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한 지인이 영국의 법대 교수에게 한국의 검찰권에 대해서 말하니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하더라고 했다. 한 기관이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하고 있으며 기소독점권과 기소편의주의까지 갖고 있다는 설명에 "그런 기관을 두고 어떻게 인권을 보호할 수 있겠는가?"라고 계속 반문하더라는 것이다. 이 교수의 질문은 정상국가의 정상적인 법학 교수가 갖는 당연한 의문이다. 그러나 정작 한국 사람들은 한국이 얼마나 전근대적이고 비정상적인 사법체계 속에서 살고 있는지 잘 모른다.
'비정상적 검찰'의 뿌리는 일제
이런 비정상의 뿌리를 캐보면 십중팔구 일제 식민통치의 잔재이기 십상이다. 우리 선조들의 사법시스템은 이렇지 않았다. 지금 이 나라는 법치(法治)인지 인치(人治)인지 구분하기 힘들지만 조선은 그렇지 않았다. 조선은 먼저 수사권을 여러 기관에 분산시켰다. 수사권을 사헌부, 형조, 의금부, 포도청, 한성부, 장예원 등으로 나누었다. 사헌부는 지금의 검찰격이고, 의금부는 지금 국민들의 도입 주장이 높은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라고 할 수 있다. 포도청은 경찰청격이다.
수사권을 분산시킨 것은 실체적 진실을 캐고 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에서 사헌부에 사건을 신고했는데 이런 저런 핑계로 사건을 덮으려고 들면 바로 사간원에서 탄핵에 나서고 의금부가 즉각 수사에 나서 사실일 경우 사헌부 관원을 구속했다. 수사권이 분산되어 있으니 혼란스러울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담당 사건이 조금씩 달랐기 때문이다. 형조·의금부·사헌부는 중대 사건을 다뤘고 포도청은 강·절도 사건을 주로 다뤘고, 장예원은 노비사건을 주로 다뤘다. 전문분야별로 수사권을 분산시킨 것이다.
이중 대표적인 수사기관은 사헌부였다. 사헌부는 하루라도 먼저 부임한 선배가 출퇴근할 때는 후배들이 모두 일어서서 예를 표할 정도로 내부 기강이 엄격했다. 그러나 사헌부 수장인 대사헌도 문제가 있으면 내부에서 먼저 탄핵했다. 중종 때 대사헌이 된 이점(李坫)이 경상감사 시절 연산군에게 흰 꿩을 바쳤던 사실이 드러나자 사헌부의 장령 등은 즉각 대사헌을 탄핵했다. 물론 사헌부 관원들도 사람인 이상 권력자의 눈치를 살피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태종 4년(1404) 1월 허가증인 패(牌)가 없는 매 소유자를 수사하는데, 좌명 1등 공신인 태종조의 실세 신극례(辛克禮)가 수사망에 들었다. 신극례가 사헌부 집의(종3품) 민약손 등에게 "이 매는 주상께서 주신 것이다"라고 협박하자 민약손 등은 수하 수사관들인 소유(所由)에게 책임을 돌렸다. 그러자 사헌부 감찰(종6품) 박하 등이 "왜 소유에게 책임을 돌리느냐?"면서 상급자인 민약손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사헌부 관료들은 직급은 낮아도 선비 중의 선비라는 자부심이 있었기에 권력에 굴하지 않았다. 그래서 백성들의 신뢰를 얻었다.
사헌부 대사헌은 차관격인 종2품에 불과하지만 <연려실기술>의 '관직전고(官職典故)'에서 사헌부 관원이 "정색하고 조정에 서면 모든 관료가 떨고 두려워 한다"고 전할 정도로 권위가 있었다. 사헌부의 이런 권위는 죄 없는 사람도 죄인으로 만들고, 죄 있는 사람도 기소하지 않는 '내 맘대로' 법운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연려실기술>은 사헌부 관료는 "편복(便服)으로 거리에 나서지 못했고, 친구 초상 때도 반혼(返魂:장례 후 신주를 집으로 모심)할 때 장막을 교외에 쳤어도 감히 나가서 곡하지 못했다"고 전하고 있다. 친구의 장례식 참석도 꺼릴 정도로 자신의 처신에 엄격하면서 불법에는 추상같았던 참 선비의 자세가 백성들의 신뢰를 샀다.
