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렬 in 싱가포르] "우리가 널 보고 있다".. 민간 자원봉사자들의 활약
[이봉렬 기자]
2017년 12월 싱가포르 지하철 역에서 한 30대 남성이 에스컬레이터에서 여성의 뒤를 따라가며 치마 속을 촬영하다가 지나가던 다른 승객에게 들켰습니다. 피해자와 목격자가 그 남성을 경찰에 넘겼는데 조사 결과 그의 휴대폰에는 유사한 동영상 7개가 더 있었고, 127편의 외설 영화도 저장되어 있었습니다.
싱가포르에서는 이런 경우 나이와 이름은 물론이고 직업과 소속된 단체의 이름까지 모두 공개 됩니다. 신문에 실린 그 남성의 직업은 놀랍게도 (혹은 더 이상 놀랄 것도 없이) 한국인 교회의 목사였습니다. 그 남성은 징역 8주를 선고받았고, 징역을 마친 후 한국으로 추방되었습니다. 3년 가까이 지난 일임에도 싱가포르 포털 검색 창에서 "한국인 목사"를 검색하면 이 사건이 제일 첫 화면에 나옵니다.
이처럼 처벌의 수위와 상관없이 신상정보가 다 공개되고 오래도록 기록이 남아서 향후 사회생활에 큰 지장을 받게 되니까 싱가포르에는 디지털 성범죄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습니다.
최근 두 달 동안만 해도 열 건이 넘는 디지털 성범죄가 뉴스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중학생이 교사를 대상으로, 매점 직원이 손님을 대상으로, 대학 강사가 쇼핑몰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전직 교사가 엘리베이터에 탄 학생을 대상으로, 대학생이 기숙사에서 샤워 중이던 다른 여학생을 대상으로…. 디지털 성범죄와 관련해서는 믿을 만한 사람도, 안전한 장소도 없습니다.
한 대학생은 슈퍼마켓에서 몰래 촬영하다가 적발되었는데 휴대폰을 조사해 봤더니 직전 6개월 동안 무려 335명의 여성을 대상으로 469개의 동영상을 촬영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대학 강의실, 실험실, 커뮤니티 센터, 슈퍼마켓 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기회가 될 때마다 촬영을 했습니다. 이 대학생은 죄질이 나쁘다 하여 징역 9개월 3주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사실 싱가포르는 디지털 성범죄를 저지르기가 쉽지 않은 곳입니다. 사람이 많은 곳이라면 어김없이 CCTV가 설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하철 역 구내는 물론이고 객차 안에도 CCTV가 있습니다. 버스 안에도 있고, 엘리베이터 안에도, 거의 모든 상점에도 다 있습니다. 건물 안이라면 CCTV가 없는 곳을 찾는 게 더 어렵고 거리에도 곳곳에 CCTV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기사를 준비하면서 시내 지하철 역 한 곳에 몇 개의 CCTV가 있나 싶어 한 번 세어 보았습니다. 100개까지 세고 너무 많아서 포기했습니다.
게다가 싱가포르에서는 무장한 경찰들이 무리를 이뤄 수시로 순찰을 돕니다. 관광객들 사이에 소문으로만 떠도는 사복경찰들도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릅니다. 그 많은 CCTV와 경찰의 감시를 피해 가며 몰래 사진이나 영상을 찍는 건 정말이지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 어려운 일을 기어코 시도하다가 적발되는 사례가 꾸준히 나오는 걸 보면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유혹도 만만찮은 것 같습니다.
