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를 찾기 어려운 일입니다. 박근혜 보수정권과 조선일보가 속된 말로 ‘한 판 붙었’습니다. 그동안 조선일보와 보수정권은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습니다. 조선일보는 보수정권을 만들어내고 이데올로기의 산파 역할도 했습니다. 보수정권은 조선일보의 훈수에 어느 정도 수긍해가며 1등 신문의 영향력을 유지하도록 했습니다. 이명박 정부 때는 ‘종편’이라는 선물도 줬지요.
박근혜 정부 때도 관계가 좋았습니다. 대통령과 조선일보가 함께 ‘통일은 대박’을 외쳤고, 우연인지 몰라도 박근혜 정부의 앓던 이 채동욱 검찰총장은 조선일보의 ‘혼외자’ 보도로 낙마했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말 안 듣는 언론을 국가·성향 막론하고 손을 볼 때(정윤회 특종을 한 세계일보 사장이 교체되고 통일교 압수수색을 당했을 때, 일본의 우익신문 산케이 기자가 법정까지 서게 됐을 때)도 조선일보와 박근혜 정부의 관계, 문제 없어보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눈에 보이는 모습일 뿐, 이 관계는 기존의 보수정권-조선일보의 관계와는 좀 달랐습니다. 조선일보는 늘 그랬듯 보수정권이어도 인사 문제 등 어느 정도는 비판을 해왔습니다. 총선 때 대통령이 개입하지 말라고도 엄히 꾸짖었죠,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조선일보의 ‘조언’을 무시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인사를 비판할 때, 그 인사를 밀어붙였고 총선개입을 반대했지만, 사실상 새누리당 공천에 개입했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7월18일, 드디어 사고가 터집니다.
발단 – 조선일보, 공세(攻勢)의 필봉(筆鋒).
7월18일 월요일 조선일보 1면, 뉴스 주목도가 가장 높을 시간, 가장 주목되는 위치에 조선일보가 청와대 우병우 민정수석 비리 의혹을 제기합니다. 우 수석의 처가의 땅을 넥슨이 사줬다. 즉 일종의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이죠. 이미 비리혐의가 드러난 진경준 검사장과도 ‘연결고리’가 있다고 보도합니다.
조선일보의 메시지는 명확했습니다. ‘우병우 나가!’, 하지만 청와대는 아무 반응이 없습니다.
전개 – 초조한 조선일보
7월26일, 대통령 직속 이석수 특별감찰관이 우병우 감찰에 착수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조선일보는 우병우가 나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음날, 이 소식을 보도하면서 조선일보는 특별감찰 착수가 박근혜 대통령의 출구전략 아니냐, 즉 혐의가 분명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우병우 수석을 내보내기는 부담스러운 대통령이 특별감찰관을 이용해 우 수석을 쫓아내려는 것 아니냐는 분석을 내놓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이없이 낙관적이죠?
청와대의 침묵은 계속됩니다. 대통령은 휴가를 떠나지요. 그리고 8월1일 박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옵니다. 이날 조선일보를 보면 대통령이 ‘휴가 정국 구상’을 마치고 돌아올 때 우 수석이 나갈 것 같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습니다.
하지만 청와대는 여전히 침묵, 올림픽이 개막하고 뉴스는 올림픽 세상이 됩니다. 게다가,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복심, 스스로 ‘내시’라고 불려도 괜찮다는 취지로 말해왔던 이정현 의원이 당 대표가 됩니다. 조선일보는 초조해진 듯 합니다.
그런데 들려온 희소식, 8월 중순부터 청와대에서 개각 얘기가 나옵니다. 조선일보는 다시 한 번 기대를 품겠죠? 8월15일 조선일보는 <“우병우 거취는 주말 전후 결론이 날 것”>이라는 바람 섞인 기사를 내놓습니다. 사설에서는 “우병우 놔두고 개각하면 누가 납득하겠냐”고 다시 한 번 개각에 우 수석을 밀어넣습니다.
대통령이 드디어 조선일보의 말을 들어주는구나 라고 생각했는지, 16일자 신문은 대통령의 광복절 연설을 톱으로 싣습니다. 대통령이 ‘자기 비하 세태에 일침을 가하셨다’고 말하고 사설은 ‘헬조선’이란 말을 쓰는 젊은이들에게 일장 훈계합니다. 참고로 이날 박 대통령은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돌아가셨다는 황당한 얘기를 하셨었죠.