조선에서 사헌부 관료들이 기업의 청탁을 받아서 청탁수사를 하거나 심지어 기업을 협박해서 일감을 따내는 일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헌부 관원들은 선비 중의 선비라는 자부심과 수사권 분산에 의한 수사기관의 상호견제라는 선조들의 국정 운영 시스템에 의해 조선 최고의 수사기관으로 우뚝 섰던 것이다.
수사권·기소권 독점 시킨 이유? '독립운동 탄압'
한국 검찰이 조선과 달리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할 수 있게 된 뿌리는 1912년 3월 18일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제령 11호로 공포한 이른바 '조선형사령'에 있다. 제령은 조선 총독의 명령을 뜻한다. 메이지 헌법에 따라 일본은 제국 의회에서 법률을 제정했지만 식민지 조선은 메이지 헌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했기에 조선총독의 제령이 곧 입법이었다. 총독부에서 검찰에게 수사권·기소권을 독점시킨 이유는 독립운동을 쉽게 탄압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조선형사령'이 독립운동가 억압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상호모순된 조항이 많았다. 그 11조도 그중 하나인데, "①검사는 현행범이 아닌 사건이라도 수사결과 급속한 처분을 요하는 것이라 사료될 때는 공소제기 전에 영장을 발부해 검증, 수색, 물건압수를 하고 피고인, 증인을 신문하거나 또는 감정을 명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현행범인 사건"이 아니라 "현행범이 아닌 사건이라도"라는 희한한 규정은 두말할 것 없이 독립운동가들을 마음대로 잡아가두기 위한 것이었다.
11조의 ②항은 "전항의 규정에 의하여 검사에게 허락된 직무는 사법경찰관 역시 임시로 이를 행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검사에게 수사권, 기소권을 독점시켜 놓고 사법경찰관에게도 임시로 같은 권한을 준 것 역시 독립운동가를 때려잡기 위한 것이었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만든 검찰의 수사·기소권 독점은 해방 이후 친일 청산에 실패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진 친일잔재다. 따라서 검찰의 수사권, 기소권 독점구조 해체는 일제잔재 청산 차원에서 진행되어야 할 문제이다.
사드 배치 문제는 어떤가? 사드는 한반도 내 배치를 결정하는 순간 남·북한간의 관계를 넘어서 미국과 중국 사이의 대결 현장으로 전환하게 되어 있는 문제였다. 우리가 중국과 선린관계를 맺은 것은 남북국시대부터만 따져도 1300여 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이다. 반면 미국과 동맹관계였던 것은 해방 후 70여 년에 불과하다.
중국이 동북공정으로 북한 땅에 대해 눈독을 들이는 것은 그것대로 엄중하게 따질 문제지만 우리가 무턱대고 미국 일방의 편을 들어 중국과 맞서는 것은 우리 역사의 경험에도 부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사드사태의 주체인지 객체인지 냉정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사드 배치, 인조의 '하수'가 떠오른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인조 5년(1627:정묘년) 만주족(여진족)이 세운 후금(청)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략하는 정묘호란의 배경에는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1567~1629) 사건이 있었다.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항주(抗州) 출신의 모문룡은 만주로 와서 군인이 되었다.
<동강소게당보절초(東江疏揭塘報節草)>라는 중국 사료에 따르면 후금이 만주 장악에 나서면서 만주의 안산(鞍山)에 있던 모문룡의 친족 100여 명이 살해되었고, 분개한 모문룡은 197명의 사사(死士:결사대)를 이끌고 반격에 나섰다. 모문룡은 지금의 단동(丹東)시 부근에서 후금을 꺾는 진강대첩(鎭江大捷)으로 명성을 떨쳤는데, 이는 수세에 몰리던 명나라가 후금을 상대로 거둔 귀중한 승리였지만 전세는 이미 이런 지역적 승첩으로 바꿀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후금에게 쫓긴 모문룡은 광해군은 14년(1622) 일부 군사들과 조선으로 쫓겨 들어왔다. 광해군은 모문룡 문제를 자칫 잘못 처리하면 신흥 강국인 후금 전체를 적으로 돌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었다. 모문룡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가 문제의 핵심이 아니라 명과 후금 중 누가 승리할 것인가가 문제의 핵심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광해군은 조선이 중원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면 일방적으로 명나라의 편을 들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모문룡을 해도(海島)로 숨게 해서 명나라와 후금 모두의 극한 반발을 막았다. 이것이 조선의 국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한 것이 광해군의 등거리 외교였다.
