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수
논설위원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는 성실하고 겸손하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허리를 굽히는 데 인색하지 않다. 여당 불모지라는 호남에서 재선에 성공하고 영남 기반의 보수정당에서 대표까지 오른 데엔 그의 성품이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 대표의 이런 모습이 박근혜 대통령과의 관계에선 어떻게 나타날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과거 야당 시절, 이 대표는 기자들과 식사를 하다가도 박 대통령 전화가 오면 벌떡 일어나 저 멀리서 누군가 들을세라 두 손을 전화기에 모으고 공손하게 통화를 하곤 했다. 하지만 이 대표가 먼저 박근혜 대통령에게 전화를 거는 걸 본 사람은 없다. 그가 전당대회장에서 “근본 없는 놈을 발탁해준 박 대통령께…”라고 말할 때, 단순한 상하관계를 넘어서는 ‘충직한 돌쇠’를 떠올리게 되는 건 그래서 어쩔 수 없다.
이정현 대표의 승리가 청와대에 얼마나 큰 안도와 기쁨을 안겼을지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김재원 청와대 정무수석이 이 대표에게 “많은 사람이 행복해하고 있다”고 말한 건 곧 “박 대통령이 행복해한다”는 뜻이다. 임기 말로 다가서는 상황에서 여당 대표에 대통령의 충성스러운 측근이 선출됐으니 그보다 더 든든한 일이 없을 듯하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박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들에겐 의도하지 않은 착시 현상이 일어난다.
이정현 대표 체제 출범은 박 대통령과 친박 세력을 ‘세상을 보고 싶은 대로만 보게 하는’ 착각에 빠뜨릴 가능성이 높다. 이제까지의 국정운영 방향과 방식이 옳았고 이걸 계속 유지하는 게 정권의 성공을 보장할 수 있으리라는 착각이다. 4월 총선 이후 수개월간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은 ‘친박’은 이제 다시 신뢰와 추진력을 회복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친박 핵심 중 한사람인 홍문종 의원이 전당대회 다음날 “비주류는 당원과 국민의 표심을 잘 생각해봐야 한다”고 주장한 건 그런 심정의 표현이다.
그러나 냉정히 돌아보자. 당원과 지지자로 이뤄진 전당대회가 온 국민이 투표에 참여한 국회의원 총선거의 결과를 대체할 수는 없다. 그나마 새누리당 경선에선 전체 당원·대의원의 20% 정도만 투표에 참여했다. 자발적이든 또는 동원에 의해서든 지역에서 가장 열성적인 당원만 표를 던졌다고 보면 된다. ‘이정현 승리’라는 전당대회 결과는 새누리당 핵심 당원과 일반 국민 간 인식의 괴리가 너무 벌어져 있다는 걸 드러내는 징표일 뿐이다. 총선 이후 대통령에 대한 국민 평가가 바뀌었다는 어떤 징후도 갤럽을 비롯한 여론조사에선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괴리는 새누리당의 내년 대선 가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문제가 곪아터져 밖으로 드러나면 오히려 고치기 쉽다. 몸속 깊숙이 환부는 커지는데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게 더욱 심각하다. 지금 이정현 대표 체제의 새누리당이 꼭 그렇다. 대통령 스타일을 바꾸고 친박 패권을 떨쳐내야 외연을 확장할 텐데, 오히려 열성 당원들이 ‘대통령 친정 체제’를 승인해버렸으니 환부는 속으로 계속 곪을 수밖에 없다. 친박 일색의 지도부와 당-청 밀월은 일시적으로 여권의 안정을 가져오는 듯 보이겠지만, 장기적으론 새누리당 미래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어 내부 분란을 심화시킬 것이다.
이정현 대표는 ‘국민’도 말하고, ‘대통령’도 강조한다. 하지만 대통령에게 실망한 민심이 되돌아서지 않는 상황에서 당심과 민심의 위태로운 균형이 오래갈 수는 없다. 대통령 지지율이 당 지지율을 밑도는 순간, 불안정한 얼음엔 쫙 금이 갈 것이다. 예고된 비극 속으로 이 대표는 다가서고 있다.pc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