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시민혁명을 거쳐서 공동체의 정체성을 획득함으로써 어렵게 달성되는 것이다. 아무데나 깃발만 꽂아놓고 국가라고 우기면 곤란하다. 그런데 그런 엉성한 나라들이 아직도 많다.
의무교육은 6.25동란 중에 처음 시행되었다. 6.25로 잿더미가 된 나라에 돈이 남아돌아서 의무교육을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이 안보의 토대이자 끝끝내 지켜야 할 마지막 보루였기 때문이다. 밥은 굶어도 애들은 가르쳐야 했다. 필사적이었다.
그리고 60년 세월이 흘렀다. 6.25 당시 한국의 1인당 GDP는 50달러였다. 그나마 잿더미가 되어 사라졌다. 그동안 소득은 몇백배로 늘었는데 아직 의무교육의 헌법정신조차도 제대로 살려내지 못하고 있다. 이게 될 말인가?
한솥밥을 먹는다는 말이 있다. 공동체는 거기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먹는 것이 다르고, 입는 옷이 다르고, 서로 결혼하지 않으면 국가는 탄생할 수 없다. 붕괴되고 만다.
리비아가 왜 저 꼴이 되었겠는가? 대통령은 사람을 선출하는 것이다. 홍길동을 선출하거나 혹은 이말순을 선출하거나다. 그런데 부족주의가 만연한 아프리카에서 개인은 의미가 없다. 대신 가문이 대표성을 가진다.
아프리카에서 투표를 하자면 가문에 투표는게 맞다. 왜? 교육이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글 모르는 사람이 가문의 어른이 시키는데로 할 건데, 개인을 선출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뭘 믿고? 민주주의 참으로 쉽지 않다.
재스민 혁명에도 불구하고 사우디 왕가는 건재하다. 왜인가? 갈아치우자면 사람이 아니라 가문을 갈아치워야 하는데, 사우디 왕가만큼 명성있는 가문이 사우디에 없기 때문이다. 개인? 개인은 부족주의가 만연한 아랍국가에서 그다지 존재감이 없다. 거기서는 반드시 가문을 끼고 있어야 이야기가 된다.
왜 개인의 존재감이 없는가? 첫째 교육이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 공동체가 충분히 건설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사람이 모여있는다고 해서 공동체는 아니다. 서로간에 의사소통의 코드가 맞아야 한다. 그 코드는 근대 시민혁명을 통해서 달성된다. 같은 광장에 서 있었던 체험을 공유해야 한다.
무엇인가? 부족주의 시스템 하에서는 단지 깃발을 내걸었을 뿐 제대로 된 국가가 아닌 것이다. 선진국 영국에서 왜 폭동이 일어났겠는가? 보수꼴통 캐머론 총리는 그게 다 페이스북 때문이라고 헛소리를 했다는데 과연 이게 페이스북과 트위터 때문인가? 스마트폰이 영국을 망쳤나? 영국은 옛날부터 축구장에서 훌리건들이 난리를 쳤다. 그때 페이스북은 없었다.
영국은 제대로 된 근대시민혁명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시민적 정체성이 옳게 형성되어 있지 않다. 대신 계급적 정체성을 가져서 이튼스쿨을 나온 잘난 귀족들이나 영국신사인 척하고 있을 뿐 노동자들은 국가에 그다지 소속감이 없다.
왜? 한솥밥을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귀족들은 귀족밥 먹었고 노동자들은 노동자밥 먹었다. 그 갈등은 영화 타이타닉에 잘 묘사되어 있다. 주인공은 하층민이라는 이유로 괄시를 당한다. 타이타닉의 침몰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잘난 대영제국의 침몰을 상징한다. 왜? 그 더러운 인간차별 때문에.
6월 항쟁의 그날, 우리는 함께 그 거리에 서 있었다. 3.1에서 4.19로, 5.18로, 면면히 이어온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에게 충고할 자격이 있고 권리가 있다. 잘못된 것을 잘못이라고 말할 자격이 있다. 타인이 잘못 가면 ‘그건 아니잖아!’ 하고 말할 권리를 우리는 가진다. 한국인에게는 그게 있다. 공감대가 되어 있다.
