어 어르신 퇴임에 맞춰 친구와 개업하기로 하고 사무실을 열었는데 친구가 안 들어왔어요. 친구의 사무실 식구들이 저와 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걱정했을 거예요. 그 후 매일 쏟아지는 의혹 보도 속에서 정신없이 사무실을 꾸리던 와중에 어르신이 돌아가셨고, 몇달 후 결국 사무실을 닫았어요. 이후 1년간 재택근무를 하다 접었지만 여전히 제가 갈 로펌은 없었어요. 그러다 어느 변호사님의 배려로 그분의 작은 사무실에서 8~9개월간 독자적으로 근무하다가 아무런 연고가 없는 대전으로 내려갔어요.”
- 왜 대전까지 갔나요.
“멀리 갈 테니 더 이상 우리 가족에게 신경쓰지 말라는 심정에서였어요. 그게 제 생각엔 가족을 지키는 길이었어요. 대전에서는 박범계 변호사 사무실의 방 하나를 빌려썼어요. 그러다 이듬해인 2012년 셋째 아이가 태어나면서 다시 서울로 올라왔고, 우여곡절 끝에 법무법인 인강을 설립했어요.”
- 재택근무를 접은 이유는요.
“재택근무는 정말 너무 힘들었어요(웃음). 변호사 업무를 하면서 비서 역할도 해야 하는 등 1인 다역을 소화해야 하니까요. 우체국은 물론 법원이나 검찰청 등기소에도 직접 다 가야 했고 복사도 직접 해야 했죠. 아침에 일어나 샤워를 한 후 밥을 먹고 안방에서 작은방으로 가면 업무의 시작이었어요. 퇴근은 자정에 했고요.”
- 부인 노정연씨는 전업주부인가요.
“아내는 사회생활하기 어렵죠.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지금은 건강을 많이 회복했지만….”
손을 입가에 댄 채로 그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10초쯤 지났을까. 그는 “어르신 돌아가시기 전에 아내가 병원에 입원했었고 건강이 많이 안 좋았다”며 “지금은 그럭저럭 나아지긴 했는데… 한동안은 제가 정말 신경을 많이 썼는데… 지금은 그렇게 해주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띄엄띄엄 얘기하는 그의 목소리에 부인에 대한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짙게 묻었다.
“원래 저는 결혼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인데, 그런 저를 만나서 아내가 고생했어요. 고집은 세고 돈은 없고 돈도 못 버는 남편이니까요.”
- 노정연씨는 어떻게 만났어요.
“아내는 저와 같은 아파트 같은 동에 거주하던 아주머니 딸의 친구였어요. 사법시험에 합격한 이듬해인 2002년 여름이었는데 아주머니께서 저를 눈여겨 보셨는지 저희 집에 연락을 하셨어요. 딸 친구를 만나보라고요. 당시 아내의 집이 있던 혜화동 인근인 대학로 스타벅스에서 아내를 처음 만났어요.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처음 먹어본 날이기도 해요. 그 후로 지금까지 아이스아메리카노만 마십니다. 일종의 기념으로요. 하하하….”
- 노무현 당시 대통령 후보의 딸인 줄 알고 만났던 건가요.
“만나기로 약속했을 때는 몰랐다가 직전에야 들었어요.”
- 어떤 점에 매료돼 결혼까지 결정했나요.
“두 번째 만났을 때 같이 영화를 보고 삼겹살을 먹었는데 ‘왠지 이 사람과 결혼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아내는 제가 삼겹살을 구워서 권하는 자상한 모습을 보며 자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대요. 만난 지 두달 만에 결혼날짜를 잡고 그로부터 4개월 만에 결혼했어요. 당시 어르신이 대통령 후보자 신분만 아니었다면 더 일찍 결혼했을 거예요.”
- 처음 인사를 드렸을 때 노 전 대통령은 어떻게 맞아주시던가요.
“2002년 9월에 하얏트 호텔 중식당에서 뵀어요.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너무 긴장했기 때문에 기억나지 않아요(웃음). 아마 당시는 지지율이 낮아 당내에서 후보 사퇴 압박이 컸던 즈음이었는데 딸이 결혼하겠다고 조르니까 허락해주신 것 같아요.”
아내 정연씨 2002년 소개로 만나
대선후보였던 장인께 첫 인사
어르신 서거 후 가족들 힘겨운 삶
일자리 못 찾아 대전 내려가기도
2012년 셋째 태어나며 다시 서울로
2003년 2월8일 노무현 당시 대통령 당선인 부부가 딸 정연씨의 결혼식(왼쪽) 후 폐백실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고양=국회사진기자단
- 결혼하고 2주일 후 노 전 대통령이 취임했죠.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까.
“아니요. 당시 처가가 청와대였는데 가능하면 안 갔어요. 꼭 가야 하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정장을 하고 갔고요. 스스로 거리를 두자고 결심했기 때문에 옷차림에도 제 마음가짐을 담은 거였어요.”
- 왜요.
“전직 대통령들이 친·인척 때문에 고초를 겪었으니까 저 스스로 절제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했거든요.”
