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둘째 주 미국 주식시장은 세계 금융위기가 본격화하던 2008년 11월의 데자뷔다. 정상적 시장이라면 있을 수 없는 폭등과 폭락이 하루 간격으로 되풀이되고 있다.
국제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미국 신용등급을 한 계단 내린(8월5일) 뒤 첫 개장일인 8월8일, 미국 다우존스는 634.76포인트나 떨어졌다. 그러나 8월9일에는 429.29포인트 올랐고, 다음 날엔 519.83포인트 내렸다. 8월10일의 폭등 규모는 423.37포인트다. 다우지수에서 400포인트 이상 규모의 등락이 번갈아가며 3일 이상 잇따른 것은 2008년 11월 이후 처음이다. S&P500이나 나스닥 등 다른 주요 지수도 동일한 궤도를 나타내고 있다. 주가 변동이 이처럼 심하다는 것 자체가 (오르고 내림에 상관없이) 주식시장의 리스크가 그만큼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주식시장의 폭·등락과 함께 미국 국채(재무부 채권) 가격은 8월 둘째 주 들어 일관되게 오르고 있다. 10년 만기 국채의 경우, 8월9일 한때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런데 일반 주식과 달리 미국 국채 가격의 지속적 상승은 글로벌 금융시장이 매우 불안할 때 발생하는 사건이다. 미국채는 초강대국인 미국 정부가 발행하는 채권인 만큼 적어도 원금과 이자가 보장되는 ‘무위험(risk-free) 증권’으로 간주된다(<시사IN> 제204호 참조). 그래서 투자자가 미국채로 몰리는 것은 다른 증권(다른 나라 국채·주식·회사채·파생상품 등)이 그만큼 불안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미국채는 일종의 ‘최후 보루’인 것이다.
미국 국채가 ‘위험 자산’ 되면 재앙
최근 미국 국채 상승의 원인 중 하나는 프랑스의 국가 신용등급이 최우량(AAA)에서 한 계단 낮춰진다는 소문이다. 미국 투자은행 모건스탠리의 채권 부문 애널리스트인 조너선 메리모어는 금융 전문지 <마켓워치> 인터뷰에서 “유럽 재정위기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투자자들이 자산 가치를 보전할 피난처를 찾으면서 미국 국채 수요가 크게 늘어나리라 보인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미국 국채가 안전자산으로 믿어지는 한 세계 금융질서의 틀은 그럭저럭 유지될 수 있다. 한국·중국·일본 등 동북아 국가들은 외환보유고 중 2조 달러 이상을 미국 국채로 가지고 있다. 미국 국채가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신뢰를 유지한다면, 그래서 지금처럼 금융 변동성이 큰 시기에 오히려 가격이 오른다면 동북아 국가들의 ‘재산’ 가치는 보존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최후 보루’마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8월5일 S&P의 미국 신용등급 강등이 그것이다. 무디스는 미국의 최우량 등급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그러나 ‘부정적 전망’은 철회하지 않았다. 재정 적자가 획기적으로 감축되지 않고 이를 둘러싼 미국 정치권의 내홍이 진정되지 않을 경우, 향후 1~2년 내에 미국 신용등급을 내릴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불황기의 정부 지출 삭감은 결코 쉽지 않다. 재정 삭감을 둘러싼 민주당·공화당 간 갈등도 수그러들지 않으리라 점쳐진다(22~24쪽 딸린 기사 참조). 이런 사태가 중첩되면서 무디스나 피치가 미국 신용등급을 내리고, 이에 따라 시장이 점점 더 미국 국채를 더 이상 ‘무위험 자산’이 아니라고 믿게 되는 것이 정말 두려운 사태다. 지금까지 글로벌 금융 질서의 심판 혹은 ‘규칙 그 자체’였던 미국 국채가 일반적인 ‘위험 자산’으로 여겨지게 되는 그날, ‘금융 아마겟돈’은 발발할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 정치권이 재정 적자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결단을 내리면 어떨까. 시민들과 정치권·신용평가사들이 모두 기뻐하고, 미국 신용등급 회복으로 금융시장이 정상화되는 행복한 시나리오가 실현될 수 있을까.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재정 적자 감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로 인해 복지 서비스는 물론 경기 촉진 수단까지 제거되고 국민경제의 침체와 사회불안으로 이어져 신용등급이 하락하는 경로도 가능하다. 더욱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 상황을 보면 재정 적자 정책의 포기가 미국 경제에 어떤 타격을 줄 것인지 명확해진다.
