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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July 31, 2011

양아치 정권의 희한한 어버이들

양아치 정권의 희한한 어버이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세 부류의 어버이 상
(서프라이즈 / 내가 꿈꾸는 그곳 / 2011-08-01)



덧없이 세월만 보내고 나잇살만 먹으면 어버이가 되는 것일까.

어버이란, 아버지와 어머니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려면 장성한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아 길러야 완성된다. 결혼만으로 어버이가 될 수 없고, 싱글족들이 제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어버이가 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이렇듯 어버이는 생물학적으로 최소한 아이를 낳아 기른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참 귀한 존칭일까. 어버이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 사람들은 당신을 위한 노래를 지어 불렀다. 노랫말은 이러하다.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버이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
어려선 안고 업고 얼러 주시고. 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맘. 앓을 사 그릇될 사 자식 생각에. 고우시던 이마 위에 주름이 가득. 땅 위에 그 무엇이 높다 하리오. 어버이의 정성은 그지없어라.
사람의 마음속엔 온 가지 소원. 어버이의 마음속엔 오직 한 가지. 아낌없이 일생을 자녀 위하여. 살과 뼈를 깎아서 바치는 마음. 인간의 그 무엇이 거룩하오리. 어버이의 사랑은 지극하여라.”

아마도 어버이를 칭송하는 이 노랫말을 모르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어버이가 된 사람이나 또 자식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공감할 노랫말이다. 공감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위 가사 전부를 읊조리는 동안 어버이 생각에 또는 불효막급 했던 시간 등을 떠올리며 울컥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다. 어머니 아버지를 떠올리는 순간 ‘나의 존재’를 있게 해 준 데 대한 감사와 존경의 표시가 눈물과 감동이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보답하거나 갚을 수 없는 어버이의 은혜여서, 아무런 값 없이 받은 그 사랑을 대물림하며 인류 문화사를 엮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랑 속에는 희생정성사랑은 ‘가이’없고 ‘그지’없으며 ‘지극’하다고 했다. 인간이 쓸 수 있는 최고의 수사는 전부 동원된 표현이다. 그게 최소한 생물학적 어버이의 참모습이다.

그리고 인류로부터 추앙받고 있는 또 한 사람의 어버이가 있다. 그는 영적 어버이로 추앙받고 있는 ‘인간 예수’이다. 바이블에 기록된 예수는 공생애 33년을 살아가는 동안 인류에 미친 영향이 지대했다. 세계를 통틀어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는 요즘 말로 표현하면 ‘싱글족’이며 그에게 아들 딸과 같은 자식이 없다. 그러나 그의 위대한 업적 때문에 세계의 기독교인은 물론 이방인들조차 그를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거나 그의 업적 등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는 종교적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행위로 골고다 언덕 위의 십자가에서 스스로 택한 죽음을 맞이하며, 우리에게 한없는 사랑을 실천적으로 보여주며 진리가 무엇인지 보여준 위대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기록을 통해서 본 인간 예수의 행적은 반드시 하나님의 아들이 실천적으로 행한 일이 아니었다. 인간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며 어버이들이 몸소 깨달아 실천해야 할 일 등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게 뭔가.

박애봉사희생이었다. 박애란, 모든 사람을 차별을 두지 않고 평등하게 사랑하는 걸 말한다. 봉사란, 국가나 사회 또는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고 힘을 바쳐 애쓰는 행위를 말한다. 희생이란, 타인 또는 어떤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 재산, 명예, 이익 따위를 바치거나 버리는 행위 등을 말한다.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을 박애와 봉사와 희생을 다시 돌아본 이유는 생물학적 어버이가 가질 수 없는 또 다른 어버이의 모습 내지 가치가 있음을 상기하고 싶은 것이다.

나를 낳고 기른 어버이의 희생과 정성과 사랑이 가이없고 그지없으며 지극하지만, 이른바 싱글족조차 박애와 봉사와 희생정신을 가지고 실천하면 인류가 추앙하는 어버이로 영원히 기억될 수 있다는 말이다. 예수는 공생애 33년 동안 그 일을 위해 골고다 언덕 위에서 최후의 모습을 통해, 피 한 방울 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모두 땅으로 되돌리며 숨을 거두었다. 참으로 위대한 영적 어버이 상이다. 물론 이명박 등이 장로 직분을 가지고 신앙한다고 하는 소망교회 등 오늘날 외형만 비대한 개신교회의 신앙 풍토와 까마득히 먼 얘기다.


