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뇌물수수와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징역 30년을 구형한 박근혜 전 대통령의 1심 판결이 6일 선고됐다.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해 징역 24년과 벌금 180억원을 선고했다. 이날 선고는 사상 초유의 현직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진 국정 농단 게이트의 전모가 1차적으로 가려지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평범한 시민들이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울 수 밖에 없던 이유를, 박 전 대통령이 법의 심판을 받게 된 배경을 ㄱ부터 ㅎ까지 사전 형식으로 정리했다. 더이상 이러한 ‘흑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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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춘
‘나쁜 사람’들을 찍어내고 진박(진실한 친박)을 감별했던 그에게도 김기춘 전 비서실장은 ‘좋은 사람’이었다. 두 사람의 인연은 한국 현대사와 궤를 같이한다. 김 전 실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어머니 육영수씨의 이름을 딴 정수장학회 출신이고, 유신헌법 제정에 기여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 때는 ‘박근혜 후보 경선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을, 2013년에는 재단법인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의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
2014년 10월28일 오후 국회 운영위원회 회의실에서 열린 대통령비서실등에 대한 국정감사에 참석한 김기춘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 생각에 잠겨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김 전 실장은 대를 이어 박 전 대통령에게 충성했다. ‘왕실장’, ‘기춘 대원군’ 등으로 불리며 박근혜 정권의 2인자로서 국정의 핵심 역할을 담당했고, 국민들로부터 지탄을 받았던 박근혜 정부의 국정 운영 곳곳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고 김영한 청와대 민정수석의 ‘비망록’으로 “문화예술계 좌파 책동에 투쟁적으로 대응”등 시대착오적인 김 전 실장의 지시가 드러나기도 했다.
이런 그를 박 전 대통령은 어떻게 평가했을까. 박 전 대통령은 2015년 1월12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가진 신년 기자회견에서 김기춘 실장의 교체 가능성을 묻는 말에 대해 “우리 비서실장께서는 드물게 사심이 없는 분이고, 가정에서도 어려운 일이 있기 때문에 자리에 연연할 이유가 없음에도 옆에서 도와주셨다”고 말했다.
‘최순실씨 국정농단’에 대해 “몰랐다”고 일관한 김 전 실장은 결국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작성·운용하라고 지시한 혐의 등으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지난 1월 항소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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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람
‘나쁜 사람’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캐릭터와 국정운영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표현이다. 그에게 나쁜 사람은 누구였을까. 원조는 문화체육관광부 노태강 전 체육국장(현 문체부 제2차관), 진재수 전 체육정책과장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2013년 8월 유진룡 문체부 장관 등을 청와대 집무실로 부른 자리에서 ‘수첩을 꺼내’ 문체부 노태강 국장과 진재수 과장의 이름을 언급하며 ‘나쁜 사람’이라고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는 익히 알려진 대로 지극히 사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이들이 승마협회 감사 보고서에 최순실씨의 측근인 박원오 전 승마협회 전무에 대해 부정적인 내용을 담았기 때문이다.
‘나쁜 사람’의 시작은 미약했지만 끝은 창대했다. 박근혜 청와대는 정부 정책에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세력들에게 모조리 ‘나쁜 사람’이란 낙인을 찍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통합진보당 해산 등에서 보듯 일단 박 전 대통령에게 ‘나쁜 사람’으로 찍히는 순간 전방위적인 탄압이 이뤄졌다.
하지만 이제 국민들은 알고 있다. 진짜 나쁜 사람이 누군지. ‘원조 나쁜 사람’ 노태강 전 국장은 현재 문체부 2차관을 맡으며 ‘복권’됐고, 박근혜 정부 시절 블랙리스트로 찍혀 활동을 접었던 이들도 다시 날개짓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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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박 전 대통령 집권 초반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 의혹은 정권의 정당성마저 흔드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는 2012년 대선 기간 중 국가정보원 소속 심리정보국 요원들이 포털사이트와 커뮤니티에 특정 정치인을 비방하는 댓글을 달고 여론에 개입했다는 의혹으로, 국가기관이 특정 세력을 위해 전방위적으로 움직였다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박 전 대통령 집권 중반기까지 ‘뜨거운 감자’로 논란이 됐다. 국정원 댓글 사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 축소 의혹, ‘혼외자 의혹’ 채동욱 전 검찰총장 찍어내기 논란 등으로 이어졌고, 당시 야당은 강하게 반발하며 여의도 정치도 급격하게 얼어붙었다.
