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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July 24, 2016

"100~200만 죽인다고 까딱 있겠나", 막가는 청와대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83> 유신의 몰락, 열네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세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의 몰락이다.

박정희 "내가 직접 발포 명령", 차지철 "100만~200만 죽인다고 까딱 있겠나"

프레시안 : 이제 김재규의 거사 부분을 살폈으면 한다. 부마항쟁 현장을 살펴본 후 김재규는 어떤 모습을 보였나. 

서중석 : 부산에 계엄이 선포된 직후인 1979년 10월 18일 새벽 부산에 간 김재규는 그날 오후 항공편으로 서울에 와서 바로 청와대로 직행했다. 박정희 대통령한테 보고하러 간 것이다. 보고는 김계원 비서실장, 차지철 경호실장이 동석해 저녁 식사를 막 끝낸 식당에서 이뤄졌다. 김재규는 청와대에서 나눈 대화에 대해 항소 이유 보충서에서 이렇게 기술했다.

김재규는 "부산 사태는 체제 저항과 정책 불신 및 물가고에 대한 반발에 조세 저항까지 겹친 민란이라는 것과 전국 5대 도시로 확산될 것이라는 것 및 따라서 정부로서는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 등 본인이 직접 시찰하고 판단한 대로 솔직하게 보고를 드렸"다고 밝혔다. 

그랬더니 박 대통령이 버럭 화를 냈다고 한다. 그러면서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1960년 3·15 부정 선거 당시 내무부 장관)나 곽영주(4월혁명 당시 경무대 경무관)가 발포 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총살을 하겠느냐",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김재규는 "같은 자리에 있던 차 실장은 이 말끝에", 박정희 말끝이라는 얘긴데,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을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00만~200만 명쯤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 하는 무시무시한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었습니다"라고 당시 상황을 얘기했다. 그러고 나서 이렇게 썼다. 

"그런데 박 대통령의 이와 같은 반응은 절대로 말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본인의 판단이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누구보다도 본인이 잘 아는데, 그는 군인 출신이고 절대로 물러설 줄 모릅니다. 더구나 10월 유신 이후 집권욕이 애국심보다 훨씬 강해져서 심지어 국가의 안보조차도 집권욕의 아래에 두고 있던 분입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여러모로 비교해보았지만 박 대통령은 이 박사와는 달라서 물러설 줄을 모르고 어떠한 저항이 있더라도 기필코 방어해내고 말 분입니다." 

프레시안 :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재벌 편향 정책과 경제 파탄을 비판하는 국민들에게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는 대통령, 100만~200만 명쯤 죽여도 까딱없다며 맞장구치는 대통령의 심복. 오늘날 일각에서 서민 대통령이라고 강변하며 신화 만들기에 매진하는 박정희의 집권 후반기 민낯이다. 박정희와 차지철의 발언 자체도 무시무시하지만, 더 끔찍한 건 집권 18년간 박정희 정권이 보인 모습을 생각하면 이런 발언들을 빈말 또는 실언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없다는 점 아닌가. 

서중석 : 김재규, 박정희, 차지철의 발언에서 알 수 있듯이 박정희와 차지철은 유신 체제를 반대하는 국민을 적으로 보고 있었다. 유신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떠한 유혈 사태라도 불사하겠다는, 정신적으로 극한 상황에 몰려 있는 모습을 보여줬다.

김재규는 부산에서 4·19와 같은 사태를 보고 와서 그걸 솔직히 보고했다. 그런데 박정희의 반응은 너무나 기대에 어긋났다. 여기서 김재규는 고심에 고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가 초비상사태에 놓인, 그야말로 위기 중의 위기 상황이 아니냐고 판단하면서 그것에 대한 해결 방안을 심각하게 모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10·26 그날 상황을 말하기 전에, 여기서 캄보디아에서 한 것처럼 대량 살육한다고 해서 까딱 있겠느냐고 발언한 차지철의 월권, 권력 남용과 횡포, 기고만장함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차지철은 전횡하고 박정희는 비호하고…박정희와 차지철은 일심동체

▲ 차지철 경호실장. ⓒ연합뉴스
프레시안 : 
유신 말기 차지철의 월권과 횡포, 어느 정도였나.

서중석 : 차지철은 1978년 12·12선거 이후 중요 사건, 정책에 깊이 개입했다. 1979년 백두진을 국회의장으로 천거했고, 신민당의 5·30 전당 대회에서도 이철승 쪽을 적극 밀었으며, 김영삼을 제명하는 데에도 적극 나서는 등 박정희와 일체가 돼 사사건건 김재규와 맞섰다. 그러면서 김재규와 중앙정보부를 바보로 만들었다. 5·30 전당 대회 이후에는 박정희의 강력한 지지 아래에서, 경호실장인데도 중앙정보부를 대신해 유신 체제를 수호하는 데 헤게모니를 행사했다.