영국인들은 시민혁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이야 뭐를 하든? 니가 뭔데?’ 이렇게 된다. 아직도 시위대를 기마경찰이 말 타고 진압한다. 국민을 졸로 보는 것이다. 시민을 개쫓듯 한다.
일본인들도 비슷하다. 쓰나미로 잿더미가 되었는데도 사유재산이라고 학교 교실조차 이용하지 못하는 일이 있었다. 학교 운동장에 쓰나미로 버려진 자동차가 길을 막고 있어서 구조대가 접근을 못하는데도 사유재산이라고 그걸 건드리지 못한다는 거다. 웃기셔 정말!
왜 일본은 저다지도 한심할까? 이유는 단 하나다. 근대시민혁명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공동체의식이 그들에게는 없는 것이다. 한류반대 데모만 봐도 그렇다. 일본인 6천명이 데모를 해도 상업방송인 후지TV가 콧방귀도 뀌지 않는 것은 역시 공동체적 정체성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뭐 이건 잘 하는 짓이다만.) 한국이라면 다르다. 크게 공론이 일어나 어떻게든 정리가 된다.
“남이야 전봇대로 콧구멍을 쑤시든 말든 니가 뭔데?”
이게 일본인 생각이다. 심지어 총리조차도 ‘원전이 터진 건 후쿠시마의 문제가 아닌가? 총리인 내가 무례하게 거기를 왜 가? 후쿠시마 현 지사가 부담스럽게 여길건뎅? 현 지사의 입장을 존중해야지.’ 하고 몇 개월 동안 찾지 않았다.
원자로가 터져서 국민이 죽어가도 총리가 모른체 하는 나라 일본, 이건 심각한 거다. 야꾸자 문제 하나 처리 못하는게 일본사회다. 일본에는 아직도 부라꾸민 문제가 있다. 고려 때의 향소부곡 비슷한 거다. 백정마을 같은건데 국가가 해결할 의지가 전혀 없다.
물론 일본에도 공동체의식은 있다. 그러나 그 공동체는 국가단위가 아닌 부족단위다. 부족의 일에는 목숨걸고 나서는게 일본인이다. 그러나 어느 선을 넘으면 갑자기 바보가 되는게 또 일본인이다.
간 나오토 총리의 등장 이전에 일본 총리들은 무려 4명이 연속해서 세습총리였다고 한다. 이건 뭐 개인이 아닌 부족의 족장을 신임하는 것이다.
◎ 왜 사우디는 민주화의 가망이 없는가? - 개인이 아닌 가문을 보고 판단하는데, 가문으로 논하면 사우디 왕가를 능가할 가문이 없기 때문이다.
◎ 왜 일본은 4연속 세습총리가 나오는가? - 개인이 아닌 봉건영주를 보고 판단하는 건데 명문가 출신이 아닌 개인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민주화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공동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625 직후 국군은 이북출신이 상층부를 전부 장악하고 있었고 그들이 군량미를 대거 빼돌려서 국군은 굶고 있었다. 군납된 통조림은 빼돌려져 남대문 시장에서 팔리고 있었고 군인은 배가 고파서 민가의 감자밭을 털어먹었다.
그 때문에 박정희의 쿠데타가 쉽게 성공한 것이다. 이승만이 이북출신이기 때문에 그 패거리들이 군부를 전부 장악한 것이다. 그들은 극도로 부패했고 그 부패상은 일본군이 닥치자 여러명의 첩과 자식들을 태운 수십대의 가마행렬을 먼저 피난시킨 장개석 군대의 부패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민주주의는 개인을 중심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 철저하게 개인이어야 한다. 그러나 공동체의 건설이 충분하지 않으면 가문이니, 부족이니, 군벌이니, 꽌시니 하는 패거리들이 개인을 대리하게 된다. 개인의 존재감이 없기 때문이다.
인도에서는 공장 하나 설립하는데 무려 80개의 기관으로부터 80가지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인도의 카스트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신분계급이 아니다. 일종의 직업집단이다. 직업의 숫자만큼 카스트가 있다.