지난해 국정원 적폐청산 티에프는(TF)는 이명박 정부 시절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2009년 5월~2012년 12월까지 알파팀 등 민간인으로 구성된 ‘사이버외곽팀’ 30여개를 운영해 여론에 개입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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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저
새누리당(자유한국당) 인사들 사이에서 박 전 대통령에게 “레이저 빔을 맞았다”는 기억은 심심치 않게 나온다. 이는 박 전 대통령이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들었을 때 매서운 눈빛을 쏘아붙이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마저 박근혜 전 대통령으로부터 승마 지원과 관련해 질책을 받은 후 대통령의 눈빛이 ‘레이저빔’ 같았다고 말했다는 진술이 재판과정에서 나오기도 했다.
박 전 대통령의 레이저는 ‘불통’과 권위주의 리더십으로 대표되는 그의 국정운영 방식을 드러내는 단면이었다. 여당인 새누리당은 거수기로 전락했고, 박 전 대통령과 각을 세웠던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현 바른미래당 공동대표), 진영 보건복지부 장관(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사실상 쫓겨나는 방식으로 밀려났다. 즉 그의 레이저에 측근들은 침묵을 지켰고, 반대 세력은 ‘찍어내기’를 당한 것이다. 전형적인 ‘불통 군주’의 리더십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광화문 광장을 가득 채운 평범한 시민들의 매서운 눈빛을 맞닥뜨려야 했다. 박 전 대통령은 자신이 매섭게 바라봤던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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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스
박근혜 정부는 국가적 재난 앞에서 무기력했고, 무책임했다. 2015년 메르스 사태 역시 마찬가지다. 당시 박근혜 정부는 ‘뒷북·무기력 대응’으로 여론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반성이나 사태 수습보다 브이아이피(VIP·박근혜 전 대통령) 비판 여론 대응에만 골몰한 것으로 이후 드러났다. 지난해 10월26일 이재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공개한 2015년6월19일 대통령 비서실장 주재 수석비서관회의 ‘비서실장 지시사항 이행 및 대책(안)’을 보면, 이병기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은 “메르스 사태를 틈타 온라인 사이버상에서 브이아이피 행보를 폄훼하는 내용이나 억지 주장이 있다고 하는 데 포털에 협조 요청해서 지나친 것은 제어할 필요가 있으며 만약 법 위반 사례 있을 경우 의법 조치할 것”이라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박 전 대통령이 2015년 6월14일 서울대병원 메르스 치료 격리병동을 방문했는데 당시 의료진과 통화하는 박 전 대통령 앞쪽 벽에 붙어 있던 종이에 쓰인 ‘살려야 한다’ 문구가 화제가 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누리꾼들은 이를 합성사진 등으로 패러디해 정부의 무기력한 대응을 꼬집었다. 결국 역사에 기록된 건 씁쓸한 촌극이다. 당시 ‘살려야 한다’ 사진은 ‘연출’이었다는 증언이 나중에 나왔기 때문이다. 누리꾼들의 패러디를 보도한 언론사에 정부광고 게재를 제외했다는 논란도 불거졌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5년 6월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 메르스 환자 치료병원을 찾아 격리병동 상황을 모니터로 지켜보며 의료진과 통화를 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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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상의 정상화
‘비정상의 정상화’는 박근혜 정부의 대표적인 국정과제다. 기존의 관행이나 악습을 바꾸겠다는 취지였지만 ‘정상화’라는 표현을 꺼내든 순간, 우리 사회 대부분이 비정상적인 것들로 바뀌었다.
일단 이는 규제완화와 혁신 등으로 포장돼 국정 운영에 반영됐다. 문제는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이 대단히 자의적이었고, 자신의 반대세력을 배제하고 지지 기반을 결집시키는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됐다는 것이다.
일단 박근혜 정부는 비정상으로 규정된 것들은 불도저처럼 밀어붙였다. 박 전 대통령은 정부 규제를 ‘원수’와 ‘암덩어리’ 등 극단적인 표현으로 비정상으로 규정했고, ‘경제 살리기 법’이라고 규정한 외국인투자촉진법(외촉법), 기업활력제고를위한특별법(원샷법) 등의 법안을 밀어붙일때 이를 반대하는 야당을 경제 살리기를 막는 세력으로 몰아붙였다. 국민 다수가 반대했던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붙인 것도 '비정상의 정상화’의 연장선상이었다.
