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6월 10일 한양대학교에서 새마음운동의 일환으로 열린 ‘제1회 새마음 제전’ 행사에 당시 박근혜 새마음봉사단 총재를 최순실씨(왼쪽)가 그림자처럼 수행하고 있다. 화면 갈무리
“이게 나라냐.” ‘헌정 사상 최대의 국기 문란 사건’으로 비화한 최순실 게이트가 정국을 걷잡을 수 없는 수렁으로 빠뜨리고 있습니다. 어떤 공적인 지위도 전문성도 없는 일반인이 대통령의 연설문부터 나라 정책, 국가 기밀까지 쥐락펴락했다는 사실은 충격과 분노를 넘어 허탈감마저 안깁니다. 딸의 입시비리부터 수조원대 ‘창조경제’에 드리워진 음모, 청와대에 포진한 최순실의 사람들까지… 쏟아지는 뉴스를 따라잡기만도 벅찹니다. “상상 그 이상” “막장 드라마를 뛰어넘는다”는 말이 나오는 최순실 게이트, ‘더(The) 친절한 기자들’이 2탄을 전해드립니다.
<한겨레>는 앞서
‘이것만 보면 다 안다, 최순실 게이트 총정리’를 통해 그동안 가려져 왔던 ‘비선 실세’ 최순실(60·최서원으로 개명)씨는 누구이며 어쩌다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게 됐는지 소개했습니다. 기업들의 팔을 비틀어 800억여원을 뜯어내 미르재단·케이(K)스포츠재단을 세웠고, 문화체육관광부를 움직여 초고속 설립허가를 받았으며, ‘창조경제’를 빌미로 정부 예산을 ‘셀프 낙찰’해 쓸어담은 사상 초유의 재단 비리 사태 뒤엔 대통령의 “친구” 최씨가 있었습니다.
‘더 친절한 기자들’은 9월26일 총정리 1탄에서 “앞으로는 청와대의 안종범 정책조정수석의 역할을 살피는 것이 관건이 될 것”이라고 마무리한 바 있습니다. 안종범 수석을 비롯한 청와대 관계자들이 알면서도 이들 재단을 지원했다면,
현직 대통령이 권력을 이용해 조직적으로 기업 돈을 뜯어낸 거대한 비리로 비화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최순실 게이트’가 아니라 ‘박근혜 게이트’라는 얘깁니다.
▶1탄 보러 가기 이것만 보면 다 안다, 최순실 게이트 총정리 1탄
한 달 여가 지난 10월말에 이르러, 마침내 전경련 이승철 부회장은 “재단 모금은 안종범 수석이 지시했다”고 검찰에 털어놓았습니다. 검찰은 11월 2일 안종범 수석을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해 조사할 예정입니다. 칼 끝이 청와대 핵심부로 향해야 할 판입니다. 얼마나 깊게 파고들 지가 이제는 관건이 될 겁니다.
■ ‘박근혜 게이트 막아라’… 새누리당이 전면에 나섰다
이승철 부회장이 ‘자발적 재단 설립’이랬다가 ‘실은 청와대 지시’라고 실토하기까지, 지난 한 달 간(9월26일~10월25일)은 재단과의 연결고리를 끊으려는 청와대와 흔적을 추적하는 언론 간의 맞대결이 팽팽하게 펼쳐진 최순실 게이트의 ‘2막’이었습니다.
사태 초기, 청와대를 위시한 친박계는
“최씨는 대통령 곁에 없다”고 부인합니다. 최씨가 비선이 아닌데, 어떻게 재단 기금 모금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느냐는 논리입니다. 안종범 수석도 “기업에 지시하지 않았다” “최씨를 본 적도 없다”고 부인합니다.
한편 새누리당은 국정감사가 시작된 9월26일엔 유례없는 ‘국감 거부’를 선언합니다. 국감에 재단 관련 증인이 출석하는 것을 막는 한편, 국민들의 관심을 비선실세가 아닌 ‘여야 정쟁’으로 돌리려는 의도였습니다. 심지어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는 느닷없이 단식에 들어가며 카메라를 끌어모았습니다.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해임건의안 통과를 꼬투리 삼았지만, “대통령의 심기를 언짢게 하는 최순실 문제로부터 국민들의 시선을 돌리려는 것”이라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
▶관련기사보기 이정현 단식, 왜 감동보다 조롱이 쏟아졌을까?)