팽창적 통화정책이 실패한 이유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미국(과 다른 나라 정부들)은 공황을 막기 위해 두 가지 무기를 사용했다. 하나는 ‘팽창적 통화정책’이다. 한마디로 돈의 가격(이자)을 낮춘다는 이야기로, 금융기관이 싼 비용으로 많은 돈을 빌려 시중에 많이 풀게 하는 것이 기본 의도다. 이를 위해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연준)는 기준금리인 연방기금 금리를 2008년 12월부터 0~0.25% 수준으로 낮췄다.
이에 더해 ‘돈 그 자체의 규모’도 크게 늘렸다. 지금까지 두 차례에 걸친 ‘양적 완화’(Quantitative Easing)가 그것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연준이 2조 이상의 달러화를 찍어 미국 재무부를 통해 시중에 뿌렸다고 이해하면 된다. 자동차가 석유로 움직인다면, 금융시장은 돈으로 움직인다. 돈의 물리적 규모를 늘리고, 금융기관이 낮은 금리로 싸게 이용할 수 있게 한 것이 팽창적 통화정책의 핵심이다. 그런데 이런 통화정책은 일단 실패한 것으로 평가된다. 풀린 돈이 금융기관으로 전달되었을 뿐 실물경제로 흘러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불황에 대처하기 위한 또 한 가지 수단은 재정 적자다. 통화정책에서는 정부가 돈을 풀 수는 있으나 그 돈의 사용처에까지 개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재정정책은 조금 더 직접적이다. 오바마 행정부의 경우, 빚을 내서 청정에너지 등 신산업과 인프라에 투자하고 실업·교육 등 복지 서비스도 확장하려 했다. 이렇게 해야 돈이 실물경제에 전달된다. 통화정책이 무용한 상황에서 적자 재정을 포기하는 것은 그나마 미국의 실물경제를 버텨온 유효한 정책 수단을 폐기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오바마 정부는 부채 한도 협상에서 2조4000억 달러 규모의 재정 적자 감축에 합의한 상태다.
그렇다면 팽창적 통화정책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일까. 시중에 풀린 많은 돈이 실물경제로 전달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역설적으로 0%에 가까운 기준금리 때문이었다. 은행 처지에서 기준금리가 0%라는 것은 사실상 ‘공짜’로 돈을 빌릴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 돈을 굳이 위험한 ‘대출 영업’에 사용할 이유가 없었다. 훨씬 안전한 사업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미국 국채에 대한 투자다.
미국채는 금리가 매우 낮은 편이다. 10년 이상의 장기 국채는 3%, 단기는 2% 정도. 그러나 많은 돈을 공짜로 빌려 국채에 투자하면 큰 수익을 올릴 수 있다. 박리다매(薄利多賣). 혹은 사실상 0%인 기준금리로 자금을 조달해 미국채를 사고, 이 미국채를 다시 담보로 돈을 빌려 주식이나 파생상품에 투자하는 기법도 동원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상업은행의 준비금(Reserve Holdings:예금 등 부채 지급을 위해 은행 내부에 유보하는 현금성 자산)도 엄청나게 늘었다.
미국 상업은행들의 준비금은 2007년에 200억 달러 정도였는데 2011년에는 1조4000억 달러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팽창적 통화정책으로 풀린 돈은 미국 금융권 내에서 순환하며 주가를 올리고 금융 엘리트들의 배만 불린 것이다.
연준은 미국 경제 포기했나
이와 대조적으로 시중에는 돈이 말랐다. 연준의 자금흐름 계정(Flow of Funds Accounts)에 따르면, 미국의 ‘비법인 업체(Non Cor–porate Business)’가 은행에서 대출한 돈이 2007년에는 5260억 달러였다. 그런데 2009년에는 대출은커녕 3460억 달러를 상환한 것으로 나타난다. 2011년 8월 현재도 수백억 달러를 상환만 하고 있다. ‘비법인 업체’는 주식회사나 유한회사가 아니라 주로 서민경제에 관련된 작은 기업이나 자영업체다. 이 부문의 경제 주체들은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기는커녕 상환 독촉에 시달렸던 것이다. 이러니 일자리가 늘어날 수 없고 서민 생활이 개선될 리 없었다.