그는 2015년 11월10일, 국무회의에서 “자기 나라 역사를 모르면 혼이 없고, 잘못 배우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생각하면 참으로 무서운 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 결국 ‘혼’까지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하는 시대에 국민들이 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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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세월호 참사를 대하는 박근혜 정부의 태도는 오로지 참사의 책임론이 자신들에게 번질까 전전긍긍하며 이를 차단하고, 회피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구조에 무능했던 박근혜 정부는 생떼 같은 아이들을 잃은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손을 내미는 대신 동향 정보를 수집했고. 보수단체를 동원해 진상 규명 반대 시위를 독려했다. 지난해 11월 국가정보원 개혁발전위원회는 ‘국정원 적폐청산 태스크포스(TF)’가 조사한 ‘국정원의 세월호 여론조작 및 사찰 의혹’ 조사를 심사한 결과, “국정원 국내정보부서가 (세월호 참사 직후인) 2014년 5월부터 2015년 7월까지 세월호 사고 관련 보수단체 집회 동향과 각계 세월호 관련 여론을 파악해 국정원 지휘부와 청와대에 보고한 사실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46일간 단식한 세월호 유가족 김영오씨의 동향을 수집하고, 극우단체인 ‘어버이 연합’의 세월호 규탄 집회를 돕는 등 세월호 관련 여론전에 개입했다는 정황이다. 당시 국정원은 청와대에 “세월호 집회가 과격시위로 변질될 수 있다”, “유사 안전사고 되풀이시 대정부 투쟁 재점화 불씨로 작용할 소지가 있다” 는 등의 보고를 올리며 정권 안위에만 신경을 썼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났다.
진상규명을 위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두고는 진상조사위원회의 수사권·기소권 보유 여부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여당인 새누리당을 앞세워 법안 처리에 수시로 제동을 걸었다. 당시 유가족들은 거리와 국회앞에서 풍찬 노숙을 하며 눈물을 삼켜야 했다.
김장수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청와대는 재난 컨트롤 타워가 아니다”고 거듭 청와대 책임론을 회피했고, 후임인 김관진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2014년 7월 정해진 절차를 거치지 않고 ‘청와대 국가안보실이 재난상황의 컨트롤타워’라고 규정된 국가위기관리지침 내용을 삭제했다.
박 전 대통령은 이토록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과 정부 책임론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을까. 최근 검찰 수사결과를 보면 박근혜 청와대가 세월호 진상규명과 대통령의 세월호 7시간 의혹을 방어하는데 총력을 기울인 이유가 일정 부분 드러난다. 검찰의 수사결과를 보면, 결국 박 전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의 골든타임이 지나 첫 보고를 받았고, 수시로 보고 받았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김장수 전 국가안보실장이 세월호 참사 보고를 위해 두차례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 않았고, 결국 안봉근 전 청와대 제2부속비서관이 침실 앞까지 가 대통령을 불러, 그제야 침실 밖으로 나왔다고 검찰은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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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체이탈
박 전 대통령은 취임 전에는 침묵하거나 필요할 때만 ‘한 마디’를 던지는 것으로 유명했다. 전여옥 전 의원은 이를 ‘베이비 토크’(아기의 옹알거림)에 비유하기도 했다. “밑천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대전은요?’, ‘참 나쁜 대통령’ 등 짧은 단문으로 이야기했고 대부분의 경우는 침묵 전략을 고수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은 국정 모든 현안에 발언 해야 하는 존재다. 결국 그의 밑천은 ‘유체이탈 화법’으로 낱낱이 드러났다. 박 전 대통령의 발언은 상황에 맞지 않거나 잘못된 비유, 비문, 공감력 부족 등이 두드러졌다. 유체이탈 발언은 집권기간 내내 이어졌고, 국민들은 ‘박근혜 번역기’가 필요하다는 ‘웃픈 드립’을 할 수밖에 없었다.
◎ 2015년 메르스 대응 민관합동 긴급점검회의
“그동안의 여러 문제점에 대해 국민의 불안함 속에서 어떻게 확실하게 대처방안을 마련할지 이런 것을 정부가 밝혀야 합니다.”
◎ 2015년 6월5일 메르스 관련 병원 환자 방문
“여기 계시다가 건강하게 나간다는 것은 다른 환자들도 우리가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의미죠?”
◎ 2014년 4월15일 세월호 참사 1주년 관련 회의
“간첩도 그렇게 국민이 대개 신고를 했듯이, 우리 국민들 모두가 정부부터 해가지고 안전을 같이 지키자는 그런 의식을 가지고, 신고 열심히 하고..”