친박계인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9월27일 오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이정현 당대표와 귓속말을 하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여당이 수선을 피우는 동안 청와대와 여당은 우병우 민정수석 비리 의혹, 최순실 게이트를 정리할 시간을 벌었습니다. 9월28일 두 재단과 관련한 문서 자료를 없애라는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
▶[단독] “미르·K재단 문건 모두 없애라” 문서파쇄 증거인멸 ) 29일엔 두 재단 내사를 벌였던 청와대 특별감찰관실을 사실상 ‘해체’해 버렸습니다. (
▶국감 증언 막으려 이석수 이어 특감실 전원 해직 통보) 30일 검찰은 우병우 수석 비리 문제도 ‘혐의없음’ 처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10월2일, 새누리당은 이정현 대표의 단식 종료와 함께 국정감사에 복귀합니다. 사태의 마무리 수순을 밟는다는 관측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최순실 게이트의 파국은 국회가 아니라 다소 엉뚱한 곳에서 닥쳐오고 있었습니다. 바로 최씨의 딸, 승마선수인 정유라(개명 전 이름 유연)씨의 ‘특혜’ 의혹이 불거진 이화여대에서입니다.
■ 분노 기폭제 된 최순실 딸 이화여대 입시비리·학점특혜
이정현 대표가 방문을 닫아걸고 단식에 돌입한 26일 밤, <한겨레>는 또다른 단독보도를 온라인에 공개합니다. <한겨레> 9월27일치 1면에 실린, 최씨가 이화여대에 찾아가 딸의 제적을 경고한 지도교수에게 폭언을 퍼붓고 교체했다는 보도였습니다. (
▶ [단독] 딸 지도교수까지 바꾼 ‘최순실의 힘’ ) 그림자도 밟기 어렵다는 스승을 갈아치우는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2013년 7월19일 경기 과천시 주암동 서울경마공원에서 정윤회·최순실 씨가 딸의 경기를 관람하고 있다. <한겨레>가 찍은 이 사진은 당시까지 언론에 노출을 꺼리는 최씨의 최근 모습을 포착한 유일한 사진이었다. 과천/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박 대통령의 측근이지만 노출을 극도로 꺼렸던 최씨가 권력의 그림자에서 모습을 드러낸 순간은 항상 딸 문제였습니다. 정체 모를 비선이 박 대통령의 인사에 개입하는 거 아니냐는 의혹이 처음으로 크게 불거졌던 2014년 말 ‘정윤회 게이트’ 때도 그랬습니다. 정윤회씨는 최씨의 전 남편(2014년 5월 이혼)입니다. 당시 정윤회·최순실 부부가 대통령과의 친분을 이용해 딸인 정유라씨가 아시안게임 국가대표로 발탁된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정황이 역시 <한겨레> 보도로 널리 알려진 바 있습니다. (
▶관련기사 보기 ‘정윤회 파문’ 총정리 2탄-정윤회 딸 ‘판정 시비’부터 박 대통령 “나쁜 사람”까지 ) 정유라씨는 아시안게임 단체전 금메달에 힘입어 이화여대에 합격합니다. (
▶관련기사 보기 실세 의혹 정윤회와 최순실, 이들의 딸과 말의 비밀 )
딸이 받은 특혜 의혹을 짚는 것은, 부모가 정권 실세로서 휘둘러온 영향력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정윤회씨가 아닌 최순실씨가 비선 실세라는 <한겨레> 보도 이후, 여러 언론이 일제히 정유라씨를 주목한 이유입니다.
