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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November 1, 2015

'황태성 처형' 내막... "김종필 이제는 밝혀야" [인터뷰] 전명혁 교수 "황태성 사형... 유일한 생존 증언자는 김종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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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성, 1928년 9월 15일 치안유지법사건으로 체포되어 경기도 경찰부 형사과에서 촬영한 사진. ⓒ 국사편찬위원회

어려서부터 박정희(1917~1979)는 형의 친구인 황태성(1906~1963)을 친형 박상희보다 더 잘 따랐다고 한다. 박정희가 대구사범과 만주군관학교 갈 때도 황태성이 조언을 해주었고, 훗날 박정희가 남로당에 입당할 때도 황태성이 보증을 서줬다고 한다. 

황태성은 북한에서 외무성·상업성·무역성 등에서 고위관리를 지내다가 김일성의 특사로 월남한다. 5·16으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와 김종필을 만나 남북통일의 길을 열겠다며 그러다가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연행됐다. 황태성은 당시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에서 조사를 받다가 끝내 총살에 처해졌다.

1963년 황태성의 총살이 집행되던 날, 박정희는 자기가 어려서부터 따르던 황태성의 사진을 보면서 "황태성 선생도 세월은 못 이기시는구나, 많이 늙으셨구나"라고 했다 한다. '야사'이기는 하지만, 권력이 얼마나 허망하고 무서운지 보여주는 일화다.

진실위에서 일했던 전명혁 박사, 그가 주장하는 '황태성 사건'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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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명혁 박사 ⓒ 전명혁
전명혁 박사는 '황태성 사건'의 전문가다. 나는 그를 지난 2004년에 처음 만났다. 당시 나는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있었고, 그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있었다. 우리는 '동종업계' 사람이었다. 

2007년, 나는 전명혁 박사를 진실화해위원회(진실위)에서 다시 '직장 동료'로 만났다. 그는 박정희-전두환 정권기의 인권침해사건을 조사하던 조사관이었고, 나는 그가 쓴 조사보고서를 영어로 번역하여 주한외국특파원·공관원과 해외학자들에게 알리는 일을 했다.

1961년, 김일성은 남로당 출신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하자, 묘한 생각에 빠졌다. 박정희의 형 박상희는 좌익이 주도하여 벌인 1949년 대구 10월 항쟁 때 사살 당했다. 황태성은 박상희의 '절친'이었다. 김일성은 황태성을 남한에 특사로 보내 남북관계 정상화를 타진하기로 한다. 김일성은 박정희와 친분이 두터운 황태성에 크게 기대를 걸었을 것이다.

박정희도 처음에는 황태성을 김일성의 밀사로 받아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황태성을 당시 서울의 최고급 호텔인 반도호텔에 수개월간이나 투숙 시키지 않았을까? 또 황태성은 북에서 많은 액수의 자금도 가지고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1년에는 북한 경제가 남한 경제보다 훨씬 발전했으므로 놀랄 일은 아니다.

전명혁 박사 약력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책임연구원,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전문위원 
- 역사학연구소 소장 역임 
- 현재 동국대 대외교류연구원 연구교수 

< 저서 및 논문 > 
- 1920년대 한국사회주의운동연구(저서) 
- 현장검증 우리역사(공저)
- 1960년대 '1차 인혁당' 연구(논문) 
- 1960년대 '동백림사건'과 정치 사회적 담론의 변화(논문) 

- 1970年代 '在日僑胞留學生 國家保安法 事件' 硏究 (논문) 
김일성이 남로당 출신 박정희를 회유하기 위해 거액의 자금을 보냈고, 그 돈이 공화당의 조직자금 등으로 쓰였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 소문의 진위를 알 길이 없다. 황태성 사건의 진실규명 작업이 박정희에 의해서 은폐되었고 그 후 이명박 정권기의 진실위에서는 재심이 기각됐기 때문이다. 진실이 사라진 곳에서 소문이 떠도는 것은 당연하다.    

1963년, 박정희는 김일성 특사인 황태성을 간첩으로 몰아 총살에 처한다. 특사를 죽인다는 것은 곧 전쟁 선포나 마찬가지다. 황태성의 총살 후 남북관계는 긴장국면으로 들 수밖에 없었다. 1968년 북한 124군 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하려 한 사건은, 특사를 간첩으로 몰아 총살한 박정희에게 김일성이 복수하려는 시도는 아니었을까?