그러나 광해군의 등거리 외교는 명나라를 상국(上國)으로 섬기는 국내 친명 사대주의자들의 극심한 반발을 샀다. 서인들은 급기야 인조반정이란 쿠데타로 광해군을 내쫓았고, 광해군의 등거리 외교를 폐기하고 명나라를 상국으로 떠받드는 숭명반청(崇明反淸) 외교로 급격하게 전환시켰다. 이는 국가이익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할 외교문제를 이념으로 끌어올린 하수였는데 이는 모문룡에 대한 대접에서도 잘 나타난다.
인조는 쿠데타 직후 20여 일 후인 재위 1년(1623) 3월 모문룡의 차관인 응시태(應時泰)를 명정전에서 접견하고는, "나라에 일이 많아서 지금에야 접견하니 마음이 심히 미안하다"라고 사과했다. 인조정권은 큰소리치는 모문룡을 상국의 구세주로 여기면서 물심양면으로 지원했지만 <인조실록> 2년(1624) 6월조는 모문룡이 "군사를 풀어 놓아 횡포를 부리면서 소와 말을 약탈하고 집에 감춘 것까지 수색해 빼앗아 연로(沿路)가 텅 비고 백성이 모두 호곡(號哭)했다"고 전할 정도로 약탈을 일삼는 패잔병에 불과했다.
청 태종은 모문룡과 조선의 이런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가 인조 5년(1627) 1월 대패륵(大貝勒) 아민(阿敏) 등에게 3만 군사를 주어 압록강을 넘게 했는데,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정작 외교문제를 이념화시켜 친명일변도의 외교정책으로 급선회한 인조정권은 아무런 국방대책이 없었고 이 와중에 이순신의 조카인 의주 부윤 이완(李莞)이 의주성에서 분전하다 전사했다. "오랑캐를 멸망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라고 큰소리치던 모문룡은 후금군이 철산을 공격하자 신미도로 잽싸게 도주했다.
인조는 세자를 전주로 보내고 자신은 강화도로 들어갔지만 임란과 달리 의병이나 근왕병도 달려오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류성룡은 일본군의 머리를 베어오는 천민들은 양인(良人)으로 신분을 상승시켜주는 면천법(免賤法)을 통과시켜 백성들의 참전을 독려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끝나자 선조와 양반들은 류성룡을 실각시키고 면천법을 폐기시켜 '양반 천국, 상민 지옥'의 조선을 재연했다.
그래서 정묘호란 때 백성들은 더 이상 양반 사대부를 위해서 싸울 생각이 없었다. 인조는 불과 두 달 후인 그해 3월 강화부 성문 밖에 단(壇)과 희생(犧牲)을 마련하고 후금과 정묘약조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정묘호란은 광해군이 임금이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불필요한 전쟁이었다.
썩어빠진 한국 사회... 제대로 갈아엎을 인재가 필요하다
전통시대에 동아시아는 농경민족인 한족(漢族)이 세운 송·명 등의 제국과 요·금·원·청 등 북방 유목민족 사이 중원을 둘러싼 패권다툼의 연속이었다. 이 구도가 지금은 전 지구적 범위로 확장되어서 미국·일본과 중국·러시아 사이의 패권다툼으로 재연되고 있다.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우리는 이 구도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에 더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부터 한국전쟁까지 이 땅에서 벌어진 모든 전쟁들이 국제전이었던 것은 우리 외교역량의 협애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지금 세계는 큰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미국 중심의 팍스 아메리카나 체제가 약화되면서 여러 개의 중심축이 새롭게 생성되는 중이다. 경제적으로는 제조업과 정보통신기술(ICT)이 융합하는 4차 산업혁명 중이다.