수상한 점은 속속 추가로 드러났습니다. 이화여대는 정유라씨의 입학 전 체육특기자 종목을 처음으로 승마까지 확대했고, 원서마감일 뒤에 받은 아시안게임 실적까지 감안해 합격시켰습니다. 입학 1년 뒤 정유라씨가 제적 위기에 놓이자, 체육특기생이 결석하더라도 학점을 주도록 학칙을 개정했습니다. (
▶이대, 최순실 딸 위해 학칙 뜯어고쳤다” )
■ “총장 사퇴” 이대생들의 분노
‘승마특기생’ 문제는 입시비리에 민감한 국민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분분한 뒷말이 나왔습니다. 9월28일 야당 단독으로 열린 국회 교문위 국감에선 이화여대가 최씨의 딸에게 특혜를 제공한 대가로 교육부 재정지원사업에 대거 선정된 것은 아닌지 의혹이 제기됐습니다. (
▶야당 교문위원들 ‘최순실 딸 학점 취득 의혹’ 이대 현장조사 ) 특히 이대생들은 크게 분노했습니다.
이대생들이 들고 일어난 배경을 알려면, ‘최순실 게이트’가 본격화하기 전인 7월 말로 돌아가봐야 합니다. 7월30일, 이화여대에서는 300여명의 학생들이 사흘째 본관 점거농성 중이었습니다. 교육부가 30억원을 지원하는 ‘미래라이프 단과대학’ 사업에 이대가 선정됐는데, 교내 의견 수렴 없이 졸속으로 강행한 것에 항의하며 ‘총장과의 대화’를 요구하고 나선 겁니다. 대학에선 종종 있는 일로, 총장이 학생들을 만나주면 자연스레 대치가 풀리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습니다. 이대 안에 무려 경찰 21개 중대(1600명) 병력이 들이닥쳤습니다.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단순한 학내 갈등을 이유로 이만한 규모의 경찰 병력이 학교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
▶[연합] 이화여대 시위에 경찰 투입… “과잉진압 해외토픽감” ) 이 소식에 분노한 졸업생들마저 시위에 합류합니다. 8월3일 결국 미래라이프 단과대학은 전면 백지화됐지만, 이대생들은 학내에 경찰을 끌어들인 총장은 물러나라고 요구하며 긴 투쟁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교수들까지 물러날 것을 요구하는데도, 최 총장은 끈질기게 버텼습니다.
그런 와중에 대학 쪽이 교육부 지원사업을 따내려고 정유라씨에게 여러 특혜를 줬다는 의혹이 제기됐던 겁니다. 최경희 총장 때 이대는 교육부가 돈을 주는 9개 사업에 응모해 8개를 따냈습니다. “최경희 총장 뒤에 최순실이 있었다!”
(사진) 이대생들은 총장 사퇴 시위와 언론 제보를 이어갑니다.
10월18일 서울 이화여대 교정 곳곳에 학생들이 최순실씨 딸 입학과 학점 특혜 의혹과 관련해 만든 최경희 총장의 사퇴를 촉구하는 내용의 대자보, 인쇄물, 말모형 등이 붙어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 대학·기업·공무원도… 최순실 딸에 ‘벌벌’
10월11일, 이화여대 교수협의회 누리집에 “입학처장이 ‘금메달을 가져온 학생을 뽑으라’며 사실상 정씨를 지목해 뽑으라고 했다”는 입시면접관의 폭로가 올라왔습니다. 12일치 <한겨레> 지면에는 정씨가 계절학기 수업에 제대로 출석하지도 않은 채 학점을 받았다는 보도(
[단독] 최순실 딸 이번엔 이대 의류학과 ‘학점특혜’ 의혹 )가 나왔습니다. 중국 패션쇼에 참여하는 현장학습 수업이었는데, 정씨는 학생들과 따로 비즈니스석을 타고 보디가드를 동행한 채 움직였고 과제도 제출하지 않았습니다. 담당교수인 이인성 교수는 최경희 총장의 오른팔로, 1년여간 무려 55억원에 이르는 정부 지원 연구 프로젝트를 따냈습니다. (
▶정유라 학점 특혜 의혹 교수, 1년 새 정부지원 연구 3건 맡아 )
13일에는 김병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정씨의 ‘엉터리 리포트’를 공개했습니다. “해도해도 안되는 망할새끼들에게 쓰는 수법”같은 비속어를 비롯해, 오타와 비문 투성이인 수준 미달의 리포트로 B학점 이상을 받았습니다. 교수들은 엉망인 리포트에도 맞춤법까지 첨삭을 해주었고, 심지어 첨부파일을 보내지 않았는데도 “잘하셨습니다”하고 답장했습니다. (
▶리포트 곳곳 오탈자…이대 학점 특혜 의혹 )
