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두사호의 뗏목' - 테오도르 제리코, 1819년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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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폭의 그림이 있다. 루브르 박물관, 드농관 1층에 위치한 프랑스 화가 제리코의 작품이다. 그 이름하여 '메두사 호의 뗏목'. 가로 5미터, 높이 7미터에 이르는 정말 엄청난 크기의 그림이다. 복도에 놓인 의자에 앉아 찬찬히 그림을 감상한다. 그리고 느껴본다. 화가가 그려낸 그 복잡하고도 미묘한 감정의 복선들을.
▲ 메두사호의 뗏목 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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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눈길이 간 곳은 그림의 왼쪽 아래. 한 노인이 죽어가는, 혹은 죽어버린지도 모르는 사내를 붙들고 비탄에 잠겨있다. 그 양옆으로도 각각 앞으로, 그리고 뒤로 고꾸라진, 생사 여부를 알 수 없는 남자 둘이 있다.
▲ 메두사 호의 뗏목 중 | |
ⓒ 임하영 |
눈길을 조금 옆으로 돌리면 붉은 옷을 걸치고 오른쪽을 응시하고 있는 한 남자를 볼 수 있다. 필사적으로 손을 뻗치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자포자기의, 초조한 눈빛으로 무언가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 아마 오랜 표류와 반복되는 희망고문으로 더 이상 몸을 움직일 여력조차 남아있지 않거나, 옆의 노인과 같이 동료를 잃고 슬픔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 메두사 호의 뗏목 중 | |
ⓒ 임하영 |
그리고 그림의 맨 오른편, 최고의 희망과 절망이 공존하는 부분이다.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상황에서 다들 저 멀리 보이는 무언가를 향해 필사적으로 팔을 내밀고 있다. 구원의 손길이 뻗쳐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마지막 남은 힘까지 쥐어짜내 처절한 몸부림을 치고 있다.
근처를 지나가던 배가 이들을 발견했는지, 혹은 그냥 지나쳤는지, 이 그림을 통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이들이 끝내 어떤 운명을 맞았는지를 말이다. 이 처절한 그림은 실제 일어났던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정대 태운 메두사호... 항해 15일 만에 좌초한 배
이야기는 1816년 6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1814년 맺어진 파리 조약에 따라 영국으로부터 세네갈을 돌려받게 된 프랑스 왕실은 일련의 행정절차를 마무리 지은 끝에 그곳으로 원정대를 보낸다. 프랑스 해군의 구축함 '메두사호'를 필두로, 수송선, 범선 그리고 호위선으로 구성된 원정대의 임무는 이제 공식적으로 프랑스령이 된 세네갈 영토를 영국으로부터 넘겨받아 재건하는 것이었다.
이번 원정대의 핵심 메두사호는 1810년 진수한 구축함으로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군과 수차례 전투를 벌인 경력이 있었다. 이곳 선원들은 대부분 바다에서 잔뼈가 굵었고, 많은 전쟁 경험으로 굉장히 거칠고 난폭했다.
한편 선장 쇼마레(Hugues Duroy de Chaumareys)는 루이 14세 시절 귀족 직위를 얻은 상인 집안 출신이었는데, 프랑스 혁명 당시 영국으로 피신했다가 왕정복고가 이루어짐에 따라 1815년, 프랑스로 돌아와 메두사호의 선장으로 임명된 인물이었다. 그는 지난 25년간 바다에 나가거나 배를 몰아본 적이 없었고, 그랬기에 여러 가지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감각이 무뎌져있을 수밖에 없었다.