박정희는 1978년 말 유신 제2기가 출범할 무렵부터 오전 11시가 되도록 장관들은 잘 만나지 않고 차지철과 만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유신 말기에 뒤틀릴 대로 뒤틀린 정국은 박정희의 판단력에 중대한 결함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시기에 박정희는 정신적 결함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모습을 보였는데, 박정희의 그러한 정신적 파행을 잘 보여주는 것이 차지철의 존재이자 행태다.

김정렴은 회고록에 "10·26을 회상할 때마다 내가 차지철을 경호실장으로 천거하지 않았더라면 박정희 대통령이 비명에 돌아가지도 않았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고 썼다. 차지철은 유신 말기에 경호실장 영역을 넘어서 국정에 깊숙이 개입했다. 장관이나 군 장성의 인사에 관여했고 국회 상임위원장까지 지명했다. 대통령의 지시와 차지철 개인의 지시를 구별하기가 어려웠고 아무도 차지철을 견제할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정치 공작 등 중앙정보부의 이른바 '고유 업무'에 개입했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등 여러 사람의 대통령 접근을 차단하기도 했다. 또한 정보망을 독자적으로 구축해 정보를 박정희한테 보고했다. 일을 그런 식으로 해놓고 차지철은 일이 잘되면 자기 공으로, 못되면 김재규 책임으로 돌리곤 했다.

차지철은 "각하를 지키는 것이 국가를 지키는 것이다"라는 표어를 써붙이고 경호실을 막강한 권부로 키웠다. 차지철은 모든 힘과 정보는 경호실을 통해야 한다는 이상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장관들한테 대통령 결재를 받을 문서는 꼭 하루 전에 자기 방에 갖다 놓도록 차지철이 요구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차지철은 대통령에게 올라가는 각종 기밀과 중요 문건을 미리 파악했고 사실상 정보를 독점하다시피 했다. 그뿐 아니라 의전과 관련해서도 문제를 일으켰다. 

프레시안 : 어떤 문제였나. 

서중석 : 김진 기자가 쓴 책을 보면 "각하를 빼놓고 나보다 앞설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누구의 승용차도 내 차를 앞서갈 수 없다"고 차지철이 고집을 부려서 비서실, 경호실 모두 의전 때문에 아주 애를 먹었다고 돼 있다. 이것도 김진 책에 나오는 얘긴데, 차지철은 경호실장이 되자마자 경호 부대를 나치 히틀러의 SS 친위대처럼 만들려고 심혈을 기울였다. 경호실 복장까지 SS 친위대를 모방할 정도였다. 

또한 차지철은 경호실 위상을 높이기 위해 경호실 편제를 고쳤다. 차장 밑에 행정차장보, 작전차장보를 새로 만들어 현역 준장으로 보임했다. 차장으로 현역 소장을 임명했는데, 나중에는 군단장급인 중장이 차장이 됐다. 청와대 안과 외곽 경비를 담당하는 수경사 30·33대대를 대대급에서 여단급으로 격상시켰고, 헌병으로 새 팀을 하나 만들어 사복 외곽 경호를 맡게 했다. 

그뿐 아니라 유사시 수경사령관의 작전 지휘권을 경호실장이 갖도록 법을 고쳐버렸다. 민간인이 군, 그것도 수경사령관을 지휘하게 된 것이다. 국군조직법에 위배된다고 박정희한테 충언한 장군은 보직에서 떨려났다. 경호실 차장으로는 정병주, 이재전 등이 기용됐고 행정·작전차장보로는 이광로, 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등이 발탁됐다.

차지철은 국기 강하식이라는 행사를 열고 여기에 장관, 국회의원, 그리고 각 군 참모총장을 비롯한 군 지휘관과 언론계 인사 등을 불러 위세를 과시했다. 이날 열병·분열 등 제병(諸兵) 지휘관은 경호실 작전차장보가 맡았다. 열병이 끝나면 분열인데, 전두환 준장이 칼을 찬 채 선두에서 행진하다가 사열대 앞에서 칼을 빼서 높이 치켜들고 "우로 봐!" 구호를 외치는 식이었다. 

이렇게 월권과 전횡을 거듭하면서 차지철은 여권 내에서 일종의 대통령 권한 대행 노릇을 했고, 대통령 비슷한 위세로 부통령과 다름없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프레시안 : 박정희의 묵인과 비호가 없었어도 차지철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차지철의 전횡에 대한 책임 문제에서 박정희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것 아닌가.

서중석 : 차지철의 행동은 의원, 각료, 군 지휘관 등의 반발을 초래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빚은 갈등은 말할 것도 없고 비서실장 김계원과도 심각한 갈등 관계에 있었다. 이때의 상황을 10·26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은 이렇게 말했다. "비서실 내부도 엉망이고 우군 싸움이 김일성이와의 싸움보다 더 심했어. 망하려니 그런가 봐."

차지철은 정보 수집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처리 방안까지 박정희한테 보고했다. 중요 인사와 정책에서 차지철의 건의는 힘이 있었다. 박정희는 차지철과 관련된 보고서가 들어오면 차지철한테 주어버렸다. 전두환은 "정치 자금도 차지철을 통해서 하고 신세를 너무 많이 지니 정면으로는 말을 못하는 것 같다"고 <전두환 육성 증언>에서 얘기했다.