다음은 전명혁 박사와 황태성 사건에 대하여 지난 3주간 이메일로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사형 전 "민족의 완전자주독립과 남북통일만세" 부른 황태성

- 지난 1963년 12월 14일, 박정희가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 김일성 특사인 황태성은 간첩죄로 총살을 당한다. 그 후 1968년 김일성은 김신조 등 북한특공대를 남한에 보내 청와대 습격작전을 시도한다. 1963년 황태성 총살 사건과 1968년 김신조의 청와대 습격작전과 연관성이 있다고 보는지?
"제5대 대통령 취임식을 사흘 앞둔 1963년 12월 14일 오전 9시 20분경,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인 황태성은 군 앰뷸런스에 실려 인천 교외의 어느 골짜기로 옮겨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그는 사형 집행이 되기 전 "민족의 완전자주독립과 남북통일만세"를 삼창했다고 한다.

당시 황태성은 1963년 7월 2일 육군고등군법회의에서 열린 파기환송심에서 사형을 판결 받고 대법원에 상고했다. 1963년 10월 22일 대법원에서 열린 상고심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됐다. 황태성은 이에 불복하고 1963년 11월 2일 재심을 신청하였으나 재심결정이 나기도 전에 사형이 집행됐다. 황태성이 사형되고 난 지 9개월이 지난 1964년 9월 3일, 서울고등법원은 황태성의 재심청구를 기각하는 판결을 내렸다.

1968년 1월 21일 북한의 김신조 등 124군 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한 사건이 벌어지고 이틀 후인 1월 23일, 동해 공해상에서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나포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남북한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124군부대 청와대 습격,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 등과 황태성 처형과는 직접적 관련은 없다고 여겨진다. 황태성의 처형은 5·16 쿠데타 이후, 남로당 출신인 박정희가 그의 내면에 잠재해 있던 레드 콤플렉스를 벗어나려는 시도였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 지난 2006년 황태성 유족들은 "5·16 직후 집권한 군사정부와 당시 중앙정보부가 황태성을 '간첩'으로 몰아 정치적으로 사형시켰다"고 주장하면서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요청했다. 그러나 2010년 이명박이 임명한 이영조 위원장 체제의 진실위는 "재심 사유가 없다"며 신청을 기각했다.
"황태성 사건을 황태성의 조카사위인 권상능 선생이 2006년 11월, 진실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그러나 진실위는 2010년 소위원회에서 황태성 사건이 '재심사유가 없다'고 사건을 기각하고 말았다.

그러나 진실위법 제22조(진실규명 조사개시) 3항 "위원회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으로서 진실규명사건에 해당한다고 인정할 만한 상당한 근거가 있고 진실규명이 중대하다고 판단되는 때에는 이를 직권으로 조사할 수 있다"는 조항에 의거하여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에 대해서는 조사개시를 직권으로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시행하지 않았다. 

또한 황태성은 1961년 10월 20일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1961년 12월 1일까지 43일 동안 불법구금되어 있다가 고등군법회의에 송치·기소된 것으로 확인되기 때문에 이는 형법 제124조의 불법감금죄, 형사소송법 제420조 7호, 제422조의 재심사유에 해당된다."

"황태성이 '김일성의 특사임을 증명하는 새로운 사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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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주재 CIA가 미국무장관 러스크에게 보내는 비밀문서. '황태성 사건'에 대하여 1962년 4월 27일 한국 주재 CIA가 미국 국무장관 데이빗 딘 러스크에게 보내는 이 비밀문서에 따르면 황태성이 "한국의 통일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박정희와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만나려고 시도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 국회도서관

- 당시 유족들은 황태성이 "김일성의 특사임을 증명하는 새로운 사실"이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 때 유족들이 주장했던 황태성이 "김일성의 특사임을 증명하는 새로운 사실"은 무엇이었는지? 
"황태성이 간첩이 아니라 김일성이 보낸 '특사'라고 하는 분명한 증거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증거는 형사소송법 제420조 5호(명백한 새로운 증거발견)에 따라 당연히 재심사유에 해당된다. 

