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 유죄가 선고되면서 정치적 파장이 커지고 있다.
국정원의 선거 개입이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이뤄졌다고 재판부가 사실관계를 인정하면서 박근혜 정부의 정통성까지 의심을 받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서울고법 형사6부(김상환 부장판사)는 지난 2012년 8월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확정될 당시부터 선거 관련 인터넷 게시물이 급증한 것을 통계치로 제시했다.
특정 정당의 후보가 확정된 시점에 국가기관인 국정원이 정치적 중립성을 위반해가며 인터넷에서 몰래 지원한 것은 불법적 활동이며 형사처벌이 불기피하다는 것이 항소심 판결의 핵심이다. 정보를 통해 국가 안보를 지킨다는 국정원이 정권을 위해 불법적인 일을 저지른 것을 사법부가 인정한 것이다.
판결문은 국정원의 선거 개입 행위가 얼마나 큰 해악을 끼쳤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가득차 있다.
김성환 부장판사는 "사이버에서 북한에 따른 심리전이 실제 행해지고 있다는 분석은 충분히 이해되고 충분히 조치할 필요가 있으나 필요성을 감안하고 보더라도 여러 사정에 비춰 이 사건의 사이버 활동은 심리전을 벗어나 공직선거법 등을 위반한 것이고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활동이었다고 하나 민주주의를 훼손한 것임이 명백하다"고 말했다.
특히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렀던 종북세력에 대한 대응 차원이었다는 국정원의 입장에 대해서도 "종북세력이란 개념은 주체를 신봉하고 대한민국 정체성 정통성을 부정하는 반사회적 성향을 갖는 세력에서 대한민국 정부 반대 세력으로 넓게 사용될 수 있음에도 분명하게 획정하지 않아 대한민국 정부 정책에 대한 반대하고 비난하는 세력은 종북 세력이라는 입장에 기초한 사이버 활동을 가능하게 했다"고 지적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향후 국정원의 사이버 심리전에 대한 신뢰성을 확보할 수 없다고 밝혀 향후 국정원 개혁도 주문한 것으로 풀이된다.
김 부장판사는 "마치 일반 국민인양 선거 관련 의견을 조직적으로 전파해 국가 개입을 상상하지 못한 채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자유롭게 토론했던 국민은 사이버 공론장의 순수성과 자율성을 의심할지도 모르게 됐다"고 말했다.
특히 항소심은 원 전 원장의 지시로 국정원 심리전단의 사이버 활동이 당선이나 낙선의 의도를 가졌다고 판단했다. 이명박 정부 하에서 국정원이 어떤 이유로 특정 정당의 후보를 지원했는지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선거 개입 행위 지시가 원 전 원장을 뛰어넘어 '윗선’에서 나왔다는 물음이 나올 수 있는데 정권의 정통성 시비뿐 아니라 불법 선거운동 몸통 의혹까지 불거질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노무현 정부 때 폐지됐던 국정원장의 대통령 독대보고가 이명박 정부 들어 부활된 사실도 회자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원세훈 게이트 진상조사위 간사였던 김현 새정치민주연합 위원은 "이명박 정권 내내 대통령 독대 보고를 부활시킨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불법 정치 공작을 단독으로 벌였는지 밝혀야 한다"며 이 전 대통령의 수사를 촉구한 바 있다.
박근혜 정부가 원세훈 전 원장의 공직선거법 위반 수사를 전방위적으로 방해했던 정황이 부각되고 있는 것도 심상치 않다.
경찰은 지난 2013년 원 전 원장의 혐의와 관련해 국정원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만 송치 의견을 냈다. 또한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특별수사팀장을 맡았던 윤석열 여주지청장은 공직선거법 위반 공소시효가 끝나는 시점인 2013년 6월 19일 이전 법무부에 보고서 작성 설명 과정에서 수사를 하지 못해 외압을 느꼈다고 폭로했다. 당시 채동욱 검찰총장도 석연치 않은 혼외자녀 의혹으로 쫓겨나가면서 대선 개입 사건 진상규명을 막기 위한 정권 차원의 찍어누르기 의혹으로 확산됐다.
▲ 원세훈 전 국정원장 | ||
이번 판결로 국정원 대선 개입 관련한 다른 사건에 대해서도 영향을 끼칠지 주목된다.
서울중앙지검 공공형사수사부는 국정원 여직원 김모씨가 사용한 아이디 11개를 기자에게 전달한 혐의(개인정보보호법 위반)로 오늘의유머 사이트 운영자 이모씨를 약식기소했다.
이씨로부터 아이디를 받은 기자는 국정원 직원 김씨의 글을 파악하고 이를 근거로 해서 다른 국정원 직원의 아이디 등을 파악해 국정원의 조직적인 선거 개입 행위를 보도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씨가 건넨 아이디는 국정원 직원으로 밝혀졌고 정치/선거 관여에 활용됐다고 판결했는데 이를 언론사에 건넨 행위를 두고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논란도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권은희 송파경찰서 수사과장(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경찰 윗선에서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했다고 폭로한 사건과 관련해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이 무죄를 선고 받았지만 국정원의 선거개입 행위가 사실로 드러난 만큼 권은희 의원의 입지가 넓어질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에서도 이번 판결의 파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새누리당은 정통성 시비로 확산될 경우를 대비해 박근혜 정부 이전에 일어난 일임을 강조하는 모습이다. 김영우 새누리당 대변인은 "정치권에서 또다시 지난 대선 결과 전체에 대해서 소모적인 논쟁을 벌이는 일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야당은 이번 판결을 근거로 정통성 문제를 제기하면 대선 불복 논란으로 확산돼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우려도 엿보인다.
이재화 변호사(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는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원세훈 전 원장이 바보가 아닌 이상 개인의 이익을 위해 선거에 개입한 게 아니다"라며 "결국 두가지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자기가 살기 위해서 했거나 당시 박근혜 후보자 쪽에서 요청을 해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서 했다는 의혹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어쨌든 법률상으로 보면 박근혜 대통령을 물러가라고 하는 것은 무리지만 전통성에 치명적인 하자가 발생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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