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만 알고 한국은 몰랐던 놀라운 ‘팩트’
시사INLive | 변진경·허은선 기자 | 입력 2011.09.27 09:18 |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지난 9월2일 폭로 전문 웹사이트 위키리크스(http://wikileaks.org)가 미국의 외교 전문 25만여 건을 공개했다. 지난해 11월부터 문서에 등장하는 실명을 삭제하면서 순차적으로 공개해오던 문서를 이날 한꺼번에 무삭제로 풀어버린 것이다. 전 세계에 주재한 미국 관리들이 주고받은 문서가 인터넷에 공개되면서 각국 정부가 그간 자국 국민에게 숨겨왔던 '대외비' 정보들도 만천하에 드러났다.
주한 미국 대사관 관리들은 많은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모은 정보를 다시 '크로스 체크'한 다음, 그들 나름의 분석까지 내려 보고서를 작성한다. '제목-요약-소주제-논평'의 일관된 형식으로 기록돼 본국에 보낸 각 문서들은 놀랄 만한 '팩트'로 가득 차 있다. 또 그 속에는 '미국 정부는 알고 한국 국민은 몰랐던 사실'이 곳곳에 숨겨져 있다. < 시사IN > 이 이 가운데 일부를 제210~211호에 나눠 싣는다.
■이명박 서울시장
"참여정부가 반미 감정 부채질"
주한 미국 대사관이 작성해 본국에 보고한 문서 가운데 상당수는 한국의 주요 정치인을 만나 나눈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도 그중 한 명이다.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주한 미국 대사관 문서 가운데 이 대통령과의 면담 내용이 담긴 최초의 기록은 서울시장 재직 시절인 2006년 3월8일 보고서에서 찾을 수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전날 점심때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 대사를 만난 이 시장은 대화 시간의 대부분을 노무현 대통령의 정책을 비판하는 데 할애했다.
이 시장은 노무현 정부가 소득 재분배에만 신경 쓰며, 민족주의에 기대어 미국과 일본과의 친교에는 소홀하다고 지적했다. 또 이 시장은 2002년 대선 당시 노 대통령이 여중생 미군 장갑차 사망 사건 이후 반미 감정을 어떻게 부채질했는지를 상기시키며 "지금 진행되고 있는 FTA 협상도 현 정권이 이를 통한 반미 감정을 활용해 협상과 선거에 이득을 취하려 할 수도 있다"라고 경고했다. 이 시장은 특히 '아주 전투적(very militant)'인 농민들에게 이 협상이 특히 민감하다고 말했다.
c사진공동취재단 노무현 대통령이 미선·효순 양 부모와 만났다. |
그해 11월20일, 대선 후보 신분이던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버시바우 대사를 다시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높은 지지율이 강한 경제적 배경과 일관성, 북한에 대한 확고한 견해 덕이라고 설명했다. 이 후보에게서 7% 경제성장 공약에 대해 설명을 들은 버시바우 대사는 "하지만 그는 어떻게 그 성장을 이뤄낼 건지 구체적인 방법은 말하지 않았다"라고 11월21일 문서에서 전했다.
외교에 관한 대화도 오갔다. 이 후보는 미국 대사에게 "열린우리당이 악용할 수 있으니 선거 전까지는 워싱턴과 도쿄가 북한을 너무 강하게 다루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 버시바우 대사는 "최근 이 후보가 일본 아베 총리를 만나 '노무현 정권은 반일 정서를 선동하며 관계를 개선하는 데 관심이 없으니 나중에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으면 한·일 관계를 발전시키자'고 부탁했다"라는 설명도 문서에 덧붙였다.
이날 면담에서 이명박 후보는 금강산 관광사업에 대한 의견도 밝혔다. 이 전 시장은 "내가 현대건설에서 일할 때 시작한 사업이라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 사업을 왜곡하긴 했지만 현금 지원이 없는 전제하에 금강산 관광은 계속돼야 한다"라고 말했다. 또 "현대건설 재직 시절 중동에서 사담 후세인이 부하 장관을 사살하는 장면을 목격한 뒤 그와 거래하지 않았다. 내가 그를 잘 아는데 미국은 그와 이라크를 잘 몰라서 이라크 침공 후 여러 문제점이 발생했다"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미국 대사관
"MB는 미국에 기댈 수밖에 없다"
이런 이명박에 대한 미국 대사관의 평가는 어땠을까?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나설 후보군의 윤곽이 정해지던 2006년 7월25일 버시바우 대사가 작성한 후보별 분석 문서에 따르면 이 후보는 '강한 친미 입장(strong pro-American stance)'을 지닌 인물이다. 미국 대사관은 훗날 이 후보의 친형 이상득 의원의 입을 통해서도 이를 확인했다. 2008년 5월29일 미국 대사관 전문에 따르면, 전여옥 의원과 함께 버시바우 대사를 만난 이상득 국회부의장은 "이명박 대통령은 '뼛속까지(to the core)' 친미·친일이다"라고 말했다.