사회적으로는 영국의 브렉시트나 필리핀의 두테르테 당선, 미국의 트럼프 현상 등에서 보듯이 좌우를 막론하고 기존 지배체제에 대한 민중들의 광범위한 불신과 전복이 두드러지는 상황이다. 더 이상 친미 일변도의 외교정책으로는 이 복잡한 시대를 헤쳐 나갈 수 없다. 당장 사드배치 결정의 가장 큰 수혜자가 북한의 김정은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이 사태의 복잡성을 말해주고 있다.
이제 우리 사회는 새로운 리더집단의 등장을 요구하고 있다. 역사와 시대에 대한 깊은 지식과 통찰력으로 우리 사회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정치공학적 잔머리로 주판알을 튕기기 바쁜 지금의 여야정치세력이 이 시대를 헤쳐나갈 수 없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다. 아직도 전근대적인 족벌 체제가 중심인 경제계도 마찬가지고, 국제대학 상위 순위에서는 이름을 찾기 어려우면서도 국내에서는 각종 카르텔로 독점적 지위를 이어가고 있는 지식사회도 마찬가지다.
이 나라는 어느 한 곳 희망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여러 분야가 한꺼번에 붕괴하고 있는 총체적 난국을 겪고 있다. 심지어 '국가 해체'라는 이야기까지 심심치 않게 들린다. 무능과 불통, 아집으로 똘똘 뭉친 현 정권의 책임이 가장 크지만 이에 대한 반사이익만 추구하는 야당에도 국민들의 시선은 싸늘하다.
이제 한국 사회는 여야나 좌우를 막론하고 기존의 지배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해체, 내지는 재조직 요구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뚜렷한 역사관에서 건져 올린 미래지향적 가치관을 제시하고 실천하면서 한국 사회의 온갖 적폐를 해소하겠다고 공언하는 정치세력이나 정치인이 등장한다면 정치공학적 계산에 매달리는 기존의 여야 정치인들은 단번에 도태될 수도 있다. 역사에 대한 통찰력과 미래에 대한 확신으로 썩어빠진 한국사회에 대한 근본적 창신(創新)에 나서는 그런 인재를 희구하는 것이 비단 필자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다.
'비정상적 검찰'의 뿌리는 일제
▲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앞 검찰 깃발. | |
ⓒ 권우성 |
이런 비정상의 뿌리를 캐보면 십중팔구 일제 식민통치의 잔재이기 십상이다. 우리 선조들의 사법시스템은 이렇지 않았다. 지금 이 나라는 법치(法治)인지 인치(人治)인지 구분하기 힘들지만 조선은 그렇지 않았다. 조선은 먼저 수사권을 여러 기관에 분산시켰다. 수사권을 사헌부, 형조, 의금부, 포도청, 한성부, 장예원 등으로 나누었다. 사헌부는 지금의 검찰격이고, 의금부는 지금 국민들의 도입 주장이 높은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라고 할 수 있다. 포도청은 경찰청격이다.
이중 대표적인 수사기관은 사헌부였다. 사헌부는 하루라도 먼저 부임한 선배가 출퇴근할 때는 후배들이 모두 일어서서 예를 표할 정도로 내부 기강이 엄격했다. 그러나 사헌부 수장인 대사헌도 문제가 있으면 내부에서 먼저 탄핵했다. 중종 때 대사헌이 된 이점(李坫)이 경상감사 시절 연산군에게 흰 꿩을 바쳤던 사실이 드러나자 사헌부의 장령 등은 즉각 대사헌을 탄핵했다. 물론 사헌부 관원들도 사람인 이상 권력자의 눈치를 살피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태종 4년(1404) 1월 허가증인 패(牌)가 없는 매 소유자를 수사하는데, 좌명 1등 공신인 태종조의 실세 신극례(辛克禮)가 수사망에 들었다. 신극례가 사헌부 집의(종3품) 민약손 등에게 "이 매는 주상께서 주신 것이다"라고 협박하자 민약손 등은 수하 수사관들인 소유(所由)에게 책임을 돌렸다. 그러자 사헌부 감찰(종6품) 박하 등이 "왜 소유에게 책임을 돌리느냐?"면서 상급자인 민약손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사헌부 관료들은 직급은 낮아도 선비 중의 선비라는 자부심이 있었기에 권력에 굴하지 않았다. 그래서 백성들의 신뢰를 얻었다.