대학만이 아니었습니다. 공공기관, 대기업이 일제히 비선 실세의 딸을 위해 움직였습니다. 대한체육회는 정씨의 훈련 일정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은 채 훈련 수당을 지급했습니다. (
▶[JTBC] 최순실 딸, 승마 국가대표 훈련 ‘이상한 일지' ) 한국마사회는 정씨 한 명을 위해 독일에 승마감독을 파견 보내 나랏돈으로 ‘황제 교습’을 해주었습니다. (
▶[경향] 최순실씨 딸 정유라씨 승마관련 의혹 끊이지 않는 까닭은 ) 국내 기업이 정 선수가 훈련할 수 있도록 독일의 승마장을 인수해 제공했다는 보도도 나왔습니다. (
▶[JTBC] ‘삼성 인수설' 독일 승마장, 모나미 측이 구입 )
공무원도 ‘파리 목숨’이었습니다. 10월12일치 <한겨레> 1면은
‘이 사람 아직도 있어요? 대통령 한마디에 문체부 국·과장이 강제 퇴직’ 보도를 실었습니다. 과거 정유라씨의 편의를 봐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직 해임당했던 문체부의 노태강 국장·진재수 과장을 박 대통령이 거명해가며 끝내 사표를 받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게다가 ‘남북 체육교류’ 등을 내세우며 대기업 돈 288억원을 걷은 케이스포츠 재단이 한 일을 뜯어보니, 최씨의 딸 독일 전지훈련을 지원하는 것이었습니다. <한겨레>는 10월17일치 1면에 케이스포츠 재단의 박헌영 과장 등이 재단이 설립된 2016년 1월께 최씨를 수행해 독일에서 딸의 숙소와 훈련지를 물색했다는 보도를 냈습니다. 정유라씨의 특혜 문제, 두 재단 문제 등에 <경향신문> <제이티비시>(JTBC) 등 여러 언론도 가세하며 사건 보도에 속도가 붙었습니다.
정윤회·최순실씨의 딸 유연씨가 2013년 7월19일 과천시 주암동 서울경마공원에서 열린 마장마술 경기에 참가하고 있다. 과천/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 재단도 딸 위해 만들었나… 차은택·고영태 거느려 운영
10월 들어 ‘최순실의 사람들’의 윤곽도 점차 분명히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린 것은, 미르재단을 좌지우지한
차은택 CF감독(47)입니다. 차씨는 2014년부터 최씨와 막역한 사이로 지내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미르재단의 공식적인 직책을 직접 맡지는 않았지만, 재단 이사장, 사무총장, 각급 팀장까지 모두 차씨가 아는 사람으로 임명했다고 합니다. 미르재단 사무실도 차씨의 후배인 그래픽디자이너 김성현씨의 이름으로 빌렸습니다. 김성현씨는 미르재단 사무부총장직을 맡았고, 케이스포츠 재단에 최씨의 지시를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
▶ 최순실, 미르 김성현 통해 K스포츠 관여 )
박근혜 대통령이 ‘문화가 있는 날' 행사의 일환으로 2014년 8월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상명대학교 상명아트센터에서 열린 융복합 공연 ‘하루(One Day)'를 관람하기에 앞서 무대에 올라 인사말을 하고 있다. 왼쪽이 차은택 공연 총연출자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두 재단은 ‘문화융성’을 빙자해 나라 예산도 가져갔습니다. 미르재단이 참여하는 사업마다 박 대통령이 얼굴을 비칩니다. 대통령이 아프리카 3개국, 이란, 프랑스 등지로 해외순방을 나가서 문화교류행사를 열면 미르와 케이스포츠 재단이 참가합니다. 재단은 ‘차은택 사단’이 세운 광고기획사에 일감을 넘겨줬습니다. (
▶ [단독] 미르·K와 ‘동업’ 플레이그라운드, 차은택 놀이터였나 ▶차은택 관련업체 <플레이그라운드>, 계약 전 미리 선정 특혜 의혹 ) 쉽게 말하면 미르재단이 대통령의 해외순방 성과로 포장된 국가 사업을 기획해내려보내면, 차 감독의 사람들이 용역을 따냈습니다. 정부나 정부의 입김이 미치는 기업의 광고 일감도 차씨 사람들이 독식했습니다. 이외에도 차씨가 국가적 비호 속에 이권을 챙긴 행각은 너무나 방대해 따로 총정리가 필요할 정도입니다.