미국 대사관은 이런 친미 성향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렸을 때를 이용해 많은 것을 얻어내자는 전략을 짜기도 했다. 이 대통령이 당선자 신분이던 2008년 1월18일 작성한 문건에서 윌리엄 스탠턴 부대사는 "이 대통령은 경제 회복 공약으로 당선됐지만 현대 경제에서 그의 공약대로 7% 성장률을 이끌어내긴 어렵기에, 그는 앞으로 우리 미국과의 관계 발전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다"라며 앞으로 이 대통령에게서 얻어갈 수 있는 것들을 인식해야 한다고 밝혔다.
c뉴시스 이명박 대통령이 리처드 홀브룩 미 국무부 특보와 악수하고 있다. |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
"통일되면 북한이 미국 쇠고기 시장"
미국에 친미 이명박 정부의 등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부터 끌어오던 한·미 FTA 비준, 특히 미국산 쇠고기 개방 협상에도 호재였다. 미국 대사관 문서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대통령 당선자 시절부터 미국 관리들에게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빨리 재개됐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2008년 1월16일 미국 이노우에·스티븐스 상원의원과 함께 이 당선자를 만난 버시바우 대사는 "이 당선자가 '여기 기자가 없어서 하는 말인데, 나는 미국산 쇠고기가 질이 좋고 싸서 좋아한다'고 말했다"라고 밝혔다.
c롯데마트 제공 미국산 쇠고기 판촉행사 모습. |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촛불 참가자, 다 좌파 아냐"
2008년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군 미국산 쇠고기 이슈는 이 대통령 말고도 그해 미국 대사관이 접촉한 다른 국내 정치인과의 대화 기록에도 자주 등장한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2008년 5월9일 버시바우 대사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를 만나 "미국산 쇠고기는 안전하며, 박근혜 대표 같은 리더가 나서서 상황을 진정시켜줬으면 좋겠다"라고 부탁했다. 박 대표는 이에 대해, 일단 미국 정부와 합의부터 해놓고 국민에게 일방적으로 알린 이명박 정부의 태도를 비판하며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 참가자 다수는 좌파 활동가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물론 좌파 세력이 쇠고기 문제를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활용하긴 했지만, 시위자의 관심사는 정치가 아니라 웰빙, 즉 자신의 건강 수호다"라고 한 것이다.
c시사IN포토 2008년 5월2일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가 열렸다. |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
"미국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이슈를 비롯한 한·미 FTA 협상에서 미국에 가장 만만한 상대는 대한민국 외교통상부였다. 2006년 4월6일 미국 대사관이 작성한 문건에 따르면 한국 농림부와 달리 외교부는 협상 초기부터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긍정적이었다. 버시바우 대사는 "외교부가 농림부에 수입 재개를 촉구·회유 중이고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정보를 보고하고 있다. 하지만 쇠고기 수입의 향방을 결정짓는 건 외교부가 아니라 농림부이며, 외교부가 농림부 입장을 변화시킬 능력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라고 논평했다.
당시 한국의 FTA 협상 대표였던 외교통상부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 미국 초국적 제약회사에 불리한 '약가 적정화 방안'이 시행되지 않도록 노력했고, 이 정책이 청와대에서 논의 중이라는 사실을 미국 대사관에 미리 귀띔까지 해줬다는 사실도 이번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문서를 통해 확인됐다. 2006년 7월25일 미국 대사관이 작성한 문서에 따르면 김 본부장은 전날 버시바우 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한국 정부가 '약가 적정화 방안'을 담은 건강보험법 개정을 입법 예고하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싸웠다(fighting like hell)"라고 전했다.
cAP Photo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왼쪽). |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
"UAE 원전 수주, 내가 먼저 확정"
외교부가 입수한 중요한 정보는 한국 국민보다 미국 대사관에 먼저 갔다. 대표 사례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조사 중인 한국전쟁 중 미군의 양민 학살에 관한 보고서 내용이다. 2009년 10월20일 미국 대사관 전문에 따르면 외교부 한·미 안보협력과 박병준 서기관은 10월14일 진실화해위가 8건의 미군 공습기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을 확인했다며 "필요 시 한국 정부가 미국과 태스크포스를 꾸리거나 정부 간 논의를 요청할 수 있다"라고 미국 대사관에 전했다. 미국 대사관은 "이 보고서는 노근리 사건만큼 선동적이진 않을 것 같고, 이명박 정부도 (진실화해위 조사의) 의욕을 꺾는 데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라고 분석했다. 외교부가 이날 미국 대사관에 전달한 사건 8건이 포함된 진실화해위의 미군에 의한 민간인 희생 보고서는 이때로부터 1년이 지난 지난해 12월에야 국민들 앞에 발표됐다.
c청와대 제공 이명박 대통령과 칼리파 아랍에미리트 대통령. |
문서에 기록된 유 장관의 말에 따르면 아랍에미리트가 '지저분하게 플레이한(played dirty)' 계약 경쟁국 프랑스 대신 한국을 선택한 이유는 한국이 제시한 군사협력 조건 덕이다. 유 장관은 한국 퇴역 장교들을 아랍에미리트에 보내는 등 군사 훈련 프로그램을 제공하기로 한 협상 조건을 설명하며 "이 부분은 아직 대중에 공개되지 않은 기밀이며, 따로 국회의 비준을 받을 필요도 없다"라고 말했다. 당시 청와대는 아랍에미리트 원전 수주 계약에서 군사 협력 등 이면 합의가 있다는 의혹에 대해 강하게 부인했다.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
"오바마, MB랑 10분만…"
이렇게 성실히 정보를 보고하고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 한국 외교부도 미국 대사관에 종종 요구 사항을 전달했다. 2010년 2월4일 외교부 유명환 장관은 스티븐스 미국 대사와 커트 캠벨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를 만난 자리에서 "오는 4월 워싱턴 핵 안보 정상회의에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이명박 대통령과 함께 한국전쟁 기념비에 들러달라"고 요청했다. 유 장관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강력한 상징성이 있으니 10분 정도만이라도 오바마 대통령이 이 대통령과 함께해줄 수 있을지 미국 관리들에게 물었다. 캠벨 차관보는 그게 좋은 제스처라는 것에는 동의했지만 "워싱턴 핵 안보 정상회의에 워낙 많은 외빈이 찾아와서 추가로 이벤트를 잡기는 어렵다"라고 난색을 표했다.
c청와대 제공 이명박 대통령과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귓속말을 나누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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