그런데 서기 2011년 동방공구리지국으로 불리우는 이명박 정권에서는 희한한 어버이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이들 소속은 ‘어버이연합’이라고 한다. 무늬는 어버이 모습을 빼닮았지만 하는 짓은 ‘양아치’ 모습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양아치연합’이라고나 할까. 이들의 모습에서 어버이의 존귀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어서 붙여본 이름이다. 양아치란, 거지를 속되게 부르는 말이라고는 하지만, 이들을 살펴보면 진짜 거지 내지 양아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정체성이 희박해 보인다. 그래서 이들의 정체를 알아보기 위해 양아치의 속성에 대해 알아봤다. 그랬더니 이들의 정체를 잘 대변해 줄 것 같은 ‘양아치에 대한 단상’이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양아치란 빌어먹는 거지를 지칭할 때 쓰는 속된 말이다. 그러나 진짜 거지를 향하여 ‘양아치’라고 호칭하거나 지칭하는 오만을 부리는 보통 사람들을 최근에는 거의 보지 못했다. 편견을 스스로 경계하는 양식이 높은 사람이라면 함부로 비속어를 쓰지 않을 것이다. 통속적으로 ‘양아치’라는 말은 단순한 ‘거지’를 지칭하지 않는다. 어떤 나쁜 근성을 가진 사람을 비하하여 부를 때 사용한다. 염치없는 사람 즉 체면도 없고 부끄러움도 없는 막돼먹은 사람을 향하여 양아치로 표현한다.

뻔한 거짓말을 얼굴색 하나 변함없이 한다거나, 윤리도덕 그리고 상식에 벗어나는 행동을 하고서도 사람들의 비난이나 비판이 무색하게 뻔뻔하게 구는 사람들이 ‘양아치’로 규정 받아야 할 사람들일 것이다. 세상에는 여러 형태의 양아치들이 있지만, 대개 그 근본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심이 없이 이기적이고, 자기 욕심만 차리는 배타적 성격을 가졌으며, 예절을 무시하고, 정당한 절차나 수단을 도외시하고 폭력적인 행동을 일삼으며, 의리를 짓밟고 일신의 영달을 위하여 배신을 일삼으면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근성을 지녔다.

폭력배, 건달, 깡패들도 자신이 ‘양아치’로 불리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이유가 실은 그 본성을 인간쓰레기로 취급하는 그 호칭에 대한 사회적 뉘앙스를 본능적으로 체득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사회에서 양아치 속성을 가진 사람들이 금력과 권력 그리고 명예까지 거머쥐고 행세를 하고 있다는 것은, 그 사회의 전통과 문화가 저급하고 그 기반을 이루는 구성원들의 정신적 상태가 건전하지 못하고 병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양아치의 뿌리를 과거 역사적 친일파들로부터 찾는다. 민족을 배신한 친일파들은 자신의 심적 콤플렉스를 양아치적인 근성으로 극복하려고 했을 것이다. 친일파 양아치들의 대를 이은 불변의 성공신화에 자신들의 삶의 지향을 동화시키고 그것을 동경하는 의식이 거리낌 없이 사회적으로 횡횡하는 조건은 비열한 양아치들이 사회적 지배자로 번성하는 강력한 자양분이 된다. 세상에 양아치들과 양아치 속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상에 기가 막히고 가슴을 치며 통탄해야 할 일들도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출처 http://blog.daum.net/solutions/7816798>

희한한 어버이 격인 ‘양아치 어버이연합’의 모습을 이렇게 잘 표현해 둔 글이 또 있을까. 말만 붙이면 다 어버이가 아니란 말이며 나잇살만 먹으면 다 어버이가 아니란 말이다. 어버이란 사회적 책임을 동반하는 동시에 그들 스스로 어버이의 본분을 다할 때 어버이의 존칭이 부여된다. 윗글을 통해 양야치에 대한 눈에 띄는 대목을 발견할 수 있다.

양아치가 체면도 부끄러움도 없고 막돼먹은 사람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심이 없이 이기적이고, 자기 욕심만 차리는 배타적 성격을 가졌으며, 예절을 무시하고, 정당한 절차나 수단을 도외시하고 폭력적인 행동을 일삼으며, 의리를 짓밟고 일신의 영달을 위하여 배신을 일삼으면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근성을 지녔다고 한다. 대체로 공감하는 사실이다. 오죽하면 폭력배, 건달, 깡패들도 자신이 ‘양아치’로 불리는 것을 싫어했겠나.