첫째, 1957년~1961년 말 평양주재 소련대사관의 정치파견관을 역임했던 바딤 트카첸코의 진술에 따르면 '1961년 8월(박정희의 5·16 직후)에 남한 군부를 통하여 북측에 편지가 전달되었는데 편지에는 '나라의 평화통일 문제를 의논하기 위하여 교섭하자'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회담은 "황해(서해)의 한 섬에서 각 측 장교 2명과 서기로 구성된 대표단 사이에 진행할 것이 제의"되었고, "이 모든 사정을 참조한 북한 지도부는 교섭에 동의했다... 남한 장교들은 나라 최고지도부(박정희)의 지시로 교섭에 나섰으며 그 명의로 4가지 사항으로 된 행동방침 1. 서울과 평양에 양측 상설군사대표부를 설치하며, 2. 남과 북이 통상 관계를 맺으며, 3. 시민들의 38선 자유통행을 보장하며, 4. 우편교환을 회복할 것 등"이 제출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조선일보>(1992년 6월 21일)에 따르면, 1961년 8월 9월부터 서해 용매도와 황해도 해주에서 10여 차례 남북한 비밀정치회담이 있었다는 사실이 당시 육군첩보부대장 이철희의 발언을 통해 확인됐다. 당시 정치회담에 파견된 남한측 대표로서 김석순씨의 사진을 게재했다. 

또 <조선일보>에 따르면, 김종필도 '황(태성)은 협상을 위해 (김일성의 특사로)내려왔다, 내가 그를 만난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황태성이 김일성의 밀사였다는 사실을 김종필이 뒷받침했다고 보도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지난 2001년 8월 17일 방영된 MBC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박정희와 레드 컴플렉스-황태성 간첩사건>에도 상세히 언급되어 있다.

셋째, '황태성 사건'에 대하여 1962년 4월 27일 한국주재 CIA가 미국 국무장관 데이비드 딘 러스크에게 보내는 비밀문서에 따르면, 황태성이 "한국의 통일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박정희와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만나려고 시도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러한 세 가지 사실은 형사소송법 제420조 5호(명백한 새로운 증거발견)에 따른 재심사유가 될 수 있으며 황태성이 박정희와 김종필이 주장했듯이 그저 간첩이 아니라 김일성의 특사였다는 분명한 증거인 것이다."

- 황태성은 경북 출신의 사회주의자·독립운동가로, 일제 강점기 박정희의 '멘토'와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런데 왜 박정희는 '김일성 특사'로 남하한 황태성을 만나보지도 않고 총살 시켰다고 보는가? 황태성은 어떻게 박정희의 형 박상희와 가깝게 되었나? 또 황태성과 박정희의 친분관계는? 박상희 삶과 죽음이 박정희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하나?
"황태성은 경상북도 상주 출신으로 경성제일고보(경기고등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다닌 수재였다. 그는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였고 1927년 신간회 김천지회를 창립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고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과 관련되어 구속되기도 하는 등 일제하 사회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였다.

황태성은 1906년 생으로 경북 칠곡 출신인 박정희의 친형 박상희와 오랜 친구였다. 황태성이 언제부터 박상희와 친분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일제의 고등경찰자료에 의하면 1927년 5월 16일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창립대회 때 황태성은 김천의 금릉청년회 대표로, 박상희는 선산의 구산구락부 대표로 참석했다. 

황태성과 박상희는 일제하 '서울파' 사회주의운동과 맥을 같이 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가깝게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황태성은 김천 출신으로 대구 신명학교를 졸업하고, 1929년 근우회 김천 지회장으로 활동하던 조귀분을 박상희에게 소개하여 둘이 결혼에 이르게 됐다.

1945년 해방 직전, 황태성과 박상희는 여운형의 조선건국동맹에서 활동했다. 해방이 되자 황태성은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했고, 박상희는 건국준비위원회 구미지부를 창설하여 1945년 11월 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회의에 경북 선산군 대표 3인 중 1인으로 참가했다. 그러나 1946년 10월 항쟁 때 황태성은 월북하였으나 박상희는 구미경찰서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경찰 총에 맞아 사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박정희는 박상희의 친구인 이재복의 추천을 받아 남로당에 가입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5·16 쿠데타 직후인 1961년 8월 30일, 황태성이 김일성 특사로 내려와서 박정희와 김종필을 만나 남북협상과 통일에 대한 논의를 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체포되어 간첩혐의로 처형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황태성이 박정희와 김종필을 만났는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사건 당시 미국 CIA 요원인 래리 베이커는 "박정희와 황태성이 3번이나 만났다"고 증언을 한 바 있다. 이 내용은 재미 언론인 문명자의 저서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에 소개됐다.  

