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오전 일본 도쿄(東京) 총리관저.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와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의 첫 대면이 성사됐습니다. 스가 총리가 먼저 악수를 청하자 바흐 위원장이 머뭇거리는 모습이 TV 카메라에 잡혔습니다. 이를 알아챈 스가 총리가 순간적으로 손 모양을 '보'에서 '바위'로 바꿨고, 절묘하게 '주먹 인사'가 성립했습니다.
바흐 위원장이 방일 기간(15~18일) 내내 썼던 의료용 고품질 'N-95 마스크'도 화제였습니다. 일본 누리꾼들은 "그것 봐! 일본이 위험지대라는 걸 알고 있잖아"라는 댓글을 달았습니다. 일본은 하루 확진자가 연일 1천 명을 웃돌아 '3차 유행기'에 들어선 상태입니다. 도쿄올림픽 개최 논의를 하기에는 부적절한 시기로 보입니다. 그런데도 바흐 위원장은 하필 이때, 왜 일본을 찾았던 걸까요?
'개최 확약'에 '관객 입장'까지
일본 마이니치(每日)신문은 17일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바흐 위원장은 일본 방문 전,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는 상태였다"면서 "일본 안에 퍼진 '올림픽 회의론'으로, 개최 열기가 달아오르지 않기 때문"이라고 전했습니다.
실제로 일본 TV아사히가 바흐 위원장 방일 직전인 14일부터 이틀간 전국 남녀 1천881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도쿄올림픽을 예정대로 개최해야 한다"는 응답은 33%에 불과했습니다. '취소'는 31%, '재연기'는 28%에 달했습니다. 다른 언론사 여론조사 결과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스가 총리는 "도쿄올림픽·패럴림픽을 내년 여름(7월 23일~8월 8일)에 반드시 치러내겠다"는 방침을 재확인했습니다. 한발 더 나아가, 경기장에 관람객을 입장시키는 계획까지 언급했습니다. 바흐 위원장은 이에 "도쿄올림픽을 실현하겠다는 결의를 보여줘 마음 깊이 감사하다"면서 "지금 인류는 터널 안에 있지만, 올림픽 성화가 그 터널 끝의 불빛이 될 것"이라고 화답했습니다.
"도쿄 무너지면 다음은 베이징"
바흐 위원장이 속을 태운 건 IOC의 살림이 어려워진 탓이기도 합니다. TV 중계권료와 스폰서 수입은 IOC의 든든한 보루이자 젖줄입니다. 지난 3월, 도쿄올림픽을 '취소'하는 대신에 사상 최초로 '1년 연기'를 선택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특히 도쿄올림픽이 끝나고 불과 6개월여 뒤, 2022년 2월에는 베이징(北京) 동계올림픽이 예정돼 있습니다. IOC 최대 후원사인 전자 상거래 업체 '알리바바 그룹' 등 유수의 중국 기업들이 스폰서로 포진해 있습니다.
하지만 도쿄 하계올림픽 개최가 불발되면 감염 위험이 한층 커질 동계올림픽 개최 여부는 더욱 불투명해집니다. IOC 입장에선 중국 스폰서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 정부 관계자는 이에 "도쿄와 베이징은 같은 동아시아에, 대회 개최 시기도 가까운 '운명 공동체'"라면서 "IOC는 도쿄가 쓰러지면 베이징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바흐, IOC 회장 선거 '코앞'
바흐 위원장은 2013년 9월 IOC 수장이 됐습니다. IOC 위원장 임기는 8년이고, 한 차례 4년 연임할 수 있습니다. 내년이 임기 마지막 해입니다. 재선이 달린 회장 선거는 내년 3월에 있습니다.
바흐 위원장은 앞서 도쿄올림픽 1년 연기 결정 과정에서 줄곧 '정상 개최'를 주장했다 혼쭐이 난 기억이 있습니다. 경기 단체와 선수들로부터 "대회를 연기해야 한다", "강행하면 출전을 포기하겠다"는 항의가 이어져 결국 고집을 꺾은 일입니다.
대회 조직위원회 관계자는 마이니치신문에 "바흐 위원장의 방일 목적은 스가 총리를 만나는 것이 전부였다"면서 "개최국 수장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게 IOC 내 입지를 굳히는 길로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즉, 도쿄올림픽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가 퇴임한 상황에서 스가 총리와 조기 협력관계를 구축해 자신의 위상과 구심력을 되찾으려는 의도였다는 분석입니다.
"결의, 결의, 결의" 강조
바흐 위원장은 '스가의 입'을 통해 도쿄올림픽 개최 흐름을 결정지었습니다. 본인은 오히려 "그런 '결의'(commitment)를 충분히 공유한다". "우리는 일본 편에 서 있다"는 표현 등을 써가며 '거리 두기'를 시도했습니다. 올림픽 일정 변경 권한은 전적으로 IOC에 달려 있는데도 말이죠.
외교가에서 '결의'(commitment)는 '약속' '책무' 확약' 등으로 해석됩니다. 바흐 위원장은 주요 인사를 만날 때마다 이 단어를 반복해 썼습니다. "당신은 올림픽 가치관에 대해 흔들림 없는 지지와 '결의'를 보여줬다"(아베 전 총리)고 했고, "도쿄도의 이런 의욕과 '확약'을 가슴에 새겨 협력해 나가자"(고이케 유리코 지사)고 했습니다. 모리 요시로(森喜朗) 대회 조직위원장과의 공동 기자회견에선 "스가 총리가 의욕과 '확약'을 재차 강조했고, 저 역시 같은 견해임을 확인했다"고 말했습니다.
바흐 위원장은 앞서 올림픽 1년 연기를 결정할 때도 "'코로나19 팬더믹(세계적 대유행)이 가속화하고 있다"는 세계보건기구(WHO)의 견해를 근거로 제시했습니다. 이번에도 도쿄올림픽 개최를 강하게 요구하는 쪽은 일본이고, 자신은 이를 지지하는 역할에 그친다는 인상을 풍겼습니다.
한 일본 언론은 이를 두고 "올림픽 연기에 따른 추가 비용 부담 협상 때 IOC가 일본 정부보다 한층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됐다"면서 "특히 도쿄올림픽 취소 등 예기치 못한 사태가 생겼을 때 그 책임을 줄일 수 있도록 '리스크 관리'까지 한 셈"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황현택 기자 (news1@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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