지난해 7월, 싱가포르 경찰은 ROW(Riders On Watch)라 부르는 민간인 감시단을 새로 출범시켰습니다. 경찰 홈페이지에서 개인정보를 입력하고 감시단으로 자원하기만 하면 바로 감시단으로 위촉을 받습니다. 감시단이 되면 경찰로부터 싱가포르 범죄 현황에 대해 지속적으로 정보를 제공받습니다. 하는 일은 간단합니다. 누군가가 몰래 찍는 걸 보게 되면 그 장면을 휴대폰으로 녹화해서 경찰에 바로 보내는 겁니다. 디지털 성범죄 뿐만 아니라 공공장소에서의 성추행, 거리에 세워 둔 자전거를 훔쳐 가는 일 등 모든 범죄 행위를 신고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누구든 그런 범죄 행위를 보면 신고하는 게 당연하지만 이렇게 감시단의 일원으로 위촉되고 나면 한번 더 주의 깊게 보게 되고 다른 사람보다 먼저 신고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지난 일 년 동안 감시단으로 자원한 사람의 수는 4만8000명이 넘습니다. 인구 600만 명이 안 되는 도시 국가에서 4만8000명이면 상당히 많은 숫자입니다.
경찰은 최근 감시단이 지금 활동하고 있으니 범죄를 저지를 생각조차 하지 말라는 광고를 지하철 곳곳에 설치했습니다. 광고 문구가 상당히 직설적입니다.
"우리가 널 보고 있다. WE ARE WATCHING YOU."
CCTV는 어디 있는지 확인해서 피하면 되고, 경찰은 눈에 잘 띄니까 조심하면 되지만, 휴대폰으로 무장한 4만8000 명의 감시단은 어떻게 피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내 주위에 있는 사람 중 누가 감시단인지 모르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부담이 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반대로 딸 둘을 키우는 입장에서는 조금은 안심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게 마냥 좋아할 만한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CCTV가 사람들의 모든 일상을 기록하는 것도 모자라,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를 감시하는 그런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걸 비판하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고 심지어는 그런 것에 의지하고 마음을 놓기도 합니다. 인권 침해에 대한 우려, 보장받지 못하는 사생활, 이웃 간의 감시를 염려해야 하는 각박함에 대해서는 생각도 안 하게 됩니다. 안전이 보장되는 사회를 위해서 개인의 사생활은 어디까지 침해 받아도 되는 건지 판단을 잘 못하겠습니다.
한국은 이런 류의 디지털 성범죄가 얼마나 될까요? 박사방 같은 끔찍한 집단 성폭행 범죄 말고도 매년 6000여 건 이상의 디지털 성범죄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그런 범죄를 저지른 이들은 어떤 처벌을 받았을까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 따르면, 촬영대상자의 의사에 반하여 신체 일부를 촬영하거나 그러한 영상물을 촬영대상자의 의사에 반하여 반포・판매・임대・제공・전시・상영하는 행위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법원에서 이런 중형이 선고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법률신문>이 대법원 양형위원회 산하 양형연구회의 자료를 바탕으로 보도한 바에 따르면 2014년부터 2018년까지 5년간 도촬 범죄의 경우 징역형 49.1%, 벌금형이 48.5%입니다. 하지만 징역형을 받았더라도 대부분이 집행유예로 풀려났고, 실형을 산 경우는 전체 판결 가운데 5.2%에 불과합니다. 열 명 중에 아홉 명은 디지털 성범죄로 잡히더라도 바로 풀려 난다는 말입니다. 싱가포르에서처럼 범죄인의 이름이나 소속, 얼굴이 공개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디지털 성범죄가 장난처럼 벌어지고 있는 게 아닐까요?
앞에서 싱가포르의 사례만 가지고는 "안전이 보장되는 사회를 위해서 개인의 사생활은 어디까지 침해 받아도 되는 건지 판단을 잘 못하겠다"고 했는데, 한국의 실정을 알고 나니 이제 판단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어야 합니다. 디지털 성범죄를 저지른 범인 열 명 중 열 명 모두가 감옥에 가게 되어 디지털 성범죄가 단순한 장난이 아님을 분명히 알게 해야 합니다. 지하철에서도 버스에서도 공중화장실에서도, 아니 여성들의 삶에서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걱정을 덜어 내도 되는 그런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 전까지는 CCTV로 인한 사생활 침해에 대한 걱정 보다는 여성의 안전한 삶에 대한 고민이 먼저인 것 같습니다. 최소한 지금의 한국은 그렇습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