◆ 차은택은 어떻게 문화계 황태자로 군림했나
미르재단 뿐 아니라 문화계 전체를 주물렀다는 차은택씨는 어떻게 ‘실세’로 떠올랐을까요? 주목받는 CF 감독이었지만 “밀려나고 있는 게 아닌가 위기감을 느꼈”다고 술회하기도 한 차씨는, 2014년 중반부터 문화계 정책 전반의 핵심인사로 급부상합니다. <티브이조선>은 고영태씨가 차씨를 2014년 중반 최순실씨에게 소개해줬다고 보도했습니다. 혹은 최씨의 조카 장유진씨(장시호로 개명)가 차씨를 이모에게 소개시켰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차씨는 2014년 8월19일 대통령 산하 문화융성위원회의 위원으로 위촉된 뒤부터 화려한 행보를 이어갑니다. 먼저 인천아시안게임 개폐회식 영상감독에 발탁됩니다. 2014년 10월엔 ‘2015밀라노엑스포’ 한국관 행사 감독이 갑자기 차씨로 바뀌었고, 예산은 330억원으로 두 배 가까이 늘었습니다. (
▶[시사인] [단독] “차은택이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했다” ) 2014년 11월엔 국민체조 대신 ‘늘품체조’를 보급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3억5000만원 예산이 책정됐지만 정작 안무가는 제작비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
▶[조선] 정아름 “문체부·차은택 ‘늘품체조’ 내게 떠넘겨…모두 한패” )
2015년 4월, 차씨는 민관합동창조경제추진단장 겸 문화창조융합본부장이 됩니다. 원래 창조경제추진단 단장은 2명이었는데, 두 달 전에 단장을 3명으로 늘리도록 대통령령을 바꾸고, 차씨가 새로 생긴 자리에 앉았습니다. 2015년 9월, 한국관광공사는 차씨가 주도한 사업에 관광진흥개발기금 145억원을 내줬습니다. 원래 예산(26억원)에서 여섯배 넘게 늘려 책정(171억원)하겠다고 하는데, 나라살림을 엄격하게 감독하는 기획재정부가 하루 만에 승인해 줍니다. (
▶청와대 지시로 차은택 총괄사업에 145억 밀어줬나 ) 2년여간 차씨가 대표인 ‘아프리카 픽처스’, 그리고 차씨가 실질적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광고기획사 ‘더 플레이그라운드’(대표 김홍탁) 등 관련 업체들은 금융위원회를 비롯한 정부기관과 케이티(KT) 광고를 싹쓸이하다시피 했습니다. (
▶[오마이뉴스] 박근혜-송중기 만남도 미르재단 관계 있다? )
정부 요직도 ‘차은택 사단’이 차지했습니다. 차씨의 영상대학원 시절 스승이었던 김종덕 교수는 차씨가 등장한 2014년 8월 문화체육부 장관이 되었습니다. 석 달 뒤인 11월 차씨의 외삼촌인 김상률 교수가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이 됩니다. 12월에는 차씨가 ‘은인’으로 여겼다는 송성각씨가 콘텐츠진흥원 원장으로 취임합니다. (
▶[경향] “차은택, 송성각에게 장관시켜준다고 했다” ) 반면 임기를 2년 남겨둔 변추석 한국관광공사 사장은 돌연 사임합니다. (
▶[노컷뉴스] “차은택 총감독 반대하자 나가라는 분위기” ) 차씨가 제안한 사업은 모두 대통령의 ‘컨펌’을 받는다는 설이 퍼지면서 문체부 공무원들이 앞다퉈 그를 찾았다고 합니다.