◎ 2015년 10월 22일 청와대 여야 지도부와 대통령 5자 회동
“(역사교과서) 전체 책을 다 보면 그런 기운이 온다”
그의 유체이탈 화법은 국정 운영과 일맥상통했다. 주어가 술어가 불일치 하고,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고 책임소재도 불분명하다. 박근혜 정부가 내세웠던 ‘창조경제’는 집권 내내 관련 부처 공무원들도 ‘감’을 잡지 못했고, 집권 기간 벌어진 각종 재난의 책임에 청와대는 언제나 애매한 태도로 일관했다. 국민들은 국정 농단 사태가 벌어진 뒤에야 박 전 대통령의 유체이탈 화법의 이유를 확인하게 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6년 10월25일 청와대에서 '연설문 유출 의혹'에 대해 대 국민 사과를 한 후 인사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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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대한민국의 청년이 텅텅 빌 정도로 한 번 해보세요. 다 어디 갔냐고, ‘다 중동 갔다고” (주변 웃음)
2015년 3월19일 청와대에서 주재한 무역투자진흥회의에서 박 전 대통령이 우스갯소리를 담아 던진 이말에 청년들은 분노했다. 중동 순방 성과를 알리려는 취지였지만 박 전 대통령의 문제로 지적되는 공감능력 부족, 권위주의 시대에 머무른 사고 등이 모두 드러난 발언이라는 평가가 따랐다.
일단 이 발언의 시기부터 안좋았다. 박 대통령 발언은 15~29살 청년실업률이 1999년 7월 이후 최대치(11.1%)라는 통계청 발표 다음날 나온 것이다. 사상 최악의 취업난에, ‘헬조선’,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 등의 자조적인 신조어가 흉흉하게 떠돌던 당시 현실과 동떨어진 발언에 청년들은 ‘불통’을 읽었다. “니가 가라 중동”, ”일자리 만들 생각을 해야지 청년들에게 중동으로 가라니 제정신인가” 같은 비판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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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과 친박
최순실씨는 박 전 대통령의 시작과 끝이었다. 문제는 박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 들어와서도 최씨에게 모든 것을 의존하며 불거졌다. ‘비선실세’, ‘국정 농단’ 이란 낡은 단어 앞에 우리 사회가 송두리째 흔들렸고, 현직 대통령의 탄핵이라는 초유의 결과로 이어졌다. ‘친박’으로 불린 정치인들은 “최순실씨를 몰랐다” 거듭 항변하며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다. 일부 친박들은 태극기를 몸에 두르고 거리에서 ‘박근혜 무죄’를 외치고 있다.
1979년 6월 10일 한양대학교에서 열린 ‘제 1회 새마음 제전’. 이 행사에 당시 박근혜 새마음 봉사단 총재가 깜짝 방문했고, 최순실씨가 수행했다. 박 전 대통령의 나이 27살, 최순실씨의 나이 23살이었다. 이명박 당시 현대건설 사장도 눈에 띈다. 이들은 모두 최근 검찰에 기소되거나, 기소 뒤 재판을 받고 있다. <뉴스타파>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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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터칼
커터칼 테러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불행한 사건이었다. 2006년 5월20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오세훈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 선거 유세장에 지지방문했던 박 전 대통령은 50대 남성이 휘두른 15㎝ 길이의 문구용 커터칼에 얼굴을 다쳐 병원에서 수술 받았다.
박 전 대통령에게는 잊고 싶은 사건이지만, 친박 정치인들과 지지자들은 이를 ‘박근혜 신화’를 완성하는데 사용했다. 당시 병상에서 “대전은요?”라고 지방선거 판세를 물었다는 일화가 공개되며, 동정여론이 일었고, 한나라당은 이를 선거에 활용해 지방선거에서 압승했다. 이는 박 전 대통령에게 ‘선거의 여왕’이란 수식어가 붙을 때 언급되는 사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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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대박
박 전 대통령 당선 초기 남북 관계가 개선될 것이라는 조심스런 기대가 정치권 안팎에서 나온적이 있다.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인 2002년 5월 방북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만나기도 했다. ‘색깔론’에서 자유로운 그가 남북 관계 개선에 힘을 쏟으면 그 어느 정권보다 힘을 받을 것이라는 관측이었다. 실제로 박 대통령은 ‘통일 대박론’을 꺼내들며 이러한 기대를 높이기도 했다.