이런 실패는 연준도 인정한다. 그동안 연준은 애써 미국 경제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유지해왔다. 지난 5월부터 경기가 다시 침체되기 시작했으나 이 또한 ‘경기 회복으로 가는 도정에서 나타나는 일시적 둔화’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8월9일 열린 연방공개시장위원회에서 연준은 태도를 완전히 바꿨다. 성명서에서 연준은 “올해 들어 지금까지의 경제성장은 위원회가 기대했던 것보다 낮았다”라고 토로했다. “경제지표들은 최근 몇 달 동안 전체 노동시장 환경이 악화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실업률은 증가했다. 가계지출은 침체되었고, 사업용 구조물에 대한 투자도 여전히 약하다. 주택 부문도 침체되어 있는 상태다.” 이후 전망도 밝지 않다. “미국 경제는 (위원회가) 이전에 예측했던 것보다 더 늦게 회복될 것으로 본다. 실업률도 (예측보다) 서서히 개선될 것이다.” 연준은 자신의 소관 업무인 통화정책이 사실상 실패했다고 자백한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향후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연준은 “적어도 오는 2013년 중반까지는 0~0.25%의 금리를 유지하겠다”라고 약속했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은행들이 공짜로 돈을 빌릴 수 있도록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구체적 시기까지 특정해서 어느 날 갑자기 새로운 비용(기준금리 인상으로 인한 은행의 이자 부담)이 발생할 리스크로부터 월스트리트를 해방시켰다. 이에 더해 세 번째 양적 완화까지 슬며시 암시했다. 돈도 주고 이자도 현재의 0% 수준 그대로 유지할 터이니 마음 놓고 장사하라는 뜻이다.
불황이 심화될 수 있는 시기, 연준은 시장에 뭔가 충격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시장도 연준만 애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이미 기준금리가 0%에 가깝기에 이자율을 더 내릴 수는 없다. 양적 완화도 두 번이나 실시했지만, 그 효과는 마약처럼 시한부로만 시장의 활력을 유지시킬 뿐이었다. 그래서 기껏 ‘새로운’ 조처로 내놓은 것이 ‘2013년 중반’이라는 시한이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효과는 있었다. 8월9일 미국 증시는 폭등했다. 그러나 연준은 이렇게 풀린 돈이 실물경제와 서민에게 흘러갈 수 있는 방안은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일자리 문제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사실상 스스로도 실패했다고 인정한 정책을 계속 수행한다며 금융자본의 이익만은 보장하기로 한 것이다.
오펜하이머 펀드의 제리 위브먼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마켓워치> 인터뷰에서 “경제 주체들이 돈에 대한 문제를 느낀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돈은 지금도 엄청나게 공급되고 있으며 싸게 빌릴 수 있다”라며 연준을 비판했다. 연준이 8월9일 실제로 한 일은 사실상 ‘경제 상황이 앞으로도 좋지 않을 것’이며 지금까지 해온 것 이외에는 ‘어떤 시도도 자제하겠다’는 고백에 불과하다. 물론 연준 의장이 공식 석상에서 슬쩍 이런저런 말을 흘려 시장을 움직이려는 신비주의 전략은 계속되겠지만 이 정도로 미국 경제의 하강을 멈출 수는 없을 것이다.
미국의 위기에서 전 세계의 위기로
현재까지 나타난 상황으로 미루어보면, 적어도 단기적으로 미국 경제의 침체는 명약관화하다. 정부 주도 사업이 축소되고 이 부문 노동자들이 거리로 쫓겨날 것이다. 더욱이 실업보험 등 사회안전 프로그램이 축소된다. 소비지수는 더욱 낮아질 것이다. 이에 더해 오바마 행정부가 야심만만하게 추진해온 신산업 투자도 순조롭지 않을 것이다.
통화 팽창은 계속되겠지만 그 혜택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미국 금융 엘리트에게만 집중될 것이다. 그리고 금융자본에 유리한 저금리 환경과 세 번째 양적 완화는 대외적으로 달러화 가치를 더욱 내려 기축통화 지위를 타격할 것이다. 달러 가치 절하는 미국 수출 대기업에게는 매우 유리한 영업 환경을 제공하겠지만, 이는 국제무역 경쟁을 격화시켜 수출 주도 시스템인 동아시아를 압박할 것이다. 경쟁적 통화가치 절하가 전 지구적으로 성행할 수도 있다. 미국 국채 신뢰가 더욱 떨어져 ‘금융 아마겟돈’으로 몰아갈 수도 있다. 최근 미국 증시의 불안한 행보는 이런 염려를 반영한 것이다.
