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거짓을 숨기는 ‘익명성’
ㆍ뉴스 소비자의 ‘확증편향’
“박원순, 차라리 스케이트장이나 개장할 걸” “촛불집회 중국 유학생 동원”.
지난 18일 친박단체가 주도한 박근혜 대통령 탄핵반대 집회가 열린 서울 덕수궁 대한문 곳곳에는 ‘노컷일베’ ‘뉴스타운’ ‘프리덤뉴스’ 등의 제호가 붙은 신문 형식의 전단이 배포됐다. ‘노컷일베’ 1면엔 “박원순, 차라리 관광명소인 스케이트장이나 개장할 걸”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탄핵반대 집회가 열리는 서울광장에 스케이트장을 개장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는 박 시장이 하지 않은 말을 인용부호 안에 넣어서 쓴 이른바 ‘가짜뉴스’였다.
‘뉴스타운’ 2면에는 “종북의 광기 문재인의 혁명”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는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지난해 12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탄핵 기각되면 혁명밖에 없다”고 한 발언을 비판하며 촛불집회 현장에 국내 중국인 유학생이 대대적으로 가세했다는 내용을 넣었다. ‘촛불집회 중국 유학생 동원’은 확인되지 않은 ‘설’로 일부 보수세력에서 제기된 것이지만 사실인 것처럼 써 가짜뉴스 논란에 휩싸였다.
■ 특검도, 헌재도, 연예계도 가짜뉴스 골머리
최근 가짜뉴스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수사 중인 박영수 특별검사팀과 박 대통령 탄핵심판이 진행 중인 헌법재판소에 집중되고 있다. 지난 8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박영수 특검이 여기자 성추행으로 1999년 9월 징계 처분을 받았다’는 내용의 뉴스가 떠돌았다. 법무부는 “박 특검이 검찰 재직 시절 성범죄로 수사나 징계를 받은 사실이 없다”고 밝혔다. 한 보수성향 매체는 윤석열 수사팀장이 4년 전 성추문으로 1개월 정직 처분을 받았다고 보도했는데 이 역시 사실과 다르다. 윤 팀장은 ‘국가정보원 댓글사건’ 수사 당시 윗선에서 부당한 지시가 있었다며 항명했다 징계처분을 받았다.
‘박한철 전 헌재소장, 박 대통령 탄핵 소추가 위헌’이란 기사도 나왔다. 박 전 소장이 한 적 없는 말이 직접 인용된 기사다. 헌재·특검을 둘러싼 가짜뉴스들은 대부분 수사 대상자나 박 대통령에게 유리한 내용들이다.
가짜뉴스가 기승을 부리는 데는 연예계도 예외가 아니다. 최근 가장 화제가 된 것은 배우 김수현씨와 걸그룹 원더걸스 출신 안소희씨의 결혼설이다. 사설 정보지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가짜뉴스는 중국 매체에 보도되기까지 했으나 사실이 아니다. 방송인 유재석씨도 중국발 가짜뉴스의 주인공이 됐다. 지난 10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SBS <런닝맨>의 팬미팅에 유씨가 참여한다는 뉴스가 돌았다. 하지만 유씨는 이미 행사 불참을 공지한 상태였다. 확인 결과 현지 업체가 유씨에게 위임장을 받아 출연 계약을 했다는 허위사실을 유포한 가짜뉴스였다.
■ 기자 이름 없는 기사가 대부분
가짜뉴스(페이크 뉴스)는 지난해 미국 대선을 기점으로 논란이 커졌다. 뉴욕타임스가 ‘페이크 뉴스와의 전쟁’이란 표현까지 쓸 정도로 가짜뉴스의 영향력은 컸다. 한국에선 탄핵 국면이 시작되면서 지난해 말부터 활개치기 시작했다.