사헌부 대사헌은 차관격인 종2품에 불과하지만 <연려실기술>의 '관직전고(官職典故)'에서 사헌부 관원이 "정색하고 조정에 서면 모든 관료가 떨고 두려워 한다"고 전할 정도로 권위가 있었다. 사헌부의 이런 권위는 죄 없는 사람도 죄인으로 만들고, 죄 있는 사람도 기소하지 않는 '내 맘대로' 법운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연려실기술>은 사헌부 관료는 "편복(便服)으로 거리에 나서지 못했고, 친구 초상 때도 반혼(返魂:장례 후 신주를 집으로 모심)할 때 장막을 교외에 쳤어도 감히 나가서 곡하지 못했다"고 전하고 있다. 친구의 장례식 참석도 꺼릴 정도로 자신의 처신에 엄격하면서 불법에는 추상같았던 참 선비의 자세가 백성들의 신뢰를 샀다.
조선에서 사헌부 관료들이 기업의 청탁을 받아서 청탁수사를 하거나 심지어 기업을 협박해서 일감을 따내는 일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헌부 관원들은 선비 중의 선비라는 자부심과 수사권 분산에 의한 수사기관의 상호견제라는 선조들의 국정 운영 시스템에 의해 조선 최고의 수사기관으로 우뚝 섰던 것이다.
수사권·기소권 독점 시킨 이유? '독립운동 탄압'
한국 검찰이 조선과 달리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할 수 있게 된 뿌리는 1912년 3월 18일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제령 11호로 공포한 이른바 '조선형사령'에 있다. 제령은 조선 총독의 명령을 뜻한다. 메이지 헌법에 따라 일본은 제국 의회에서 법률을 제정했지만 식민지 조선은 메이지 헌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했기에 조선총독의 제령이 곧 입법이었다. 총독부에서 검찰에게 수사권·기소권을 독점시킨 이유는 독립운동을 쉽게 탄압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조선형사령'이 독립운동가 억압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상호모순된 조항이 많았다. 그 11조도 그중 하나인데, "①검사는 현행범이 아닌 사건이라도 수사결과 급속한 처분을 요하는 것이라 사료될 때는 공소제기 전에 영장을 발부해 검증, 수색, 물건압수를 하고 피고인, 증인을 신문하거나 또는 감정을 명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현행범인 사건"이 아니라 "현행범이 아닌 사건이라도"라는 희한한 규정은 두말할 것 없이 독립운동가들을 마음대로 잡아가두기 위한 것이었다.
11조의 ②항은 "전항의 규정에 의하여 검사에게 허락된 직무는 사법경찰관 역시 임시로 이를 행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검사에게 수사권, 기소권을 독점시켜 놓고 사법경찰관에게도 임시로 같은 권한을 준 것 역시 독립운동가를 때려잡기 위한 것이었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만든 검찰의 수사·기소권 독점은 해방 이후 친일 청산에 실패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진 친일잔재다. 따라서 검찰의 수사권, 기소권 독점구조 해체는 일제잔재 청산 차원에서 진행되어야 할 문제이다.
사드 배치 문제는 어떤가? 사드는 한반도 내 배치를 결정하는 순간 남·북한간의 관계를 넘어서 미국과 중국 사이의 대결 현장으로 전환하게 되어 있는 문제였다. 우리가 중국과 선린관계를 맺은 것은 남북국시대부터만 따져도 1300여 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이다. 반면 미국과 동맹관계였던 것은 해방 후 70여 년에 불과하다.