- 그래도 장인·사위 간이니 노 전 대통령 생전에 같이 술도 한잔 하면서 대화도 많이 나누었을 것 같은데요.
“결혼하자마자 어르신이 취임하시면서 장인·사위 간의 정을 쌓을 기회가 없었어요. 퇴임 후 잠깐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여러 일이 닥치면서 안됐죠. 어르신께서 취임 전에는 술을 즐기셨던 것 같은데, 언젠가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게 기억나요. 술을 마시고 취하면 일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술을 안 드신다고요. 그만큼 일에 대한 사명감이 강하셨어요. 저는 어르신과 술을 한번도 마셔본 적이 없어요. 그게 아쉬워요.”
- 부인은 아버지를 어떻게 기억하나요.
“늘 바쁘고 엄했던 아버지로 기억하는 것 같아요.”
- 곽 변호사는 노 전 대통령을 어떤 사람으로 기억합니까.
“기본적으로 멋진 남자죠. 자신의 뜻대로 삶을 펼친 분이었으니까요. 인격적으로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어르신은 주어진 일은 마다하지 않고 돌파하려 하셨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 부끄러운 짓을 기질적으로 하지 못하는 분이었어요. 실제로 그분이 대통령으로서 한 정치행위 중에 본인을 위한 것은 전혀 없었어요.”
- 아이가 셋이라고 했죠.
“큰아이가 2004년생으로 중 2인데 집에서는 왕딸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고, 둘째는 2006년생인데 둘둘이라고 불러요. 셋째는 2012년생으로 우리 나이로 7살이에요. 별명이 똥군이에요(웃음).”
- 위로 두 아이는 외할아버지를 기억하나요.
“첫째만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데, 워낙 강렬했기 때문인지 장례식장의 기억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 아이들이 장차 어떤 어른으로 성장하길 바랍니까.
“큰딸이 아직 어렸을 때 제가 매일 밤 해준 기도가 있어요. ‘자기 자신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라’는 거였어요. 정신을 포함해 스스로를 지키는 일은 굉장히 어려워요. 모든 꽃은 자신의 꽃으로 피는 거예요. 제 아이들도 자신만의 꽃을 피우는 어른으로 성장하기를 바라요.”
퇴임후 경남 김해 봉하 마을로 내려온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8년 4월 자전거 뒤 수레에 손녀를 태우고 마을 주변을 달리고 있다. 카우보이 모자에 검은 장갑을 착용한 노 전 대통령의 모습이 이채롭다. 노무현 전 대통령 홈페이지 사람사는세상 제공.
서울 태생인 그는 1990년 서울 양천구 신목고를 졸업하고 재수 후 1991년 서울대 국제경제학과에 입학했다. 학부 졸업 후엔 서울대 대학원 법학과를 졸업했고, 2001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결혼 후인 2005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대 로스쿨에 입학했다. 그는 “학창시절 내내 고단한 삶을 살았다”고 했다. 1남1녀 중 맏이였는데 대학 입학과 동시에 줄곧 가족을 부양하는 가장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제가 중3일 때 아버지께서 집을 나가셔서 행방이 묘연했어요. 제가 결혼하고 한참 후,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뵙고 18년 뒤에야 스님이 된 모습으로 저를 만났습니다. 아버지의 부재로 저는 스무살 때부터 과외 알바를 해서 저와 여동생의 등록금은 물론 집안의 생활비를 댔어요.”
- 고교 때는 이과였던데 대학에 입학할 때 국제경제학을 선택한 이유가 뭐예요.
“이과가 적성에 맞지 않았어요. 어려서부터 글쓰기를 좋아해서 재수하면서 문과로 진로를 바꿨죠. 하지만 문과 전공이 뭐가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처음엔 소설가가 되어볼까, 아니면 신학대학을 가볼까, 여러가지 생각을 하다가 아무래도 제가 장남이다 보니 취직이 잘될 것 같아 국제경제학과를 택했어요.”
- 그러면 대학원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변호사가 된 이유는 뭔가요.
“결과적으로 착각이었지만 변호사가 되면 생계 문제에서 해방될 줄 알았거든요(웃음).”
- 판검사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나요.
“아주 잠깐 몇분 동안 생각은 해봤지만 금세 접었어요.”
그는 스스로를 “빚쟁이 자영업자”로 표현한다. 그럴 만도 한 게 그는 돈이 안되는 2건의 공익소송을 몇 년째 진행하고 있다. 2014년 8월부터 한국전력공사를 상대로 잇따라 제기한 주택용 누진제 전기요금 부당이득 반환청구소송(이하 ‘한전소송’)과 2016년 12월 시작한 박근혜 전 대통령을 상대로 3차에 걸쳐 낸 위자료 청구소송(이하 ‘박근혜 소송’)이다. 그는 정치적·사회적 파장이 큰 이 2건의 국민 참여 소송의 대리인이다. ‘한전소송’은 원고 1만여명이 참여한 13건의 소송이, ‘박근혜 소송’은 1만여명이 참여하는 3건의 소송이 현재 진행 중이다.
- 한전소송은 지금까지 1번 이기고 7번쯤 패한 것으로 알아요.