차지철의 위세는 자유당 말기 이승만을 끼고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박찬일 비서, 곽영주 경무관과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10·26 직후 사건의 진상을 제일 먼저 파악해야 했을 노재현 국방부 장관과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은 김재규가 쐈다는 걸 알기 전까지는 '이건 차지철이 저지른 범행 아니겠나',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것도 무리가 아니었던 것 같다. 여당 일각에서는 '유신 말기에 차지철이 나라를 말아먹는 것 아니냐고 우려하고 있었는데 10·26이 났다'고까지 얘기했다. 그만큼 이 시기에 차지철의 횡포가 심했다는 걸 얘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차지철의 횡포, 기고만장함 같은 것들은 전부 박정희가 적극적으로 두둔하고 지지, 지원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당시 박정희와 차지철은 한 배에 같이 탄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일심동체라고까지 얘기할 수 있는 상태에 있었다. 

김재규 "난국을 수습하지 못하면 광화문 네거리가 피바다"

ⓒ오월의봄
프레시안 :
 다시 김재규 쪽으로 돌아가면, 부산에서 돌아와 청와대에 보고한 후 김재규는 어떤 움직임을 보였나.

서중석 : 김재규는 청와대로 직행해 박정희한테 보고한 후 태도가 확 달라져 뭔가를 결심하는 듯한 굳은 표정이었다고 한다. 10월 23일 김재규는 친척을 장충단 공관으로 불러 평소에 자신이 써놓은 붓글씨 '위민주정도(爲民主正道)', '자유민주주의', '위대의(爲大義)', '비리법권천(非理法權天)', 그리고 '민주, 민권, 자유, 평등'을 가리키며 "이 말들을 잘 새겨듣고 후손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비리법권천은 이치에 어긋나는 것은 이치를 당하지 못하고 이치는 법을 당하지 못하고 법은 권력을 당하지 못하고 권력은 천하를 당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다음 날에는, 김정남 책에 의하면, 부인과 딸에게 밑도 끝도 없이 "대의를 따를 것이냐, 소의를 따를 것이냐"고 물었다. 

10월 24일 이날, 조갑제의 책을 보면, 김재규는 황낙주 신민당 원내총무를 불러서 얘기를 나눴는데 부마항쟁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신문에서는 양아치와 불량배가 데모했다고 하지만 실은 선량한 시민들과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난국을 수습하지 못하면 광화문 네거리가 피바다가 됩니다. 이걸 수습할 분은 나와 황 총무뿐입니다." 그러면서 김재규는 난국 수습을 위해 김영삼 총재가 일선에서 물러나야 하며 황낙주도 원내총무에서 사퇴해줘야겠다고 얘기했다고 한다. 

또 이날 김재규는 이제는 공화당 의원이 된 전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을 만났을 때 "제가 딱 해치우겠습니다",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이후락은 그때 '신민당을 해치우겠다'는 뜻으로 들었는데 10·26 이후에야 '그게 다른 뜻이었구나' 하는 걸 알게 됐다고 한다. (1973년 12월 중앙정보부장에서 물러난 직후 해외로 도피했다가 1974년 2월에 돌아온 이후락은 한동안 칩거하다가 1978년 12·12총선에 나섰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이후락을 공화당 후보로 공천하지 않았다. 결국 무소속으로 출마해 공화당 후보를 꺾고 국회의원이 된 이후락은 6개월 후인 1979년 6월 공화당에 입당했다. '편집자') 

이종찬 장군은 김재규가 가장 존경했던, 그래서 김재규가 억지로 간청해 유정회 의원이 되게 했던 사람이다. 그러한 이종찬이 이 무렵 김재규를 찾아가서 '유정회 의원, 더는 못하겠다'고 얘기했는데 그때 김재규가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라고 사정했다고 한다.

하여튼 이 시기에 김재규는 뭔가 결심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0월 25일 김재규가 조선 시대에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참살된 조상인 김문기 묘소에 참배를 한 것에서도 그걸 엿볼 수 있다. 김문기는 김재규 쪽, 그러니까 김녕 김씨 가문에서 사육신의 한 사람이라고 얘기한 인물이다. 그처럼 사육신의 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특별히 모셨던 김문기 묘소에 그렇게 갔다는 것이 무언가 김재규 이 사람의 흉중을 이야기해주는 것이 아니냐, 그렇게 보인다. (오늘날 노량진 사육신묘에는 6명이 아니라 7명의 묘소가 있다. 15세기부터 사육신으로 문헌에 기록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와 더불어 1977년부터 사육신으로 추앙해야 한다는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김문기까지 7명이다. 유응부를 빼고 김문기를 넣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이래, 누가 사육신인가를 두고 오랫동안 큰 논란을 겪었다. 분명한 건 기존의 6명도, 김문기도 자신들이 소중히 여긴 충의에 목숨을 걸었고 죽음으로 그것을 입증했다는 점이다. '편집자')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여든네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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