중국이 동북공정으로 북한 땅에 대해 눈독을 들이는 것은 그것대로 엄중하게 따질 문제지만 우리가 무턱대고 미국 일방의 편을 들어 중국과 맞서는 것은 우리 역사의 경험에도 부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사드사태의 주체인지 객체인지 냉정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사드 배치, 인조의 '하수'가 떠오른다
▲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7월 14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THAAD) 주한미군 배치 결정과 관련해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주재하고 있다. | |
ⓒ 청와대 |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인조 5년(1627:정묘년) 만주족(여진족)이 세운 후금(청)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략하는 정묘호란의 배경에는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1567~1629) 사건이 있었다.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항주(抗州) 출신의 모문룡은 만주로 와서 군인이 되었다.
<동강소게당보절초(東江疏揭塘報節草)>라는 중국 사료에 따르면 후금이 만주 장악에 나서면서 만주의 안산(鞍山)에 있던 모문룡의 친족 100여 명이 살해되었고, 분개한 모문룡은 197명의 사사(死士:결사대)를 이끌고 반격에 나섰다. 모문룡은 지금의 단동(丹東)시 부근에서 후금을 꺾는 진강대첩(鎭江大捷)으로 명성을 떨쳤는데, 이는 수세에 몰리던 명나라가 후금을 상대로 거둔 귀중한 승리였지만 전세는 이미 이런 지역적 승첩으로 바꿀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후금에게 쫓긴 모문룡은 광해군은 14년(1622) 일부 군사들과 조선으로 쫓겨 들어왔다. 광해군은 모문룡 문제를 자칫 잘못 처리하면 신흥 강국인 후금 전체를 적으로 돌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었다. 모문룡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가 문제의 핵심이 아니라 명과 후금 중 누가 승리할 것인가가 문제의 핵심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광해군은 조선이 중원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면 일방적으로 명나라의 편을 들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모문룡을 해도(海島)로 숨게 해서 명나라와 후금 모두의 극한 반발을 막았다. 이것이 조선의 국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한 것이 광해군의 등거리 외교였다.
그러나 광해군의 등거리 외교는 명나라를 상국(上國)으로 섬기는 국내 친명 사대주의자들의 극심한 반발을 샀다. 서인들은 급기야 인조반정이란 쿠데타로 광해군을 내쫓았고, 광해군의 등거리 외교를 폐기하고 명나라를 상국으로 떠받드는 숭명반청(崇明反淸) 외교로 급격하게 전환시켰다. 이는 국가이익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할 외교문제를 이념으로 끌어올린 하수였는데 이는 모문룡에 대한 대접에서도 잘 나타난다.
인조는 쿠데타 직후 20여 일 후인 재위 1년(1623) 3월 모문룡의 차관인 응시태(應時泰)를 명정전에서 접견하고는, "나라에 일이 많아서 지금에야 접견하니 마음이 심히 미안하다"라고 사과했다. 인조정권은 큰소리치는 모문룡을 상국의 구세주로 여기면서 물심양면으로 지원했지만 <인조실록> 2년(1624) 6월조는 모문룡이 "군사를 풀어 놓아 횡포를 부리면서 소와 말을 약탈하고 집에 감춘 것까지 수색해 빼앗아 연로(沿路)가 텅 비고 백성이 모두 호곡(號哭)했다"고 전할 정도로 약탈을 일삼는 패잔병에 불과했다.
청 태종은 모문룡과 조선의 이런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가 인조 5년(1627) 1월 대패륵(大貝勒) 아민(阿敏) 등에게 3만 군사를 주어 압록강을 넘게 했는데,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정작 외교문제를 이념화시켜 친명일변도의 외교정책으로 급선회한 인조정권은 아무런 국방대책이 없었고 이 와중에 이순신의 조카인 의주 부윤 이완(李莞)이 의주성에서 분전하다 전사했다. "오랑캐를 멸망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라고 큰소리치던 모문룡은 후금군이 철산을 공격하자 신미도로 잽싸게 도주했다.
인조는 세자를 전주로 보내고 자신은 강화도로 들어갔지만 임란과 달리 의병이나 근왕병도 달려오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류성룡은 일본군의 머리를 베어오는 천민들은 양인(良人)으로 신분을 상승시켜주는 면천법(免賤法)을 통과시켜 백성들의 참전을 독려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끝나자 선조와 양반들은 류성룡을 실각시키고 면천법을 폐기시켜 '양반 천국, 상민 지옥'의 조선을 재연했다.
