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족·시민 200여명, 대통령실까지 ‘침묵 행진’
“정부와 여당은 가장 아프고 억울한 국민들의 목소리에 먼저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태원 참사 특별법을 신속하게 공포해주십시오.”
17일 아침부터 흩날리던 눈발이 어느새 빗방울이 돼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영정사진 위로 맺혔다. 희생자 140명의 영정사진을 품에 안은 유족과 시민 200여명은 서울광장 합동분향소에서 출발해 용산 대통령실 앞까지 묵묵히 걷고 또 걸었다.
“침묵으로 절규하는 유가족들의 호소”, “죽음 뒤에 가려진 진실을 밝혀달라는 희생자들의 소리 없는 목소리”, 그리고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돌아온 생존자들의 숨죽인 목소리”가 서울 도심 한복판 차로 위 길게 늘어진 ‘침묵시위 행렬’을 에워쌌다.
이날 10·29 이태원참사유가족협의회·시민대책회의가 주최한 침묵의 영정 행진은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시행을 염원하는 유족들의 절박함 속에 이뤄졌다. 지난 7일 발의 265일 만에 국회를 통과, 오는 19일 정부 이송을 앞둔 이태원 특별법은 윤석열 대통령이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좌초될 위기에 놓인 상황이다. 유족들이 영정을 들고 거리로 나선 것은 지난해 2월 참사 100일 시민추모대회 이후 처음이다.
행진에 앞서 참사 희생자 이승연씨의 어머니 염미숙씨는 “그토록 바라던 특별법이 통과됐지만, 특별법이 순조롭게 공포될 때까지 우리 유가족들의 눈물과 한숨은 거둬지지 않았다”며 “여당과 정부가 주장하던 요구들을 상당 수준 반영한 특별법 수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지만, 특별법이 ‘무소불위 권한을 조사기구에 부여한다’, ‘총선용 정쟁 악법이다’는 식의 정치적 수사를 앞세우며 대통령의 재의요구권 행사를 위한 명분을 찾고 있다. 1년이 넘도록 정부와 여당의 회피와 외면 속에서 특별법 제정을 목소리 높여 외쳐왔던 유가족들은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일 뿐”이라고 말했다.
희생자 이상은씨의 아버지 이성환씨도 “이태원 참사 특별법은 정쟁의 대상도, 총선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법이 될 수 없다. 다시는 이 땅에서 이와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참사의 원인을 정확하게 밝히고 재발방지 대책을 세우기 위해 반드시 공포되고 시행되어야 하는 법일 뿐”이라며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의 태도 변화를 촉구했다.
눈비가 섞여 내리는 궂은 날씨 속에서 대통령실에 다다른 유족들의 머리는 흠뻑 젖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행여나 눈비에 희생자들의 영정 사진이 더럽혀질라 자신이 매고 있던 목도리까지 풀러 수시로 닦았다. 한 유족은 대통령실에 도착한 뒤 힘에 부친 듯 쓰러져, 다른 유족들의 부축을 받고 일어나기도 했다.
행진을 지켜보던 시민들은 함께 눈시울을 붉혔다. 한 시민은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 너무 안됐고 슬프다”며 ”이 빗속에 너무 안쓰럽다”고 말했다.
대통령실에 도착한 유족들은 4대 종단 기도를 끝으로 행진을 마무리했다. 시민대책위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영정 앞에만 서면 눈물부터 쏟아지는 유가족의 마음을, 손을 잡아주고 신속히 특별법을 공포해줄 것을 강력하게 촉구한다”고 말했다.
심우삼 기자 wu32@hani.co.kr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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