국제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미국 신용등급을 한 계단 내린(8월5일) 뒤 첫 개장일인 8월8일, 미국 다우존스는 634.76포인트나 떨어졌다. 그러나 8월9일에는 429.29포인트 올랐고, 다음 날엔 519.83포인트 내렸다. 8월10일의 폭등 규모는 423.37포인트다. 다우지수에서 400포인트 이상 규모의 등락이 번갈아가며 3일 이상 잇따른 것은 2008년 11월 이후 처음이다. S&P500이나 나스닥 등 다른 주요 지수도 동일한 궤도를 나타내고 있다. 주가 변동이 이처럼 심하다는 것 자체가 (오르고 내림에 상관없이) 주식시장의 리스크가 그만큼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주식시장의 폭·등락과 함께 미국 국채(재무부 채권) 가격은 8월 둘째 주 들어 일관되게 오르고 있다. 10년 만기 국채의 경우, 8월9일 한때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런데 일반 주식과 달리 미국 국채 가격의 지속적 상승은 글로벌 금융시장이 매우 불안할 때 발생하는 사건이다. 미국채는 초강대국인 미국 정부가 발행하는 채권인 만큼 적어도 원금과 이자가 보장되는 ‘무위험(risk-free) 증권’으로 간주된다(<시사IN> 제204호 참조). 그래서 투자자가 미국채로 몰리는 것은 다른 증권(다른 나라 국채·주식·회사채·파생상품 등)이 그만큼 불안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미국채는 일종의 ‘최후 보루’인 것이다.
미국 국채가 ‘위험 자산’ 되면 재앙
최근 미국 국채 상승의 원인 중 하나는 프랑스의 국가 신용등급이 최우량(AAA)에서 한 계단 낮춰진다는 소문이다. 미국 투자은행 모건스탠리의 채권 부문 애널리스트인 조너선 메리모어는 금융 전문지 <마켓워치> 인터뷰에서 “유럽 재정위기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투자자들이 자산 가치를 보전할 피난처를 찾으면서 미국 국채 수요가 크게 늘어나리라 보인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미국 국채가 안전자산으로 믿어지는 한 세계 금융질서의 틀은 그럭저럭 유지될 수 있다. 한국·중국·일본 등 동북아 국가들은 외환보유고 중 2조 달러 이상을 미국 국채로 가지고 있다. 미국 국채가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신뢰를 유지한다면, 그래서 지금처럼 금융 변동성이 큰 시기에 오히려 가격이 오른다면 동북아 국가들의 ‘재산’ 가치는 보존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최후 보루’마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8월5일 S&P의 미국 신용등급 강등이 그것이다. 무디스는 미국의 최우량 등급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그러나 ‘부정적 전망’은 철회하지 않았다. 재정 적자가 획기적으로 감축되지 않고 이를 둘러싼 미국 정치권의 내홍이 진정되지 않을 경우, 향후 1~2년 내에 미국 신용등급을 내릴 수 있다는 이야기다.
ⓒAP Photo 국제 신용평가사 S&P가 신용등급을 강등한 이후 미국 증시는 급등과 급락을 반복하고 있다. 이는 주식시장의 리스크가 커졌음을 의미한다. |
그러나 불황기의 정부 지출 삭감은 결코 쉽지 않다. 재정 삭감을 둘러싼 민주당·공화당 간 갈등도 수그러들지 않으리라 점쳐진다(22~24쪽 딸린 기사 참조). 이런 사태가 중첩되면서 무디스나 피치가 미국 신용등급을 내리고, 이에 따라 시장이 점점 더 미국 국채를 더 이상 ‘무위험 자산’이 아니라고 믿게 되는 것이 정말 두려운 사태다. 지금까지 글로벌 금융 질서의 심판 혹은 ‘규칙 그 자체’였던 미국 국채가 일반적인 ‘위험 자산’으로 여겨지게 되는 그날, ‘금융 아마겟돈’은 발발할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 정치권이 재정 적자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결단을 내리면 어떨까. 시민들과 정치권·신용평가사들이 모두 기뻐하고, 미국 신용등급 회복으로 금융시장이 정상화되는 행복한 시나리오가 실현될 수 있을까.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재정 적자 감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로 인해 복지 서비스는 물론 경기 촉진 수단까지 제거되고 국민경제의 침체와 사회불안으로 이어져 신용등급이 하락하는 경로도 가능하다. 더욱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 상황을 보면 재정 적자 정책의 포기가 미국 경제에 어떤 타격을 줄 것인지 명확해진다.
