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 성분이 든 물건을 살 때마다 ‘이건 괜찮을까’라는 걱정부터 들어요. 이제 그냥 안 쓰기로 했어요. 그게 마음이 편해요.”
서울 방배동에 사는 주부 윤서영(32)씨는 지난달 온라인 쇼핑몰에서 ‘원터치 모기장’을 샀다. 두 살 된 아들을 생각해 원래 쓰던 전자모기향은 버렸다. 윤씨는 플라스틱이 아닌 유리 젖병을 쓰고, 이유식도 유리 소재로 된 그릇에만 담는다. 그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 이후로 나뿐 아니라 아이를 키우는 주변 친구들도 최근 살림살이를 천연 제품으로 바꿨다”고 말했다.
143명의 사망자를 낸 가습기 살균제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한 지난 4월 이후 화학 생활용품을 극도로 꺼리는 ‘케미포비아(화학 공포증)’ 현상이 퍼지고 있다. 케미포비아는 화학을 뜻하는 ‘chemical’과 ‘공포증(phobia)’을 합친 말이다. 화학제품 사용을 극도로 꺼리는 사람은 ‘노(no)케미족’으로 불린다. 화장품을 만들어 쓰고, 천 기저귀로 회귀하는 소비자까지 생기자, 제조업체와 유통업체도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주방 세제 대신 ‘밀가루’, 소독·청소는 식초로
화학제품 기피 정서는 광범위하게 번지고 있다.
본지가 제일기획 빅데이터 분석 조직인 ‘제일 DnA센터’와 지난 3개월 동안(5~7월) 인터넷에 올라온 ‘생활 화학제품’ 관련 글 1만4000여 건을 조사한 결과, ‘건강’ ‘안전’과 관련된 연관 검색어가 1만1700건에 달했다. ‘우려’ ‘논란’ ‘유해한’ ‘불안’ ‘심각한’ 등 부정적 의미의 단어는 2657번 등장했다.
실제로 화학 성분이 들어간 생활용품 매출은 뚝 떨어졌다. 지난 3개월 동안 이마트에서 제습제와 탈취제 판매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각각 43%와 38% 급감했다. 롯데마트에서도 같은 기간 제습제 매출은 21%, 탈취제는 17% 줄었다.
생활용품뿐 아니라 화장품에 대한 우려도 생기고 있다. 국내외 6만여 개 화장품에 대한 유해도 등급을 매기는 스마트폰 앱인 버드뷰사의 ‘화해(화장품을 해석하다)’엔 “이 화장품 안전한가요”라는 문의와 제품 후기가 줄을 잇는다. 이 앱은 최근 다운로드 수 220만 건을 돌파했다.
반면 밀가루·식초·베이킹소다 판매는 늘고 있다. 밀가루는 과일을 헹굴 때, 식초와 베이킹소다는 때가 낀 욕실이나 주방 등을 청소할 때 쓰인다. 온라인쇼핑몰 11번가의 식초 판매량은 작년 같은 기간의 두 배 이상으로 뛰었고, G마켓의 천연 세제 판매도 약 두 배로 늘었다. 생활용품을 직접 만들어 쓰는 소비자도 많다. 지난 6월 신세계백화점 문화센터가 개설한 천연 비누와 세제 등 친환경 제품 만들기 강좌에는 전체 모집 정원의 세 배인 900명이 몰렸다.
◇“생활 편리 가져다준 생활 화학제품의 역습(逆襲)…후폭풍 계속될 것”
화학제품을 거부하고 천연 재료로 만든 생활용품을 찾는 소비자가 늘자 업체들도 ‘노케미족’ 잡기에 나섰다. 현대백화점은 지난달부터 백화점 전 점포에 친환경 생활용품 코너를 신설하고 베이킹소다, 뿌리는 식초 등 친환경 인증을 획득한 제품 200여 개를 팔고 있다. LG생활건강은 지난 4월 형광증백제 성분을 뺀 표백제 ‘테크 산소크린’을 내놨고, 롯데마트도 캐나다 세제 전문업체와 협력해 코코넛·대두 등 식물 추출 성분으로 만든 ‘캐나다 23.4°’ 세제를 내놓았다.
전문가들은 ‘케미포비아’ 현상이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최진희 서울시립대 환경공학부 교수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으로 우리 국민은 ‘대형마트에서 파는 거니까 당연히 안심해도 된다’는 막연한 생각을 버리게 됐다”며 “치약 대신 소금으로 이빨을 닦고, 시판용 기저귀를 천 기저귀로 대체하는 현상이 최소 1~2년은 더 이어질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케미포비아 현상에 너무 매몰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미 수십 년 동안 써온 비누와 치약과 같은 생활용품들이 우리 생활에 가져다준 기능과 편리를 무시할 순 없다는 것이다. 식약처 안만호 대변인은 “환경부와 식약처가 전수조사에 나서 문제 제품들은 퇴출시키기로 한 만큼 결과를 지켜보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제품을 선택해야 한다”고 밝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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