선장은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세네갈에 도착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점점 배의 속도를 높여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다른 배들도 그럭저럭 보조를 맞추는 듯 보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세 척 모두 메두사호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뒤처지고 말았다. 이윽고 메두사호는 원정대의 다른 모든 배들과 교신이 끊어져버렸지만, 쇼마레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는 더욱 단시간 내에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정해진 항로에서 벗어나 해안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거리상으로는 분명 육지와 가까이 항해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었지만, 해안가에는 수많은 모래톱과 암초가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에, 자칫하면 배가 좌초할 위험도 적지 않았다. 경험 많은 선원들은 될 수 있으면 해안가에서 멀리 떨어져 항해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선장은 그마저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결국 항해를 시작한 지 15일째 되던 1816년 7월 2일, 메두사호는 지금의 모리타니아 근처, 서아프리카 해안가에 좌초하고 만다. 때는 물의 수위가 최고에 달하던 만조였고, 그 이후로는 물이 점점 빠지고 있었기 때문에, 배를 다시 띄우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선장이 배에 있는 3톤짜리 대포 14개를 버리지 않겠다고 고집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엄청난 돌풍이 불어와 메두사호는 점점 부스러지며 가라앉게 되었다, 이제 배에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곳을 탈출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그러나 문제는 배에 있던 구명보트에는 250명밖에 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400여 명이었기 때문에 그 중 150명 정도가 침몰하는 배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여러 가지 논의가 오가던 중 배에 있는 나무를 활용해 뗏목을 짓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이는 그대로 실행에 옮겨졌다. 가로 7미터, 세로 20미터의 뗏목이 완성되자, 선장과 그 일행은 선원과 이주민들을 대부분 뗏목으로 내몬 채 정작 자신들은 구명보트로 향했다.
이렇게 다급하게 만든 뗏목이 위험천만해 보였는지 17명이나 되는 선원들은 그냥 배에 남아있기를 택했고, 결국 이들을 제외한 총 147명이 뗏목에 오르게 되었다. 한편 구명보트에 탑승한 선장 일행은 대부분 귀족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중에는 당시 세네갈 총독으로 임명된 슈말츠(Julien-Désiré Schmaltz)도 포함되어 있었다.
선장은 모두가 육지에 안전히 도착할 것이라고 뗏목에 탄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총 6대의 구명보트가 서로 호송대를 이루어 뗏목을 끌어주겠다는 것이 선장의 굳은 약속이었다. 그러나 이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상황이 어수선한 틈을 타 구명보트에 탄 누군가가 뗏목과 연결된 밧줄을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뗏목은 거친 바다 위에 홀로 남겨졌다.
뗏목에 남아있는 유일한 식량은 포도주 두 통과 비스킷 한 봉지뿐이었는데, 이마저도 첫째 날 밤에 대부분 바닥나고 말았다. 구명보트에서 멀리 떨어져 약 100km나 떠내려간 메두사호의 뗏목은 이제 사하라 사막 근처에 도달했다. 낮이면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었고, 밤이면 거친 폭풍우가 휘몰아쳤다.
선장과 귀족들만 구명보트에... 남은 사람들은 뗏목에 의지
첫날 밤, 2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자살을 하거나 파도에 떠내려가 목숨을 잃었고, 둘째 날 밤에는 엄청난 폭동이 일어나 무려 60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넷째 날에 이르자 뗏목에 남아있는 사람은 67명밖에 되지 않았는데, 배고픔을 견딜 수 없었던 나머지 인육을 먹기 시작했다. 시체를 바로 뜯어먹는다는 것은 너무 끔찍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인육을 얇게 썰어 밧줄에 걸어놓고 먹기 편하게 바람에 말렸다.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급기야 표류 여덟 번째 날, 일부 생존자들은 병들고 상처 입은 사람들을 뗏목 밖으로 내버리기로 결정했다. 이런 끔찍한 나날들을 보내며 끝까지 목숨을 건진 사람들은 처음 뗏목에 탑승했던 147명 중 겨우 15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은 표류 13일 만에 근처를 지나던 배를 발견하고 엄청난 흥분에 휩싸여 손을 흔들어보았지만, 그것은 허무한 몸짓이 되고 말았다. 그 배가 이 사람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두 시간 후 기적적으로 그 배가 다시 돌아왔고, 이번에는 뗏목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다가왔다. 그 배는 원정대의 일원이었던 범선 아르구스(Argus)였고, 생존자들을 싣고 무사히 세네갈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믿기 힘든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세네갈에 도착한 지 며칠 되지 않아 15명 중에서 5명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며 말로 다하지 못할 참혹한 일들을 겪었던 후유증 때문이었으리라. 이후 끝까지 살아남은 생존자 중 하나였던 외과의사 앙리 사비니(Henri Savigny)가 관계 당국에 이 사건을 증언하게 된다. 조용히 넘어가려던 관계 당국의 바람과 달리 이 증언은 한 신문사에 유출되었고, 얼마 후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리고 말았다.