위기 – 반격의 시작
반전은 MBC에서 터졌습니다. 16일 저녁 MBC는 우 수석을 감찰하던 이석수 특별감찰관이 어떤 언론사 기자에게 감찰 상황을 유출했다고 보도합니다. 이 기자는 조선일보 기자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MBC가 이석수 감찰관과 조선일보 기자가 주고받은 말의 내용을 어떻게 알았지? MBC는 처음엔 SNS라고 했다가 카톡이라고 했다가 정보보고라고 했다가 오락가락 합니다. 출처가 불명확한거죠. 그러다보니, 이 정보가 청와대에서 나왔다는 의혹이 제기됩니다.
이석수 감찰관의 불법 감찰내용 유출의 당사자가 된 조선일보는 당황한 기색이 보입니다. 일단 18일, MBC에 정보 입수경위를 따져 묻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잠잠했던 우 수석에 대한 공격을 재개합니다. 이석수 감찰관이 우 수석을 검찰에 수사의뢰하자 조선일보는 우 수석의 “사퇴 피할 구실 없다”고 지적합니다. 이제 제발 좀 나가…. 그런 의미일까요?
이후에도 조선일보는 계속 우 수석을 공격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사실이 없어 목소리에 힘이 빠집니다. 우 수석에 대한 야당의 공세로 지면을 채웁니다. 그럼에도 우 수석은 나갈 기미가 없습니다. 우병우 사건과 이석수 사건은 한 팀에 배정됐고, 그 수사팀장이 우병우 라인이라는 얘기가 돕니다.
절정 – 난타전
21일 청와대 ‘익명의 한 관계자’가 연합뉴스에 등장합니다. 그는 조선일보를 “부패 기득권 세력”이라고 부릅니다. 응? 이게 무슨 말이지? 정체는 곧 드러납니다. 22일 대우해양조선 수사 과정에서 언론인 A씨가 비리혐의에 연루됐다는 말이 나옵니다. 26일,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은 A씨가 바로 조선일보 송희영 주필이라고 폭로합니다. 정황은 꽤 구체적입니다.
그리고 29일 검찰 특별수사팀이 조선일보 이명진 기자의 휴대폰을 압수합니다. 이명진 기자는 우 수석 의혹을 처음 보도한 기자인데요. 검사와 수사관들이 참고인인 조선일보 기자의 집을 찾아와 압수수색 영장을 제시했고 컴퓨터 등을 뒤지고 휴대폰을 가져갔다고 합니다. 30일 조선일보는 1면 기사를 통해 크게 분노합니다. “우병우 보도에 대한 보복이냐?” 조선일보는 사설로 묻습니다.
즉, ‘부패 기득권 조선일보 세력들이 청렴한 우병우에게 청탁을 넣었지만 우병우가 이를 들어주지 않았고 그러자 보복을 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행동, 사퇴할 사람의 행보가 아닙니다.
결말....?
조선일보는 사면초가인 것처럼 보입니다. 31일 조선일보는 송희영 논란에 대해 사과합니다. 1면을 통해서요. 하지만 제2의 송희영이 등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 때마다 조선일보는 1면을 통해 사과할까요? 청와대의 다음 수는 뭘까요? 부패 기득권 세력으로 칭했던 조선일보에 대한 전면 공세에 나설까요?
조선일보 기자들의 반응은 나뉩니다. 어떤 기자들은 ‘조선일보 vs 청와대’라는 도식이 지나치다고 하고, 또 어떤 기자들은 임기 말로 접어드는 청와대가 별로 힘이 없을 것이라 하고, 또 다른 어떤 기자들은 ‘박근혜 대통령은 임기 하루만 남아도 보복을 할 사람’이라고 우려합니다.
일각에서는 청와대가 조선일보에 대한 정보를 몇 가지 더 쥐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언론을 통해 하나씩 ‘한 익명의 관계자’를 통해 흘리고 있습니다. 이제 선택은 조선일보로 넘어왔습니다. 더욱 공세의 끈을 조일지, 한 수 접을지 기로에 놓여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기세가 좀 수그러들었다’고 보는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