팽창적 통화정책이 실패한 이유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미국(과 다른 나라 정부들)은 공황을 막기 위해 두 가지 무기를 사용했다. 하나는 ‘팽창적 통화정책’이다. 한마디로 돈의 가격(이자)을 낮춘다는 이야기로, 금융기관이 싼 비용으로 많은 돈을 빌려 시중에 많이 풀게 하는 것이 기본 의도다. 이를 위해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연준)는 기준금리인 연방기금 금리를 2008년 12월부터 0~0.25% 수준으로 낮췄다.
이에 더해 ‘돈 그 자체의 규모’도 크게 늘렸다. 지금까지 두 차례에 걸친 ‘양적 완화’(Quantitative Easing)가 그것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연준이 2조 이상의 달러화를 찍어 미국 재무부를 통해 시중에 뿌렸다고 이해하면 된다. 자동차가 석유로 움직인다면, 금융시장은 돈으로 움직인다. 돈의 물리적 규모를 늘리고, 금융기관이 낮은 금리로 싸게 이용할 수 있게 한 것이 팽창적 통화정책의 핵심이다. 그런데 이런 통화정책은 일단 실패한 것으로 평가된다. 풀린 돈이 금융기관으로 전달되었을 뿐 실물경제로 흘러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불황에 대처하기 위한 또 한 가지 수단은 재정 적자다. 통화정책에서는 정부가 돈을 풀 수는 있으나 그 돈의 사용처에까지 개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재정정책은 조금 더 직접적이다. 오바마 행정부의 경우, 빚을 내서 청정에너지 등 신산업과 인프라에 투자하고 실업·교육 등 복지 서비스도 확장하려 했다. 이렇게 해야 돈이 실물경제에 전달된다. 통화정책이 무용한 상황에서 적자 재정을 포기하는 것은 그나마 미국의 실물경제를 버텨온 유효한 정책 수단을 폐기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오바마 정부는 부채 한도 협상에서 2조4000억 달러 규모의 재정 적자 감축에 합의한 상태다.
그렇다면 팽창적 통화정책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일까. 시중에 풀린 많은 돈이 실물경제로 전달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역설적으로 0%에 가까운 기준금리 때문이었다. 은행 처지에서 기준금리가 0%라는 것은 사실상 ‘공짜’로 돈을 빌릴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 돈을 굳이 위험한 ‘대출 영업’에 사용할 이유가 없었다. 훨씬 안전한 사업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미국 국채에 대한 투자다.
ⓒReuter=Newsis 미국의 재정 적자 축소는 일자리 환경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위는 로스앤젤레스의 취업박람회장을 찾은 구직자들. |
미국채는 금리가 매우 낮은 편이다. 10년 이상의 장기 국채는 3%, 단기는 2% 정도. 그러나 많은 돈을 공짜로 빌려 국채에 투자하면 큰 수익을 올릴 수 있다. 박리다매(薄利多賣). 혹은 사실상 0%인 기준금리로 자금을 조달해 미국채를 사고, 이 미국채를 다시 담보로 돈을 빌려 주식이나 파생상품에 투자하는 기법도 동원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상업은행의 준비금(Reserve Holdings:예금 등 부채 지급을 위해 은행 내부에 유보하는 현금성 자산)도 엄청나게 늘었다.
미국 상업은행들의 준비금은 2007년에 200억 달러 정도였는데 2011년에는 1조4000억 달러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팽창적 통화정책으로 풀린 돈은 미국 금융권 내에서 순환하며 주가를 올리고 금융 엘리트들의 배만 불린 것이다.
연준은 미국 경제 포기했나
이와 대조적으로 시중에는 돈이 말랐다. 연준의 자금흐름 계정(Flow of Funds Accounts)에 따르면, 미국의 ‘비법인 업체(Non Cor–porate Business)’가 은행에서 대출한 돈이 2007년에는 5260억 달러였다. 그런데 2009년에는 대출은커녕 3460억 달러를 상환한 것으로 나타난다. 2011년 8월 현재도 수백억 달러를 상환만 하고 있다. ‘비법인 업체’는 주식회사나 유한회사가 아니라 주로 서민경제에 관련된 작은 기업이나 자영업체다. 이 부문의 경제 주체들은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기는커녕 상환 독촉에 시달렸던 것이다. 이러니 일자리가 늘어날 수 없고 서민 생활이 개선될 리 없었다.