위 글쓴이는 양아치배들이 설쳐대는 근본적인 이유로 우리나라의 양아치 역사 내지 뿌리에 두고 있다. 양아치의 뿌리가 친일파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는 말이다. 양아치의 뿌리에 대해 “민족을 배신한 친일파들은 자신의 심적 콤플렉스를 양아치적인 근성으로 극복하려고 했을 것이다.”라고 말한 그는 “세상에 양아치들과 양아치 속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상에 기가 막히고 가슴을 치며 통탄해야 할 일들도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글을 맺고 있다. 우리는 오늘날 날이면 날마다 가슴을 치고 통탄할 일들의 뿌리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느 날 희망버스를 가로막고 깽판을 치고 행패를 부리는 등 정체불명의 ‘양아치 연합’의 늙은이들을 보는 순간, 그 뿌리가 친일파 내지 친일패거리들이 득실거리는 이명박 정권을 단박에 떠올리게 된다. 그들이 최소한 3년 동안 보여준 짓거리들은 양아치연합의 늙은이들이 보여준 추태 외 더도 덜도 아니었으며, 폭력배나 건달 내지 깡패들도 싫어하는 짓을 서슴지 않았던 국정농단 사건이었다. 그들은 나잇살만 쳐 드셨지(과분한 표현이다.) 다수 존경받아 마땅한 세상 어버이의 자질 모두를 스스로 상실하고 있었던, 반민족적 비민주 친일패거리들이자 양아치 연합의 늙은이들이었던 것이다. 또 다른 양아치의 속성에 대해 알아보니 이런 의견이 있었다.

양아치의 속성에 대하여 1. 자기에게 잘해주는 놈들에게는 잘해준다. 이유없다. 2. 자기가 꼴 보기 싫은 인간들은 가차없이 제거한다. 물론 이유없다. 3. 자기가 저질러놓은 일이 잘못됐다고 들통이 나도 상관하지 않는다. 기본적인 수치심이 없다. 4.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마치 철학인 것처럼 주절거린다. 5. 자기가 떠벌이는 개똥철학에 자기가 감동한다. 6. 많은 사람들이 비난하면 핍박받는다고 생각한다. 일종의 정신적 자위행위이다. 7. 양아치 최후의 논리는 ‘꼬우면 네가 짱먹어’이다. 고로 양아치에게 양심을 기대하면 안 된다. 일단 패고 봐야 한다. <출처 http://www.ohmynews.com/NWS_Web/Opinion/opinion1_m1_list.aspx?
add_cd=RE005455570&add_gb=2&cntn_cd=A0001283031&line_no=17&ord_gb=1&page_no=1 >
<어제(31일) 오전, 부산 영도구 청학동에서 2일 차를 맞은 3차 희망의 버스 참가자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출처: 민중의 소리>

우리 말에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이라는 속설이 있다. 미친개를 정상적인 개처럼 다루다간 자칫 물릴 수도 있으므로 그저 몽둥이로 패야 된다는 말일까. 양아치의 속성에 대해 끄적거린 한 시민의 결론 속에, 양아치에게 양심을 기대하기 어려우니 일단 패고 보란다. 패서 내 쫓으란 말인데 대명천지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나라에서 폭력을 사용해서 양아치연합의 늙은이들 버릇을 고치거나 이 땅에서 내쫓을 수는 없다. 그건 공구리지국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예의와 범절이 몸에 밴 동방예의지국의 민주시민들이 할 짓이 못된다. 그렇다면 방법은 없는 것일까.

가장 민주적인 절차와 방법으로 이들 양아치들을 심판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내년 총선과 또 대선에서 이들 양아치의 역사를 단죄할 기막힌 찬스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투표로 심판할 수 있는 천우신조의 기회다. 그렇게 되면 어이없게도 양아치배들로부터 유린 당했던 자유와 민주를 반드시 되찾게 된다. 우리가 내년 총선에서 이들을 심판하지 못하면 이 땅에서 영영 양아치들의 권력 놀음 때문에 가슴을 치며 통탄하고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이 땅의 민주세력들이여 온·오프라인에서 부디 힘내시라. 우리 어버이들의 희생과 정성과 사랑이 깃든 이 땅을 일제의 양아치들에게 넘겨줄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꿈꾸는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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