2014년 11월26일 박근혜 대통령이 서울 방이동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문화가 있는 날’ 행사에서 늘품건강체조를 익히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최씨, 독일에 ‘돈세탁’할 회사 세웠다
하지만 미르재단의 경우 차씨가 최순실씨와의 연관성을 부인해버리면 그만입니다. 당시 최씨와 차씨 모두 언론보도 이후 종적을 감춘 상태여서 조사도 어려웠습니다. 이 무렵 여권에서는 ‘송민순 회고록’ 문제를 제기하며 ‘색깔론’으로 정치적 난국을 돌파하려 했고, 종북이니 내통이니 하는 이야기가 오르내리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는 듯 했습니다. (
▶미르·K로 수세 몰린 여, ‘송민순 회고록’ 대공세 )
‘송민순 회고록’으로 꽉 막혀가던 사태의 물꼬를 튼 것은 크게 세 가지 보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경향>과
<한겨레>가 18~19일치 지면에 실은 ‘독일에 최순실 명의로 된 자금 세탁용 유령 회사가 있다’는 뉴스입니다. 최씨가 케이스포츠 재단의 돈을 독일로 빼돌리려 한 건데, 최씨와 재단의 연관성이 명백히 드러나게 됐습니다.
둘째, <제이티비시>가 19일 밤 최씨가 대통령의 연설문도 고친다는 고영태 케이스포츠재단 이사 인터뷰를 내보냅니다. 최씨와 청와대 간의 긴밀한 교감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셋째, <경향>이 19일치로 “돈도 실력”이라는 정유라씨의 에스엔에스(SNS) 발언을 공개합니다. <티브이조선>은 최씨에게 폭언을 당한 이화여대 교수 인터뷰를 내보냅니다. 약속이라도 한 듯 비슷한 날 세 악재가 터지면서 여론은 악화하고, 사태도 급물살을 탑니다.
■ 평창·도쿄 올림픽 관련 예산 싹쓸이?
먼저 첫 번째 뉴스부터 보겠습니다. 케이스포츠 재단은 올해 초 ‘2020도쿄올림픽 비인기 종목 유망주 지원’ 사업을 할 테니 대기업에 80억원을 더 달라고 요구했다고 합니다. 사업 시행사는 독일의 비덱사로, 조사해 보니 주주가 최씨였습니다. (
▶K스포츠 ‘대기업 80억’ 요구 사업, 독일의 ‘최순실 모녀회사’가 주도 ) 케이스포츠재단의 돈이 흘러가는 곳이 최씨의 주머니였던 겁니다. <한겨레>도 한국과 독일에 ‘더블루케이’라는 최씨 소유의 회사가 있다는 보도(
▶최순실이 세운 블루K, K재단 돈 빼돌린 창구)를 내보냈습니다. 최씨의 측근으로 케이스포츠 재단 일을 도맡아 ‘비선실세의 비선실세’로 불리웠던
고영태(40)씨가 더블루케이의 관리인이었습니다.
그래픽 강민진 디자이너 rkdalswls3@hani.co.kr
미르재단과 똑같이, 정부·대기업 등의 자금을 받은 뒤 최씨 소유의 회사에 일을 떼어 맡기는 척 하며 돈을 보내는 ‘셀프 용역’ 자금 세탁 수법이었습니다. 최씨가 직접 케이스포츠 재단의 연구용역을 ‘더블루케이’에 맡기라고 지시했다는 증언도 나왔습니다. (
▶K 전 사무총장 “재단 주인은 최순실씨입니다” )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한 재단 관계자는 <한겨레>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 회사 모두 케이스포츠 재단의 돈을 합법적으로 독일에 보내기 위해 만들어진 페이퍼컴퍼니로 최순실씨의 오랜 심복들이 일을 보고 있다. 한국의 블루케이는 케이스포츠재단의 돈 되는 사업을 모두 가져가고, 이 돈을 세탁해 독일의 블루케이로 보내는 것이다.”
