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급적 복잡한 해석이 필요한 예민한 정치 문제에 대해서는 칼럼에서 다루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왔다. 정치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내가 이런 문제를 다루는 것이 주제넘은 짓이라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대표가 꺼내든 이명박, 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면 건의 논란이 새해 벽두부터 정치권에 큰 파장을 불러 일으킨 모양이다.
그런데 정치권이 어떤 결론을 내리건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게 있다. 나는 2016년과 2017년 20차례가 넘는 촛불집회에 단 한 차례도 빠지지 않고 참여한 촛불시민이다. 그 추운 겨울 우리는 함께 촛불을 밝히며, 따뜻한 차 한 잔을 나누며, 방석을 이웃에게 전하며, 함께 노래 부르며, 함께 팔뚝질을 하며, 함께 거리를 행진하며 독재자에 맞섰다. 마침내 우리는 승리했고 우리는 함께 눈물을 흘렸다.
승리의 주인공이 촛불시민이었기에 그 중 한 명이었던 나에게도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결연히 말한다. 나는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에 결단코 동의하지 못하겠다!
이케아 이펙트와 나의 손때
나는 이낙연 대표가 왜 저런 발언을 했는지 그 의중을 알지 못한다. 분명 어떤 정치적 이유가 있었을 테지만 내 수준에서 그 의중을 파악할 도리가 없다. 하지만 그게 어떤 정치적 이유였건, 이낙연 대표가 매우 중요한 한 가지를 간과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행동경제학 이론 중 이케아 이펙트(IKEA effect)라는 것이 있다. 이케아(IKEA)는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끄는 스웨덴 국적의 가구 회사다. 이케아의 성공 비결은 완성되지 않은 조립식 가구를 파는 데 있다. 가격이 20%가량 저렴한 대신 완성품이 아닌 미완성품이 배달된다. 가구를 조립하는 일은 소비자의 몫이다.
조립의 대가로 20%가량 싸게 구입하는 게 소비자에게 얼마나 이익인지를 논하자는 게 아니다. 이런 단순한 전략으로 이케아가 대성공을 거둔 진짜 이유를 알아야 한다.
하버드 대학교 경영대학원 마이클 노턴(Michael I. Norton) 교수가 관련된 실험을 한 적이 있다. 노턴은 실험 참가자들에게 종이접기를 시킨 뒤, 완성된 종이접기 작품을 걷어 그걸 다시 경매에 올려 팔았다. 고작 종이접기 작품을 경매에 올린다? 솔직히 그걸 누가 돈 내고 사겠나?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종이접기에 참가한 바로 그 사람들이, 자기가 직접 만든 종이접기 제품을 사기 위해 웃돈까지 얹는 열성을 보인 것이다. 고작 종이접기 완성품을 사려고 웃돈을 준다는 게 이해가 되나?
이에 대한 행동경제학의 해석은 이렇다. 종이접기 제품은 그 자체로는 정말 별 것 아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가 직접 만든 물건에 매우 강한 애착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실험 참가자들이 자기가 만든 종이접기 제품을 사기 위해 웃돈까지 쓰는 이유가 이것이다.
왜 이케아가 세계적 성공을 거뒀을까? 사실 20%가량 싸다는 건 핵심이 아니다. 소비자들이 직접 조립하면서 그 가구에 큰 애정을 갖는다는 게 핵심이다. 이케아는 소비자들에게 ‘내 손때가 묻은 제품’을 제공하고 소비자는 그 제품에 매우 큰 만족을 느낀다.
그래서 노턴은 “물건을 만드는 일에 직접 참여하면 사람의 자부심이 높아진다. 그리고 그 자부심은 자신이 만든 물건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도록 만든다”고 평가한다. 사람은 남들이 만들어 던져준 물건보다, 나의 피와 땀이 서린 물건에 더 큰 애정을 갖는다는 이야기다.
우리에게 먼저 물어야 한다
나는 이낙연 대표가 간과한 게 바로 이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전직 대통령을 사면한다? 나는 결코 동의하지 않지만 어쩌다보면 정치적으로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는 있을 것이다. 아마 이낙연 대표는 시민들의 반발보다 이런 정치적 결단을 통해 얻는 것이 더 많을 것이라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신컨대 촛불시민들의 반발은 이낙연 대표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강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명박, 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의 구속은 검찰이나 경찰이 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손으로 직접 한 것이기 때문이다.
전국의 그 수많은 거리에는 아직도 2016년과 2017년 겨울 우리가 남긴 손때가 묻어있다. 서울 광화문에서, 광주 금남로에서, 부산 서면에서, 대구 중앙로에서, 대전 타임월드 앞에서, 춘천 로데오 거리에서, 전국 방방곡곡에서 우리는 촛불을 들었다. 촛불은 그 어떤 정치세력의 투쟁이 아닌 우리의 투쟁이었단 말이다.
이건 정권이 바뀌고, 일련의 권력 투쟁의 결과로 검찰이 정치인을 구속한 것과 이야기가 아예 다르다. 노턴의 이야기처럼 촛불 투쟁은 우리의 자부심을 높였고, 높아진 자부심은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 우리에게 촛불은 세상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다.
그런데 왜 여당 대표가 사면을 이야기한다는 말인가? 도대체 누구에게 허락을 받은 것인가? 촛불을 든 우리에게 허락을 받은 것인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나는 그런 허락을 해 준 적이 한 번도 없다.
“너 따위의 허락이 뭐가 중요하냐?”고 함부로 말하지 않았으면 한다. 개인 이완배는 매우 하찮지만 2016년 혁명의 한 복판에 있었던 이완배는 수천 만 명의 촛불 시민과 함께 충분히 존중받아 마땅하다고 확신한다.
“너의 의견이 촛불시민 다수의 의견이 아니지 않냐?”는 반론은 당연히 옳다. 그래서 먼저 물어보라는 이야기다. 나처럼 이명박 박근혜 사면에 반대하는 촛불시민이 더 많은지, 찬성하는 촛불시민이 더 많은지 물어보고 결정해야 할 것 아닌가?
이 대표는 “지지층의 찬반을 떠나서 건의하려고 한다”고 했다는데, 다른 문제라면 몰라도 이 문제는 그래서는 안 된다. 가장 중시해야 할 촛불시민들의 찬반을 도대체 왜, 누구 마음대로 함부로 떠난다는 이야기인가?
“아직 결정된 게 아니라 의견을 개진했을 뿐이다”라는 핑계라면 그건 너무 비겁하다. 이게 지금 간을 보고 어쩌고 할 문제가 아니지 않나? 역사의 주인공이 촛불시민임을 인정한다면 정치권이 이 문제에 대해 간을 보는 것은 실로 무례한 일이다.
그래서 촛불시민에게 묻지도 않고 진행하는 여당 대표의 이번 사면 건의 추진에 대해 나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시민의 손때, 시민의 발자국, 시민의 촛불로 일군 그 혁명의 성과를 시민의 동의 없이 뭉개려 하지 말라. 아무리 지금의 정치 제도가 대의민주주의라 해도, 적어도 우리 손으로 직접 끌어내린 이명박, 박근혜의 사면에 관한 결정권은 정치인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시민에게 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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