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전 대통령은 3일 출간한 『전두환 회고록』에서 "광주사태 당시 국군에 의한 학살이나 발포명령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전 전 대통령은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잘못 알려진 것은 광주사태 당시의 희생자 수"라며 "수천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1980년 6월 광주지검이 민·관·군 합동으로 집계한 민간인 사망자 수는 165명"이라고 적었다.
이어 "적게는 수천 명 많게는 10만 명의 인파가 몰려 있는 장소에서 무차별 총기 공격을 했다면 엄청난 희생자가 발생했을 것"이라며 "165명 중에는 총기 오작동으로 인한 사망자, 음주운전·과속으로 인한 교통사고 사망자가 포함돼 있고 계엄군이 사용하지 않은 카빈총 등에 의한 사망자도 적지 않다"고 서술했다.
그는 "당시 시위대가 탈취한 무기는 총기가 5천400여 정, 탄약 28만8천 발, 폭약 2천180t 규모"라며 "장갑차와 군용 트럭에 수천 정의 총기로 무장한 속칭 시민군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공수부대의 자위권 발동이라는 점이 오히려 설득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 현재까지도 풀리지 않은 의혹인 '발포명령'과 관련해서는 발포명령 자체가 없었다고 강조했다.
전 전 대통령은 "무장시위대의 조직적이고 반복적인 공격행위는 전형적인 특공작전 형태를 띠고 있었다"며 "이런 상황에서 발포명령 여부를 논한다는 것은 군사작전의 기초상식만 있어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는 지휘관의 사격 명령이나 자위권 발동지시가 필요하지 않은, 개인적 판단과 행동만이 있을 뿐"이라며 "5월 21일 전남도청 앞 상황에서 공수부대원들이 사격한 것은 자위권 행사 요건에 딱 들어맞는 경우"라고 적었다.
이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포를 하지 않았어야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공수대원들이 차량에 깔려 죽거나 쇠파이프에 맞아 죽었어도 할 수 없다는 말과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처럼 급박한 상황 속에서 이뤄진 발포를 놓고 내가 사격 명령을 했다느니, 그 발포의 책임자가 나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며 "서울의 사무실에 있던 내가 광주의 작전 현장에 나타나 장병들에게 일일이 발포명령을 내릴 수 있었겠는가"라고 항변했다.
전 전 대통령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자료를 근거로 "음주운전 등 교통사고로 32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무기류 취급 미숙에 의한 시민군 사망이 15명"이라고 주장했다.
또 "당시 계엄군이 사용한 개인화기는 M16뿐인데 1995년 검찰은 M16 총상 사망자가 96명, 카빈 총상 사망자는 26명이라고 발표했다"며 "게다가 당시 시위대에 의해 탈취된 M16도 적지 않았던 만큼 M16 총상에 의한 사망자도 반드시 계엄군의 총격에 의한 사망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
최근 논란이 된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 여부에 대해서도 그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못 박았다.
전 전 대통령은 "한 미국인 목사는 검찰 조사 과정에서 당시 기총소사 장면을 촬영한 것이라는 사진까지 제출했는데 그가 제시한 사진은 가짜였다"며 "이런 주장은 헬리콥터의 특성을 잘 몰라서 하는 얘기거나 계엄군의 진압활동을 왜곡하려는 사람들의 악의적인 주장일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인 목사가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그런 거짓말을 한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는 목사가 아니라 가면을 쓴 사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북한이 개입했다는 의혹도 강도 높게 제기했다.
그 근거로 무장시위대가 광주교도소를 집요하게 공격했다는 점을 들었다.
전 전 대통령은 "교도소를 습격해 수감자들을 해방하는 것은 혁명군이 취하는 교과서적인 작전"이라며 "광주교도소에 수감된 미전향 장기수들, 간첩들을 해방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고 단언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교도소 습격은 북한의 고정간첩 또는 5·18을 전후해 급파된 북한 특수전 요원들이 개입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광주 여러 곳에서 거동이 수상한 자들이 목격된 점도 지적했다.
그는 "5·18 사태 당시 시위대 가운데는 흰 수건이나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사람들이 많이 등장했다"며 "그들은 시위를 폭력적이고 강경한 방향으로 몰아갔고 무기 반납을 적극 반대했다. 그리고 계엄군의 광주 재진입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퍼진 26일 저녁 무렵에는 일제히 자취를 감췄다"고 적었다.
이어 "당시 북한 간첩들에게 지령하는 무전 교신들은 우리 군 당국에 의해 포착되고 있었는데, 북한 공작원들이 암약하고 있다는 정황들은 여러 곳에서 감지됐다는 진술들이 있다"고 덧붙였다.
전 전 대통령은 "나는 세상이 나를 단죄하기 위해 '무고한 국민을 향해 총구를 겨눈' '국민을 학살한' 군대라는 오명을 덧씌운 대한민국 군인들의 명예를 되찾아줘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고 적었다.