과거 식민지시절 영국에서 인도산 수공업제 면직물을 가져가지 않아 한 도시 전체가 굶어죽은 일도 있다고 한다. 그 도시의 주민 수십만이 모두 면직물 수공업에 종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그들을 구할 수 없었다.
직업이 다르면 완전히 다른 세계다. 카스트가 다르면 같은 국가의 국민도 아니다. 그러므로 인도에서 자동차공장을 짓자면 인력거 카스트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식으로 된다. 인력거를 끄는 릭샤왈라 카스트 외에도, 자전거로 끄는 사이클릭샤왈라 카스트, 오토바이로 끄는 오토릭샤왈라 카스트 등 참견하는 집단이 매우 많다. 관련된 직업집단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는 것이다.
인도에서는 카스트가 일종의 부족이고 가문이다. 인도에서 국가는 아직 덜 만들어져 있다. 인도에서는 카스트가 사생결단이 될 수 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카스트 전체가 굶어죽은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인도에서는 카스트에 가담하지 않으면 개인의 생존이 담보되지 않는다.
어떤 외국인이 인도에서 목격한 일인데, 외국선교사가 인도인 부인과 결혼했다고 한다. 그 선교사가 자리를 비우자 시중을 들던 하인들이 돌연 부인을 아랫사람처럼 천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인들의 카스트가 그 선교사 부인의 카스트보다 높았기 때문이다.
이게 그냥 교육만으로 해결될까? 천만에. 교육은 인도도 요즘 많이 하고 있다.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한 것이다. 속박에서 풀려나 평등한 개인을 만들어야 하고 다시 그 개인을 묶어주는 끈이 있어야 한다. 법과 제도로는 불충분하다. 법으로 논하면 인도에 카스트는 없어진 지 오래다.
민주주의가 그냥 되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사회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부족과 카스트와 가문은 해체되어야 한다. 그냥 해체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대체재가 있어야 한다. 근대시민혁명을 거쳐야 한다. 한솥밥을 먹고 한 광장에 서야 한다. 그 광장에서 촛불을 들어보아야 한다. 속박에서 풀려났다고 자유인이 되는건 아니다. 그 개인을 보호할 장치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체험의 공유다. 같은 밥을 먹어야 그것은 달성된다.
인도인들은 같은 밥을 안 먹기 때문에 저렇게 된 것이다. 낮은 카스트의 사람이 쓰던 법관 사무실을 새로 부임해온 법관이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를 했다고 한다. 불결해졌으므로 정화의식을 해야 한다는 거다. 같은 공간에 머무르기조차도 거부하는 거다.
시민혁명의 그 광장에 함께 섰을때라야 그런 경험의 공유가 있어야 ‘내가 내돈으로 내맘대로 하는데 니가 무슨 상관이야?’ 하는 이기심의 논리를 깰 수 있다. 비로소 인간이 될 수 있다. 인간의 존엄성은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전쟁나면 다 죽는다. 창의하면 나눠쓴다. 한글은 세종대왕이 발명했지만 부자도 빈자도 가리지 않고 쓴다. 전구는 에디슨이 만들었지만 그 혜택은 누구나 본다. 거기에는 차별도 없다. 전쟁터의 총알이 강남이라고 비켜가랴?
왜 우리가 한솥밥을 먹어야 하는가? 우리가 같은 지구를 공유하고, 같은 나라를 공유하고, 같은 언어를 공유하고, 같은 문화를 공유하고, 같은 역사를 공유하고, 그러한 공유에 의해서 오늘날의 네가 있고, 내가 있는 것이며, 서로 공유할수록 그 가치는 증대되는 것이며, 빛나는 것이며, 내가 네게, 네가 내게 말을 걸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내가 쓰는 페이스북을 다른 사람도 써야 의미가 있다. 같은 영화를 봐야 그 영화에 대해서 대화할 수 있다. 같은 음악을 들은 사람이 서로 친구가 될 수 있다. 통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근거다.
심판은 끝났다. 이제 촛불들고 끌어내리러 가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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