국내외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가짜뉴스의 요건은 조작성·의도성·형식성·스트레이트성 네 가지다. 스트레이트성이란 사실관계를 다루는 것을 뜻한다. 이 네 가지 요건에 따르면 가짜뉴스는 조작 의도를 갖고 사실관계를 거짓으로 전달하는 기사를 말한다. 하지만 정식 언론사가 아니라 SNS를 통해 유포되는 기사 형태의 ‘거짓말’도 가짜뉴스로 불리고 있어 가짜뉴스의 정의를 둘러싼 논의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당장 가짜뉴스 논란에 휩싸인 이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프리덤뉴스’ 김기수 대표이사는 “뭐가 진짜이고 가짜인지는 국민들이 판단한다”며 “정의와 진실을 말로만 떠드는 게 아니라 팩트와 오피니언을 전달하는 우리가 진짜 뉴스”라고 주장했다. ‘뉴스타운’ 윤모 차장 역시 “우리는 가짜뉴스가 아니다”라며 “우리가 보도한 ‘촛불집회에 중국 유학생 동원’ 기사는 이미 보도된 동아일보나 중앙일보 기사를 인용한 것”이라며 “그렇다면 동아일보도 가짜뉴스라고 해야지 왜 우리만 가짜뉴스라고 하느냐”고 말했다.
가짜뉴스의 생산자는 대부분 확인이 불가능하다. 일부 집회 현장에서 배포돼 가짜뉴스 논란을 일으킨 기사에도 ‘바이라인(기자 이름)’이 없다. 또 가짜뉴스는 대부분 SNS를 통해 유통되기 때문에 작성자를 특정하기 어렵다. 익명성이 진짜 뉴스와 다른 가짜뉴스의 특징 중 하나다.
지난 미 대선에선 페이스북과 구글이 가짜뉴스의 유통 경로로 지목됐다. 한국에서는 카카오톡과 네이버 밴드 등 메신저 대화방이 주요 유통경로로 활용된다. 가짜뉴스는 온라인 문화가 낳은 현상인 셈이다. 최진봉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최근 가짜뉴스의 확산 통로는 SNS나 포털사이트 등 인터넷 매체들”이라며 “내용이 자극적일수록 확산될 확률은 높아진다”고 말했다.
■ 정치적 목적 다분, 기존 미디어 불신도 한몫
흥미·오락성 가짜뉴스도 있지만 최근 논란이 된 가짜뉴스들은 대부분 정치적 목적에 의해 생산된 것이다. 특히 탄핵 국면이 종착지를 향해 가면서 일부 가짜뉴스는 정치세력 결집의 주요 수단으로 활용된다는 주장도 있다. 김석호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현 상황에서 극우세력은 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든지 현실을 부정해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 있다”며 “가짜뉴스는 이들이 지지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에 대한 믿음을 철회하지 않게 만든다”고 분석했다.
가짜뉴스가 기승을 부리게 된 데는 기존 주류 미디어에 대한 불신도 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 9일 전인 지난달 11일(현지시간) 열린 기자회견에서 CNN, 뉴욕타임스 등의 기자들과 언쟁을 벌였다. 그는 CNN 기자의 질문을 차단하며 “당신들은 가짜뉴스다”라고 쏘아붙였다. 안명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인터넷보도심의위원회 심의팀장은 “기성 언론의 신뢰도가 낮아지는 사회적 환경이 가짜뉴스의 확산을 불러왔다”고 말했다. 지난해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영국 옥스퍼드대 부설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와 함께 진행한 설문조사를 보면 한국인의 언론 신뢰도는 조사 대상 26개국 중 23위를 차지할 정도로 낮았다. 민영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는 “가짜뉴스가 제도언론에 대한 불신에서 발생했지만 기존 언론을 따라가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가짜뉴스가 계속 공급되는 것은 이를 소비하는 층도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사람들이 가짜뉴스를 찾는 이유를 ‘확증 편향’으로 설명한다. 확증 편향은 자신의 주장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정보는 무시하는 경향을 말한다. 황용석 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뉴스를 소비할 때 사람이 지니는 주목의 양은 한정적인 데 비해 정보는 너무 많기 때문에 자신과 유사한 의견을 보여주는 뉴스를 선택할 경우가 많다”며 “자신의 정치성향과 유사한 소식을 원하다 보니 가짜뉴스를 찾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온라인이라는 플랫폼이 새로운 것일 뿐 가짜뉴스는 이미 과거부터 만연했다”면서 “자기가 원하는 정보만을 보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며 이 본능이 상업적·정치적 목적과 부합할 때 가짜뉴스가 판을 치게 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