황태성은 1961년 10월 20일, 중앙정보부에 체포되어 1963년 12월 14일 처형됐다. 이 기간에 제5대 대통령선거가 치러지면서, 윤보선 후보가 박정희에 대한 사상논쟁을 제기했다. 그러나 개표 결과는 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가 15만 표 차이로 승리했다. 이후 박정희는 미국을 의식하였는지 그의 '레드 콤플렉스'를 감추려했는지 결국 황태성을 총살하고 말았다."  

"김종필, 이제라도 '황태성 사건'의 진실 밝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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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황태성 ⓒ 민족21

- 만약 '2기 진실위'가 생긴다면 실체적 진실을 규명해야 할 대표적 사건으로 '황태성 사건'을 꼽은 적이 있는데 그 이유는?
'황태성 사건'은 5·16 쿠데타 이후 북한이 남한에 황태성이란 거물급 인물을 '특사'로 보내 남북협상과 통일문제를 논의하려 했다가, 결국 황태성이 체포되어 '간첩혐의'로 처형된 사건이다. 또한 이 사건이 미친 파장은 결국 제5대 대통령선거의 결과에 영향을 주는 등 한국현대사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와 같이 '황태성 사건'은 일반 '간첩 사건'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한국현대사 연구자나 학계에서는 상당히 일반화된 이야기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적 사건의 진실을 아직도 국가가 외면하고, 공식적으로 밝히지 못하고 있다. 이런 현실 자체가 과거청산이 아직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황태성 사건'은 우리 사회에 아직도 뿌리 깊은 '레드 콤플렉스'에 대해 여러 가지 측면에서 교훈을 주고 있다. 아직도 현실 정치와 사회에서 '색깔론'을 덧씌워 '빨갱이'이니 '좌익'이니 운운하지 않은가? 멀쩡한 사람을 정치적 희생물로 만드는 작태가 지금도 횡행하고 있지 않은가?" 

- 황태성 사건과 관련하여 김종필의 역할과 영향도 있었을 것 같은데. 특별히 김종필은 박상희의 딸 박영옥과 결혼한 사위이다. 박정희에게는 조카사위이고 중앙정보부를 만든 권력의 2인자였으니 분명히 황태성 사건과 관련하여 어떤 의미로든지 역할을 했을 것 같다.
"김종필은 황태성 사건 당시 초대 중앙정보부장을 하였고 또 민주공화당 초대의장을 역임하였다. 최근 김종필은 부인 박영옥이 사망한 직후 <중앙일보>에 한국현대사에 대한 회고록을 연재하고 있다. 박정희와 더불어 5·16 쿠데타의 주역이었고, 박상희의 사위였던 그는 5·16쿠데타 직후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는다'로 시작되는 '혁명공약'을 직접 작성했다고 한다. 박정희의 '레드 콤플렉스'에 대한 미국과 주변의 시선에 대한 방어적 표현이었다.

나는 한국현대사의 커다란 굴곡을 살아갔던 그가 황태성 사건뿐 아니라 역사적 진실에 대하여 '소이부답'(笑而不答)'하지 말고 진실을 말하기를 바란다. 그것이 그가 박정희와 더불어 한국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던 행위에 대해 역사에 속죄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 황태성은 박정희는 물론 김종필과도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황태성이 월남 후, 5·16 쿠데타 세력의 실세였던 김종필을 자주 만나 정치자금을 제공하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설도 있다. 북한 노동당의 조직과 운영방식 등이 공화당 조직에 많이 참조되었을 것이라는 소문도 있다. 황태성 사건의 진실을 밝힐 열쇠를 김종필이 가지고 있다고 지목할 수 있는 구체적 이유나 근거가 있는가? 
"황태성 사건과 관련해서 핵심적인 인물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가 김종필이다. 그는 5·16쿠데타의 실질적 계획자라 할 수 있다. 서중석 교수에 따르면 당시 미국도 김종필에 대해 상당히 주목하고 있었다고 한다. 김종필은 황태성의 절친인 박상희의 사위이고 '황태성 사건'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직책에 있었다.

김종필은 나중에 사실이 아니라고 번복했지만, 1992년 6월 21일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황태성을 만난 적이 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이는 앞서 언급했던 재미언론인 문명자의 증언과 일치하고 있다. 김종필은 현재 <중앙일보>에 한국현대사에 대한 증언을 연재하고 있다. 황태성 사건에 대해서도 그는 진실을 밝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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