이런 실패는 연준도 인정한다. 그동안 연준은 애써 미국 경제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유지해왔다. 지난 5월부터 경기가 다시 침체되기 시작했으나 이 또한 ‘경기 회복으로 가는 도정에서 나타나는 일시적 둔화’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8월9일 열린 연방공개시장위원회에서 연준은 태도를 완전히 바꿨다. 성명서에서 연준은 “올해 들어 지금까지의 경제성장은 위원회가 기대했던 것보다 낮았다”라고 토로했다. “경제지표들은 최근 몇 달 동안 전체 노동시장 환경이 악화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실업률은 증가했다. 가계지출은 침체되었고, 사업용 구조물에 대한 투자도 여전히 약하다. 주택 부문도 침체되어 있는 상태다.” 이후 전망도 밝지 않다. “미국 경제는 (위원회가) 이전에 예측했던 것보다 더 늦게 회복될 것으로 본다. 실업률도 (예측보다) 서서히 개선될 것이다.” 연준은 자신의 소관 업무인 통화정책이 사실상 실패했다고 자백한 것이다.
ⓒAP Photo 의회 청문회에 출석한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위원회 위원장. |
불황이 심화될 수 있는 시기, 연준은 시장에 뭔가 충격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시장도 연준만 애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이미 기준금리가 0%에 가깝기에 이자율을 더 내릴 수는 없다. 양적 완화도 두 번이나 실시했지만, 그 효과는 마약처럼 시한부로만 시장의 활력을 유지시킬 뿐이었다. 그래서 기껏 ‘새로운’ 조처로 내놓은 것이 ‘2013년 중반’이라는 시한이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효과는 있었다. 8월9일 미국 증시는 폭등했다. 그러나 연준은 이렇게 풀린 돈이 실물경제와 서민에게 흘러갈 수 있는 방안은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일자리 문제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사실상 스스로도 실패했다고 인정한 정책을 계속 수행한다며 금융자본의 이익만은 보장하기로 한 것이다.
오펜하이머 펀드의 제리 위브먼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마켓워치> 인터뷰에서 “경제 주체들이 돈에 대한 문제를 느낀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돈은 지금도 엄청나게 공급되고 있으며 싸게 빌릴 수 있다”라며 연준을 비판했다. 연준이 8월9일 실제로 한 일은 사실상 ‘경제 상황이 앞으로도 좋지 않을 것’이며 지금까지 해온 것 이외에는 ‘어떤 시도도 자제하겠다’는 고백에 불과하다. 물론 연준 의장이 공식 석상에서 슬쩍 이런저런 말을 흘려 시장을 움직이려는 신비주의 전략은 계속되겠지만 이 정도로 미국 경제의 하강을 멈출 수는 없을 것이다.
미국의 위기에서 전 세계의 위기로
현재까지 나타난 상황으로 미루어보면, 적어도 단기적으로 미국 경제의 침체는 명약관화하다. 정부 주도 사업이 축소되고 이 부문 노동자들이 거리로 쫓겨날 것이다. 더욱이 실업보험 등 사회안전 프로그램이 축소된다. 소비지수는 더욱 낮아질 것이다. 이에 더해 오바마 행정부가 야심만만하게 추진해온 신산업 투자도 순조롭지 않을 것이다.
통화 팽창은 계속되겠지만 그 혜택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미국 금융 엘리트에게만 집중될 것이다. 그리고 금융자본에 유리한 저금리 환경과 세 번째 양적 완화는 대외적으로 달러화 가치를 더욱 내려 기축통화 지위를 타격할 것이다. 달러 가치 절하는 미국 수출 대기업에게는 매우 유리한 영업 환경을 제공하겠지만, 이는 국제무역 경쟁을 격화시켜 수출 주도 시스템인 동아시아를 압박할 것이다. 경쟁적 통화가치 절하가 전 지구적으로 성행할 수도 있다. 미국 국채 신뢰가 더욱 떨어져 ‘금융 아마겟돈’으로 몰아갈 수도 있다. 최근 미국 증시의 불안한 행보는 이런 염려를 반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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