(<한겨레> 10월19일치)
최씨가 독일에 자금 세탁을 위해 세운 유령회사만도 수십개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아무도 몰랐다면, 2018평창동계올림픽, 2020도쿄올림픽 등을 핑계 삼아 나랏돈과 기업의 ‘투자금’이 그대로 최씨의 주머니에 흘러들어갔을 것입니다. (
▶관련기사 보기 최순실 3천억대 평창 올림픽 시설 공사 추진 “대통령 회의서도 언급” ▶최순실, 평창올림픽 홍보 드라마도 손대 )
최순실씨와 딸 정유라씨가 공동소유한 강원 평창군 용평면 도사리 산191번지 땅에 토석 채취와 벌목 등 개발행위가 선명하게 남아있다. 허가 면적 외 지역까지 토석 채취와 절개지를 만들어 최근 평창군이 초지법과 국토이용계획법 위반으로 정씨를 경찰에 고발한 상태다. 연합뉴스
■ 청와대 연설문 고치는 엄마, “능력 없는 부모 원망하라” 는 딸
이대 사태 때부터 활활 타오르던 대중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은 것은 10월19일치 <경향신문>이 공개한 정유라씨의 SNS였습니다. “능력 없으면 니네 부모를 원망해. 있는 부모 가지고 감놔라 배놔라 하지 말고. 돈도 실력이야.” 2014년 12월 작성한 이 글은, 정씨가 이대 합격 사실이 언론에 오르내리며 주변에서 특혜 의혹이 이는 데 불만을 토로했던 글로 보입니다. ‘돈도 실력이니 부모를 원망하라’는 정씨의 금수저론은, 취업난·경제난에 신음하는 2030세대는 물론 그들의 부모 세대까지 상처 입히는 발언이었습니다.
한편 청와대와 최씨의 관련성에 모두들 촉각을 곤두세우던 찰라, 고영태 케이스포츠재단 이사가 “회장(최순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대통령의) 연설문을 고치는 일”이라고 말했다는 JTBC 보도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설마’라고 생각했습니다.
■ “아는 사이는 맞지만…” 청와대, 한발 물러섰다
불길한 예감을 느꼈던 것일까요? 최순실씨에 대한 언급 자체를 회피하던 박 대통령과 청와대가 적극적인 반박에 나섭니다. 10월20일 국무회의에서 박 대통령은 사태 한 달 만에
처음으로 미르·K스포츠 재단을 언급합니다. 비록 “어느 누구라도 재단과 관련해서 자금 유용 등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면 엄정히 처벌받을 것”이라는 ‘유체이탈식’ 발언이긴 했지만요.
21일 국회 운영위 국정감사에 출석한 이원종 비서실장과 안종범 정책조정수석도 최씨와 대통령의 관련성을 부인합니다(우병우 민정수석은 이때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원종 비서실장은 “(최씨가) 대통령과 아는 사이지만 ‘언니’라고 부르며 40년간 절친하게 지낸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대통령과 멀어진 사이라는 애초 청와대 입장에서 한 발 물러선 것이었습니다.
최씨가 대통령 연설문을 고친다는 보도에 대해선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믿을 사람이 있겠나? 처음에 기사 봤을 때 실소를 금치 못했다”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얘기가 어떻게 활자화되는지 개탄스럽다”고 대답했습니다. 최씨가 몰래 청와대를 출입한다는 세간의 의혹에 대해선 “대통령께서는 친형제도 멀리하시는 분인데, 수시로 드나들고 밤에 만나고 그거는 성립이 안되는 얘기”라고 말했습니다. (
▶ “최순실, 박 대통령과 아는 사이지만 절친 아니다” )
이원종 대통령 비서실장(오른쪽)이 21일 오후 국회 운영위원회의 대통령 비서실·국가안보실·경호실 국정감사에 불출석한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에게 출석을 설득하라는 여야 원내대표단의 권고에 전화를 걸었으나 설득에 실패하고 이 사실을 여야 원내대표들에게 전한 뒤 회의실을 나서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반박만으로는 부족했던 걸까요. 월요일인 24일 아침, 박 대통령은 또 다른 승부수를 던집니다. 바로 ‘개헌론’ 입니다. 대통령이 권한을 국회와 좀 더 나누는 이원집정부제, 4년 중임제 등 민감한 정치적 이해관계가 중첩된 이슈라서 국회의원들이 모두 몰두할 만한 화제이지요. 개헌 얘기만 하느라 다른 모든 민생현안이 묻힐 수 있다고 해서, 의원 시절 “개헌 블랙홀”이라고까지 표현하며 박 대통령이 기피했던 주제입니다. (
▶관련기사보기 8·15 때 청 개헌 건의 묵살한 박근혜, 진짜 노림수는? ) 그런데 갑자기 개헌론을 들고 나온 것은 최순실 게이트의 ‘국면전환용’이라는 해석이 나왔습니다.