이어 "우리 국군은 국민의 군대다. 결코, 선량한 국민을 향해 총구를 겨눌 일은 없다"며 "1980년 5월 광주에서도 계엄군은 죽음 앞에 내몰리기 직전까지 결코 시민을 향해 총을 겨누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전 전 대통령은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잘못 알려진 것은 광주사태 당시의 희생자 수"라며 "수천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1980년 6월 광주지검이 민·관·군 합동으로 집계한 민간인 사망자 수는 165명"이라고 적었다.
이어 "적게는 수천 명 많게는 10만 명의 인파가 몰려 있는 장소에서 무차별 총기 공격을 했다면 엄청난 희생자가 발생했을 것"이라며 "165명 중에는 총기 오작동으로 인한 사망자, 음주운전·과속으로 인한 교통사고 사망자가 포함돼 있고 계엄군이 사용하지 않은 카빈총 등에 의한 사망자도 적지 않다"고 서술했다.
그는 "당시 시위대가 탈취한 무기는 총기가 5천400여 정, 탄약 28만8천 발, 폭약 2천180t 규모"라며 "장갑차와 군용 트럭에 수천 정의 총기로 무장한 속칭 시민군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공수부대의 자위권 발동이라는 점이 오히려 설득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 현재까지도 풀리지 않은 의혹인 '발포명령'과 관련해서는 발포명령 자체가 없었다고 강조했다.
전 전 대통령은 "무장시위대의 조직적이고 반복적인 공격행위는 전형적인 특공작전 형태를 띠고 있었다"며 "이런 상황에서 발포명령 여부를 논한다는 것은 군사작전의 기초상식만 있어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는 지휘관의 사격 명령이나 자위권 발동지시가 필요하지 않은, 개인적 판단과 행동만이 있을 뿐"이라며 "5월 21일 전남도청 앞 상황에서 공수부대원들이 사격한 것은 자위권 행사 요건에 딱 들어맞는 경우"라고 적었다.
이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포를 하지 않았어야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공수대원들이 차량에 깔려 죽거나 쇠파이프에 맞아 죽었어도 할 수 없다는 말과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처럼 급박한 상황 속에서 이뤄진 발포를 놓고 내가 사격 명령을 했다느니, 그 발포의 책임자가 나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며 "서울의 사무실에 있던 내가 광주의 작전 현장에 나타나 장병들에게 일일이 발포명령을 내릴 수 있었겠는가"라고 항변했다.
전 전 대통령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자료를 근거로 "음주운전 등 교통사고로 32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무기류 취급 미숙에 의한 시민군 사망이 15명"이라고 주장했다.
또 "당시 계엄군이 사용한 개인화기는 M16뿐인데 1995년 검찰은 M16 총상 사망자가 96명, 카빈 총상 사망자는 26명이라고 발표했다"며 "게다가 당시 시위대에 의해 탈취된 M16도 적지 않았던 만큼 M16 총상에 의한 사망자도 반드시 계엄군의 총격에 의한 사망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
최근 논란이 된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 여부에 대해서도 그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못 박았다.
전 전 대통령은 "한 미국인 목사는 검찰 조사 과정에서 당시 기총소사 장면을 촬영한 것이라는 사진까지 제출했는데 그가 제시한 사진은 가짜였다"며 "이런 주장은 헬리콥터의 특성을 잘 몰라서 하는 얘기거나 계엄군의 진압활동을 왜곡하려는 사람들의 악의적인 주장일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인 목사가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그런 거짓말을 한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는 목사가 아니라 가면을 쓴 사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북한이 개입했다는 의혹도 강도 높게 제기했다.
그 근거로 무장시위대가 광주교도소를 집요하게 공격했다는 점을 들었다.
전 전 대통령은 "교도소를 습격해 수감자들을 해방하는 것은 혁명군이 취하는 교과서적인 작전"이라며 "광주교도소에 수감된 미전향 장기수들, 간첩들을 해방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고 단언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교도소 습격은 북한의 고정간첩 또는 5·18을 전후해 급파된 북한 특수전 요원들이 개입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광주 여러 곳에서 거동이 수상한 자들이 목격된 점도 지적했다.
그는 "5·18 사태 당시 시위대 가운데는 흰 수건이나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사람들이 많이 등장했다"며 "그들은 시위를 폭력적이고 강경한 방향으로 몰아갔고 무기 반납을 적극 반대했다. 그리고 계엄군의 광주 재진입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퍼진 26일 저녁 무렵에는 일제히 자취를 감췄다"고 적었다.
이어 "당시 북한 간첩들에게 지령하는 무전 교신들은 우리 군 당국에 의해 포착되고 있었는데, 북한 공작원들이 암약하고 있다는 정황들은 여러 곳에서 감지됐다는 진술들이 있다"고 덧붙였다.
전 전 대통령은 "나는 세상이 나를 단죄하기 위해 '무고한 국민을 향해 총구를 겨눈' '국민을 학살한' 군대라는 오명을 덧씌운 대한민국 군인들의 명예를 되찾아줘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고 적었다.
이어 "우리 국군은 국민의 군대다. 결코, 선량한 국민을 향해 총구를 겨눌 일은 없다"며 "1980년 5월 광주에서도 계엄군은 죽음 앞에 내몰리기 직전까지 결코 시민을 향해 총을 겨누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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