이 충격적인 이야기는 일파만파로 퍼져나갔고, 젊은 프랑스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에게까지 들어갔다. 유명해지고 싶었던 그는 이 사건을 그림으로 남기기로 결정하고 곧 작업에 착수했다. 제리코는 뗏목에서 살아남은 10명 중 2명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고, 몇몇 의사들을 설득해 시체의 일부를 얻어 썩어가는 인체의 색을 관찰하는 등 차근차근 필요한 준비를 해나갔다.
평소에도 어두운 주제로 곧잘 그림을 그리곤 했던 제리코는 이번엔 아예 작정한 듯 머리를 깎고 작업실에 틀어박혀 새로운 작품에 몰두했다. 결국 1818년 시작된 이 작업은 총 8개월, 준비과정까지 포함하면 18개월만인 1819년 끝을 맺었다.
이제 다시 루브르 박물관. 제리코의 그림 '메두사호의 뗏목'을 더욱 찬찬히 들여다본다. 시신조차 제대로 회수할 수 없었을 메두사호의 유족들은 얼마나 참담한 심정이었을까? 선장은 법적 책임을 졌을까? 제대로 된 진상규명과 보상은 이루어졌을까?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모든 절차가 그렇게 원만하게 진행되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다.
메두사호와 세월호, 의외로 많은 공통점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들여다보면 볼수록 생각나는 배가 또 하나 있어서다. 지금으로부터 1년하고도 3개월 전 한국에서 좌초되었던, 그 배의 이름은 세월호다. 메두사호와 세월호. 서로 견주어보면 의외로 많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첫째는 바로 선장의 무책임함이다. 두 배 모두 침몰 당시 선장의 초기대응이 적절치 못했고, 이후에도 사건을 수습하기는커녕 승객과 선원들을 위험으로 내몬 채 본인의 안위만을 챙기는, 그런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두 선장 모두 총책임자로서의 역할을 망각한 채 제 한 몸 살겠다고 다른 모두를 져버리는, 결코 해서는 안 될 선택을 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이런 1차적인 책임이 선장을 포함하여 배 '안'의 실권을 쥐고 있는 자들에 있다면, 2차적인 책임은 배 '밖'의 실권을 쥐고 있었던 관계당국, 더 나아가서는 이런 관계당국이 속한 무능한 국가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일종의 권력비리라고 볼 수밖에 없는 쇼마레의 선장 임명, 세월호사건 당시 드러난 해운업계의 관경유착(官經癒着). 그리고 그 속에서 죽어나간 수많은 무고한 생명들. 제대로 된 구조작업조차 하지 않은 채 서로 책임을 회피하고, 최대한 빨리 사건을 덮거나 무마하려는 권력자들. 이것이 우리의 국가요 권력기관이다.
메두사호가 침몰한 지 어느덧 2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는 19세기 프랑스와 비교해 분명 사회와 제도 그리고 기술적인 측면에 있어서 전반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한 번 거꾸로 생각해보자. 배에 탑승한 400여 명 가운데 총 148명이 목숨을 잃은 메두사호, 마찬가지로 배에 타고 있던 476여 명 가운데 295명이 사망하고 9명이 실종된 세월호, 과연 발전된 현대문명과 기술이 무엇을 더 나아지게 했단 말인가. 구조작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수많은 의혹이 남아있는데 명확한 진상규명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작금의 현실이 과연 200년 전에 비해 무엇이 나아졌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아직도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한 9명의 실종자들,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진상규명. 이제는 서서히 잊혀가고 있을, 그렇지만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세월호 참사. 루브르에서, 고작 나만한 아이들이 수없이 죽어나간 그 끔찍한 사고를 생각하며, 2014년 어느 날 광화문 광장에서 보낸 그 차디찬 밤을 떠올리며,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