■ “봉건시대에도 없어”…그런데 그것이 사실로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24일 저녁, JTBC가 던진 폭탄은 “개헌 블랙홀” 강수마저도 무력화하는 충격적인 보도였습니다. JTBC는
최순실씨의 사무실에 있던 태블릿PC를 입수했으며, 그 안에 든 파일 200여개 중 대부분이 청와대 관련 문건이었다고 전했습니다. 특히 대통령 연설문이나 공식 발언 파일이 44개가 있었는데, 대통령이 실제 현장에서 발언하기 전에 최씨가 문건을 받아 열어본 흔적이 남아있었다는 겁니다. 대통령의 공식 발언은 정책 발표와 같은 힘을 지닙니다. 나라의 방향을 결정 짓는 발언이 사전에 외부로 유출되면 어떻게 될까요? 연설문은 수정된 흔적도 있었습니다. 대통령은 그렇게 수정된 내용을 실제 현장에서 그대로 읽었습니다.
연설문 뿐 아니라 국무회의 자료, 비서진 교체같은 인사 관련 문건, 극비 외교서류, 북한과의 비밀접촉 사실을 담은 안보 서류가 가득했습니다. 어떻게 해서 아무런 공적 직책도 없는 최씨가 이런 극비 자료들을 받아볼 수 있었을까요? 사람들은 경악했습니다. “너무 초법적인 일 아닌가. 이걸 어떻게 얘기해야 될 지 모르겠다.” 정병국 새누리당 의원의 말처럼, 할 말을 잃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을 겁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은 대통령을 투표로 뽑습니다. 그 대통령을 보좌하라고 청와대 시스템이 있습니다. 나라의 중요한 정책을 다루는 각 부처와, 청와대가 함께 머리를 맞댑니다. 그런데 그런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정책 발표를 일반인이 먼저 들여다보면 무슨 일이 생길까요? 단적으로, 최씨는 정부의 토지 개발 계획 문건을 입수한 뒤 부동산을 사들였다고 합니다.(
▶ [TV조선] 최순실, 소유 부동산 인근 개발정보도 들여다봐 ) 이런 일을 막기 위해, 공적인 직책을 맡은 이들은 업무와 관련해서 이권을 챙겼는지 엄격한 감시를 받습니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바로 고위공직자의 비위 사실을 감사하는 역할을 하지요. 하지만 시스템 밖의 인물이라면, 국정을 농단해도 알 도리가 없습니다. “이게 나라인가.” 탄식이 나오는 것은 그래섭니다.
27일 낮 서울 안암동 고려대학교 정경대 후문 게시판에 박근혜 대통령을 규탄하는 대자보가 붙어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충격적인 뉴스는 다음날 <한겨레>에 의해 연이어 터집니다.
“이런 얘기는 통념을 무너뜨리는 건데, 사실 최씨가 대통령한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시키는 구조다. 대통령이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없다. 최씨한테 다 물어보고 승인이 나야 가능한 거라고 보면 된다. 청와대의 문고리 3인방도 사실 다들 최씨의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다.”
대통령이 최순실 씨의 ‘아바타’나 다름없다는 겁니다. 이 보도가 국민들에게 안긴 충격은 <돌아온 최순실 총정리 3탄>에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정유경 기자
ed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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