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 진영 대결'의 시작 알린 19대 '패트 충돌'
韓, 폭로 이후…"나경원 개인 차원 부탁" 2차전'친한계' 중진 송석준 "당혹, 착잡…서운함 공감"
정치권에선 '한동훈은 정치인 아닌 검사' 평가도
유력한 국민의힘 당권 주자인 한동훈 당 대표 후보가 선거 막판 크게 휘청이고 있습니다. 지난 17일 방송토론 과정에서 나경원 후보를 향해 "나 후보가 (법무부 장관 시절) 저에게 본인의 패스트트랙 사건 공소를 취소해 달라고 부탁하신 적이 있으시죠? 저는 거기에 대해 '그럴 수 없다'고 말씀드렸다"고 폭로하면서부터입니다.
이 논란은 하루 만에 가볍게 종결되는 듯했습니다. 한동훈 후보는 당내 비판이 거세지자 "신중하지 못했던 점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런데 하루 만에 또다시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한 후보가 나 후보를 향해 "나경원 후보는 당시 당직도 아니셨고, 개인 차원에서 부탁하신 것"이라고 2차전을 벌였기 때문입니다. 한 후보는 19일 열린 마지막 방송토론에서 "저는 전직 원내대표로서 27명을 대표해서 우리 당 의원, 보좌진을 대표해서 말씀드린 것"이라며 항변하는 나 후보를 향해 '개인 차원의 부탁이 맞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습니다.
정치권에선 나 후보가 해당 방송 토론이 끝난 뒤 분을 참지 못해 눈물을 보였다는 말까지 돌았습니다. 두 사람의 고성 토론을 지켜본 원희룡 후보는 토론이 끝난 뒤 기자들에게 "(나경원 후보가) 많이 참은 것 같다. 통곡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잖느냐. 진짜 패스트트랙 속에 피멍 든 사람들 입장을 생각해보시라. 공감한다면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느냐? 어제의 사과는 뭐냐"고 격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정치권에서는 이미 '심리적 분당 상태'라는 말이 나오는 상황에서 한 후보가 '역린'을 건드렸고, 결국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말들이 나옵니다.
◇단식·삭발에 '의원직 총사퇴'까지…'패스트트랙 충돌'이 뭐길래
19대 국회가 끝나갈 무렵 발생한 '패스트트랙 충돌' 사건이 무엇이었길래 이렇게 격한 반응이 나온 걸까요?
국민의힘 전신인 자유한국당은 당시 더불어민주당과 바 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정의당 등 4당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과 검경 수사권 조정 관련 법안, 선거법 개정안 등 세 법안을 신속처리 안건(패스트트랙)으로 지정하지 못하도록 전방위 투쟁을 했습니다.
황교안 당시 자유한국당 대표는 패스트트랙 처리를 막기 위해 8일 동안 단식하다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됐습니다. 패스트트랙 지정에 반발해 당시 박대출 의원과 김태흠·윤영석·이장우·성일종 의원 등이 집단으로 삭발하기도 했습니다.
나경원 당시 원내대표는 "의원직 총사퇴를 불사하고 맞서겠다"고 말 했는데, 패스트트랙을 둘러싼 당시 진영 간의 갈등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결국 국회에서는 여야 의원들 간에 육탄전은 물론이고, 쇠 지렛대와 장도리까지 등장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기소된 27명의 의원과 보좌진은 5년째 재판받고 있습니다.
이때 결국 국회 문턱을 넘은 세 법안으로 정치권은 지금까지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공수처에 맡겨진 수사는 매번 '특검으로 가느냐 마느냐'를 두고 여야가 싸우고 있고, '검경 수사권 조정' 관련 법안은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이라는 이름으로 야권에 과제를 남김으로써, 갈등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선거법 개정안은 '연동형 비례제'라는 기형적 선거 제도를 남겼습니다.
정국 경색으로 '최악의 국회'라는 평가를 받았던 21대 국회와, 개원식 최장 지연의 기록을 깬 22대 국회가 겪고 있는 '여야 대화의 실종'이 19대 국회 막바지에 발생한 '패트 충돌' 사건에서 시작됐다고 보는 시각도 많습니다. '최악 진영 대결'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인 셈입니다.
◇애 타는 한동훈 캠프…'검 사 말 습관 못 버렸나'
사과 이후에 '2차전'을 벌이는 한 후보를 지켜보며, 애가 타는 것은 한 후보 캠프 측인 것 같습니다. '똥볼만 안 차면 당선'인 상황에서 나온 한 후보의 이 번 발언이 '실점'으로 기록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초 한 후보의 최초 발언 이후 하루 만에 사과 입장이 나온 것도, 캠프 내에서 '사과하자'는 것으로 빠르게 의견이 모였기 때문입니 다. 친한계 의원들이 대부분 초재선으로 이뤄진 것과 달리, 캠프 내에서 19대 국회부터 일해온 보좌진들이 움직였을 거라는 말도 나옵니다.
'친한계'로 분류되는 의원들 중 유일한 3선 중진 으로서 '패트 충돌' 당시 투쟁했던 송석준 의원 역시 한 후보의 발언에 "당혹스럽고 착잡했다"고 밝힌 것을 보면, 캠프 내의 이러한 분위기를 유추할 수 있습 니다.
송 의원은 한 후보 발언과 관련 한경닷컴에 "고통받던 당시 의원들 입장에서 보면 서운함이 느껴지는 것에 대해 충분히 공감한다"면서 "당시 원내대표였던 나경원 의원 입장에서 그런 얘기를 분명히 해야 하고, 오히려 그런 얘기를 안 해줬으면 더 서운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만 "그런 발언이 나온 배경은 법무부 장 관으로서 공정한 법 집행을 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며 "고의로 우리 내부를 공격하기 위한 말이 아니었다"며 나 후보와 한 후보를 모두 감쌌습니다.
그러나 한 차례 사과 이후에도 한 후보는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캠프 내에서는 '토론에 나가면 흥분하지 말고 말을 아끼라'는 요청도 여러 번 나왔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한 후보가 발언을 참지 못한 것은 '검사 시절의 습관을 버리지 못해서'라는 평가도 나옵니다. 피의자와 대화하는 방식이 대화 습관으로 굳어졌을 수 있다는 우려입니다.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은 이번 논란과 관련 "한동훈 후보가 최근에 나경원 후보에 대해서 거대한 폭로한 것은 앞으로 앙금이 많이 남을 그런 사안인 것 같다"며 "(한 후보는) 아직 정치인이 아니라 검사인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 의원은 19일 KBS 라디오에 나와 "같이 일하는 당내 동료들을 혹시 범죄자와 비범죄자로 구분해서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든다"라며 "법에 있는 대로 집행하는 것이 검사 소임이라는 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국회선진화법에서 파생된 패스트트랙 분쟁은 굉장히 정치적인 사안"이라고 꼬집었습니다.
한 후보의 이번 발언 이후 '전당대회가 결선까지 가지 않을 것 같다던 당내 분위기는 '결선까지는 가지 않겠나'로 일부 바뀌었습니다.
누가 당 대표가 되든 이제 문제는 전당대회 이후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심리적 분당 사태를 넘어선 이 상황을, 차기 국민의힘 대표가 어떻게 헤쳐 나갈지 주목됩니다.
이슬기 한경닷컴 기자 seulk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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