하지만 경제적 관점에서만 접근하고, 교류와 협력을 배제한 그의 ‘대박론’은 이명박 정부부터 이어온 경색된 남북관계를 더욱 얼어붙게 했을 뿐이다. 통일 대박론이 나온 이후에도 정부의 대북정책은 ‘대결 국면’으로 일관됐고 남북간 군사적 긴장은 좀처럼 완화되지 않았다. 그는 끝내 남북의 경제적 교두보로 마련된 개성공단마저 폐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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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레이디
“소탈한 생활, 한 인간으로서의 나의 꿈, 이 모든 것을 집어던지기로 했다. 이왕 공인으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될 운명이라면 적극적으로 나서기로….”(1974년 11월 10일 일기)
어머니 육영수 여사를 잃고 22살 박근혜가 쓴 일기다. 그는 그때부터 사실상의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고, 당시 일기에 쓴 ‘결심’은 대통령 박근혜의 동력이 됐다.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다. 정치인 박 전 대통령이 ‘아버지의 명예회복’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문제를 야기했다는 평가가 나오기 때문이다.
◎1997년 12월 대통령 선거 직전 박근혜 한나라당(자유한국당) 입당 기자회견
“60∼70년대 국민이 피땀 흘려 일으킨 나라가 오늘 같은 난국에 처한 것을 보면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이 나 목이 멜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이러한 때 정치에 참여해 국가를 위해 기여하는 것이 부모님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한다.”
친박 정치인들은 “박근혜 후보가 정치하는 이유는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한 것이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는 실제로 그의 국정 운영까지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2007년 대선후보 경선 때 그는 “5·16은 구국의 혁명”이라고 말하며 시대정신과 동떨어진 역사관을 보였고, 대통령이 되서는 흑백사진 속 새마을 운동을 다시 꺼내는 등 ‘박정희 부활’에 공을 들였다. 유신헌법을 기초했던 김기춘을 청와대 비서실장에 앉히며 유신 시절의 리더십을 부활시켰다. 아예 역사교과서를 고쳐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시도도 했다.
퍼스트레이디라는 그의 이력은 열혈 지지자들에게는 눈물을 자아내는 소재였지만, 우리 사회와 대다수 국민들에게는 민주주의가 퇴행하고, 역사를 되돌리는 비극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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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
2011년 부산고검장을 끝으로 옷을 벗은 황교안 전 국무총리는 2013년 박근혜 정부 출범과 함께 법무부 장관으로 기용됐고 이후 국무총리를 맡는 등 박근혜 정부에서 승승장구했다. 뒤집어보면 박근혜-최순실 체제의 ‘내부자들’로 지목된다. 실제로 그는 박 전 대통령의 아끼는 ‘칼’이었다.
박 전 대통령 집권 초기 불거졌던 국가정보원 정치 개입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 축소 의혹과 채동욱 전 검찰총장 찍어내기 의혹 등에 황교안 당시 법무부 장관의 이름은 계속 오르내렸다. 2014년 말 법무부 장관 재직 시절, ‘정윤회 문건 유출사건’에서 우병우 당시 청와대 민정비서관과 함께 국정농단 관련 사건의 수사를 축소·은폐 하려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또 통합진보당 정당 해산에 총대를 메기도 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소추안 가결로 권한대행을 맡은 황 전 총리는 국정농단을 수사하던 ‘박영수 특검’의 청와대 압수수색과 수사기간 연장에 제동을 걸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최순실씨에 대해 “지라시를 통해 최순실 이름이 나와서 알고 있을 뿐”이라고 국정농단 내부자라는 비판에 선을 그은채 ‘자연인 황교안’으로서 바삐 움직이고 있다.
그는 지난달 29일 저녁 ‘청년중심 정치개혁 K-Party’가 주최하는 ‘청년 멘토링 토크 파티’에 그는 연사로 참여해 2016~2017년 탄핵 정국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 시절의 일을 회고하며 “당시 국무위원들이 똘똘 뭉쳐 나라의 위기를 헤쳐 나갔다. 주변의 전문가들로부터 권한대행의 권위와 역할 등을 자문 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청중과 일일히 사진을 찍었고, 그는 양손으로 하트 모양을 만드는 포즈를 취하기도 했다. 강연장에는 ‘안보대통령 황교안’, ‘자유통일대통령 황교안’등의 문구가 쓰인 종이가 붙어있었다. 한때 서울시장 후보에도 이름이 오르내리는 등 그가 ‘정치적 꿈’을 이어가고 있다는 관측은 계속 되고 있다.
2013년 9월17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 뒤로 황교안 당시 법무부 장관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7년 8월25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구치감 입구로 들어가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