그래서 정묘호란 때 백성들은 더 이상 양반 사대부를 위해서 싸울 생각이 없었다. 인조는 불과 두 달 후인 그해 3월 강화부 성문 밖에 단(壇)과 희생(犧牲)을 마련하고 후금과 정묘약조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정묘호란은 광해군이 임금이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불필요한 전쟁이었다.
썩어빠진 한국 사회... 제대로 갈아엎을 인재가 필요하다
▲ 이곳이 '헬조선'인 60가지 이유 트위터 사용자 '샤우트'(@187Centi)가 지난해 지난 12월 60개의 뉴스 방송 화면을 모아 올린 사진. 각 방송화면에서 전하고 있는 뉴스는 <GDP 대비 복지비 비율, OECD 최하위>, <아이들 '삶의 질' 꼴찌> 등 한국의 열악한 삶의 질을 보여주는 통계다. | |
ⓒ 트위터 @187Centi |
전통시대에 동아시아는 농경민족인 한족(漢族)이 세운 송·명 등의 제국과 요·금·원·청 등 북방 유목민족 사이 중원을 둘러싼 패권다툼의 연속이었다. 이 구도가 지금은 전 지구적 범위로 확장되어서 미국·일본과 중국·러시아 사이의 패권다툼으로 재연되고 있다.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우리는 이 구도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에 더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부터 한국전쟁까지 이 땅에서 벌어진 모든 전쟁들이 국제전이었던 것은 우리 외교역량의 협애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지금 세계는 큰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미국 중심의 팍스 아메리카나 체제가 약화되면서 여러 개의 중심축이 새롭게 생성되는 중이다. 경제적으로는 제조업과 정보통신기술(ICT)이 융합하는 4차 산업혁명 중이다.
사회적으로는 영국의 브렉시트나 필리핀의 두테르테 당선, 미국의 트럼프 현상 등에서 보듯이 좌우를 막론하고 기존 지배체제에 대한 민중들의 광범위한 불신과 전복이 두드러지는 상황이다. 더 이상 친미 일변도의 외교정책으로는 이 복잡한 시대를 헤쳐 나갈 수 없다. 당장 사드배치 결정의 가장 큰 수혜자가 북한의 김정은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이 사태의 복잡성을 말해주고 있다.
이제 우리 사회는 새로운 리더집단의 등장을 요구하고 있다. 역사와 시대에 대한 깊은 지식과 통찰력으로 우리 사회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정치공학적 잔머리로 주판알을 튕기기 바쁜 지금의 여야정치세력이 이 시대를 헤쳐나갈 수 없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다. 아직도 전근대적인 족벌 체제가 중심인 경제계도 마찬가지고, 국제대학 상위 순위에서는 이름을 찾기 어려우면서도 국내에서는 각종 카르텔로 독점적 지위를 이어가고 있는 지식사회도 마찬가지다.
이 나라는 어느 한 곳 희망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여러 분야가 한꺼번에 붕괴하고 있는 총체적 난국을 겪고 있다. 심지어 '국가 해체'라는 이야기까지 심심치 않게 들린다. 무능과 불통, 아집으로 똘똘 뭉친 현 정권의 책임이 가장 크지만 이에 대한 반사이익만 추구하는 야당에도 국민들의 시선은 싸늘하다.
이제 한국 사회는 여야나 좌우를 막론하고 기존의 지배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해체, 내지는 재조직 요구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뚜렷한 역사관에서 건져 올린 미래지향적 가치관을 제시하고 실천하면서 한국 사회의 온갖 적폐를 해소하겠다고 공언하는 정치세력이나 정치인이 등장한다면 정치공학적 계산에 매달리는 기존의 여야 정치인들은 단번에 도태될 수도 있다. 역사에 대한 통찰력과 미래에 대한 확신으로 썩어빠진 한국사회에 대한 근본적 창신(創新)에 나서는 그런 인재를 희구하는 것이 비단 필자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다.
▲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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