“1, 2심이 진행 중인 것도 있고 대법원에 가 있는 사건도 있는데, 앞으로는 다 이길 겁니다.”
- 어떻게 장담하죠.
“올해 3월에 지금껏 한전이 주장한 내용과 판결문에 나온 패소 이유를 모두 종합해서 그것이 왜 부당한지 모든 통계자료를 전부 확인했거든요. 그동안 모든 관련자료를 한전이 쥔 채 공개하지 않아 난관이 컸는데, 제가 그 자료를 다 찾아내 분석했어요. 이 때문에 판사님이 제가 새로 쓴 서면을 읽어주시기만 한다면 절대로 질 수 없는 싸움이라고 확신해요. 올 6월8일 5300가구가 참여한 서울중앙지법의 사건에 대한 선고가 분수령이 될 거예요.”
- 4년간 싸워서 지금과 같은 승률을 기록했다면 힘이 빠질 만도 한데요. 한전소송을 왜 이렇게 집요하게 하는 겁니까.
“하하하… 저도 우연히 진행하게 된 것이지만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 난 이상 하지 않는 것은 제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니까요. 지금 이 사건은 제가 처음 제기한 문제이고 저 외엔 할 수 없어요. 매우 정당한 사건이고, 가장 많은 사람이 혜택을 얻을 수 있으며, 삶의 기본조건을 다루는 사건이에요. 저는 삶의 기본조건이 균등한 세상을 꿈꿔요.”
- 소송 의뢰인으로 참가하려면 얼마를 내야 하나요.
“지금까지는 가구당 최소한의 소송비용인 5만원씩 받았지만 보다 많은 분들이 참가하실 수 있도록 지금은 소송비용을 받지 않고 진행해드리고 있어요. 이미 추가로 소를 제기해야 하는 원고도 1만명이 대기 중이에요.”
- 소송을 통해서 어떻게 바꾸자는 건가요.
“말 그대로 누진이 아닌 사용량에 비례해서 전기요금을 내자는 거죠. 과소비를 못하게 한다는 명분으로 우리나라는 그동안 전기 사용량에 단계를 두어 폭증하는 요금체계를 만들어 적용해왔잖아요. 하나의 회사가 독점적으로 전기를 공급하는 나라도 없을뿐더러 누진요금 체계로 전기사용량을 억제하는 일부 국가조차도 한국과는 현격히 다른 개념이에요.”
- ‘박근혜 소송’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총 3건이 진행 중인데, 첫 번째 사건은 재판이 진행 중이지만 재판장이 계속 기일을 연기시키고 있고, 2번째 사건은 재판장이 재판기일을 잡지 않아서 한번도 재판이 진행되지 않고 있어요. 3번째 사건만 정식으로 재판이 진행되고 있죠.”
- 이곳 인강에서 근무하는 변호사와 직원 수는 몇명인가요.
“제가 운영하는 서울사무소는 변호사 3명, 직원 2명이 일해요.”
- 월급은 제때 줍니까. 또 집에 생활비는 잘 가져다주나요.
“당연하죠. 빚은 한전소송 때문에 생긴 것인데 수임한 다른 소송들도 있기 때문에 잘 견디고 있어요. 아내에게는 ‘내가 얼마를 버는지 알고 싶으냐. 하지만 알게 되면 고민도 나눌 수밖에 없으니 한 사람만 고민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했어요. 아내도 ‘고민하기 싫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아내에게는 매달이 아니라 돈이 들어올 때 한꺼번에 목돈으로 줘요.”
한전·박근혜 위자료 공익소송 2건
빚이 늘더라도 몇 년째 진행 중
스스로 ‘빚쟁이 자영업자’ 자처
현실정치 입문에도 관심 있지만
처가 그늘로 정치할 생각은 없어
지난 14일 곽상언 변호사가 자신이 운영하는 법무법인 '인강' 사무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
- 현실정치 입문에 뜻이 있습니까.
“관심 있어요. 하지만 일단 한전소송을 끝내야죠. 한전소송은 제게도, 또 사회적으로도 의미가 아주 크니까요. 그런 다음에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려고요.”
- 정치권의 제안을 받은 적도 있나요.
“지역활동가들이 찾아와서 국회의원 출마를 권유한 경우는 많았어요. 저는 처가의 그늘로 정치를 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 발언과 관련해 조현오 경찰청장을 고소ㆍ고발한 노 전 대통령의 사위 곽상언 변호사와 고소ㆍ고발 대리인 문재인 변호사가 2010년 9월9일 오후 고소인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중앙지검으로 들어서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문석 기자
- 문재인 대통령은 가끔 만났습니까.
“수년 전까지는 가끔 뵀죠. 2008년 어르신이 퇴임하신 이후에는 부산에서 변호사로 생활하셨기에, 부산에 갈 때마다 한번씩 인사를 드렸어요. 성품이 아주 좋으신 분이에요.”
그는 “저는 그냥 곽상언이고 (지금)직업은 변호사입니다. 제 이름과 직업은 ‘노 전 대통령 사위’가 아닙니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