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내내 우파 민족주의자의 건국 강령과 좌파들의 건국 계획은 몇 가지 사항을 공유했다. 완전한 주권을 가진 나라를 만들고자 했기에 신간회부터 건국준비위원회까지 거의 20년이나 되는 좌우합작 시도들의 역사도 있었다. 주권이라는 것은, 의식 있는 조선인에게는 당연히 가장 필요한 것으로 보편적으로 인식돼 있었다.
진정한 의미의 국익이 있다면 이는 바로 공익, 즉 모두들의 생명, 평화, 행복이다. 이와 같은 의미의 국익 차원에서 본다면 사드 배치만큼 국익을 침해할 수 있는 일도 상상하기 어렵다. 생명을 해칠 가능성이 큰 유해시설이며, 중국 상대 포위망의 하나의 거점으로 한국의 위치를 고착시킨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나라 위에 나라가 없고, 나라 아래 나라가 없다”. 유길준이 <서유견문>에서 쓴 유명한 문장이다. 비록 조선은 약소국이었지만, 국제법(‘민국공법’) 본위의 세계에서 조선도 다른 나라처럼 완전한 독립을 가진 주권국이 되었으면 하는 것은 유길준을 포함한 그 당시 많은 조선인들의 희망이었다. 사실, 1894년 5월에 청일전쟁을 개시하려는 일본군이 상륙하여 ‘주권’이 빈말 되기 이전에도 1880년대 말~1890년대 초의 조선 주권은 현실적으로 제한적이었다. 조선의 지방관이 흉년으로 인하여 방곡령을 선포해도 미곡 장사를 방해받았다는 일본 상인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해야 했고, 일본 어선들이 조선 근해에서 고기잡이를 해도, 그 수입의 1~2%쯤 될까 말까 하는 최저 세율로만 세금을 매기고 치외법권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던 일본 범법자들을 처벌할 수도 없었다. 한데 감 내라 밤 내라는 열강 공사들의 호령에 속수무책이던 시절의 제한적 주권마저도 1894년과 1904년 일본군 상륙으로 무너졌고, 유길준 같은 먹물들은 “국제법 책 만 권은 대포 한 문에 못 미친다”고 한탄해야 했다.
일제 강점기 내내 우파 민족주의자의 건국 강령과 좌파들의 건국 계획은 몇 가지 사항을 공유했다. 예컨대 -지금으로서는 급진성의 극치로 보이겠지만- 우파 민족주의자마저도 주요 공업 시설의 국유화를 새 나라 건설에 필요할 것으로 예상했다. 한데 이외의 가장 핵심적인 공통의 구호는 물론 “조선의 완전 독립, 일본군의 완전 철수”였다. 양쪽이 완전한 주권을 가진 나라를 만들고자 했기에 비록 한계가 있었지만 신간회부터 건국준비위원회까지 거의 20년이나 되는 좌우합작 시도들의 역사도 있었다. 주권이라는 것은, 의식 있는 조선인에게는 당연히 가장 필요한 것으로 보편적으로 인식돼 있었다. 이는 그 어떤 비이성적인 “민족주의”의 문제도 아니었다. 자본주의 자체에 적대적이었던 공산주의자들마저도, 자국 유치 산업을 보호하고 자본을 육성할 만한 주권 국가가 없는 경우에 기형적인 종속경제만이 가능하다고 그 강령에서 자주 쓰곤 했다. 그러나 특히 1930년대에 들어 그들은 무엇보다는 중국 침략을 감행하는 일제가 조선인까지 끌어들여 총알받이로 이용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그래서 그들의 강령에서 조선 주권의 회복과 제국주의 전쟁 반대, 국제 반전 연대 등은 나란히 명기되곤 했다.
독립운동가들이 바라는 바와 달리 민중혁명이 아닌 또 다른 외세들이 일제를 패망시켰으며, 그렇게 해서 얻은 해방 아닌 해방에 바로 분단과 전쟁이 따랐다. 한국 전쟁 시기에 미군 등 유엔군에 의존했던 남한도, 중국군과 소련 무기에 의존했던 북한도 어느 정도 그 주권을 상대화하는 외세 간섭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한데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주권의 문제에 있어서 남북한의 길은 갈리고 말았다. 북한은 1950년대 말부터 중·소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결국 양쪽에 대한 의존성을 상대화해 1960년대 초반에 이르러 세계 무대에서 제3세계의 여러 운동들을 후원하는 하나의 비교적 독립적인 행위자로 역할할 수 있었다. 비록 일파, 일인 독재 권력의 강화와 보조를 맞추어서 획득된 주권화긴 하지만, 북한인의 입장에서 보면 한반도 근대의 하나의 값진 성취물일 것이다. 1990년대 초 이후의 각종 경제적 곤란 속에서도 북한 정권이 여전히 그 정통성을 잃지 않고 대부분 주민들에게 충성의 대상이 되는 하나의 담론적 이유는, 바로 주권에 대한 근대적 열망의 누적이 아닌가 싶다. 주권을 지키기 위한 일이라면 고난의 행군도 마다하지 않는 자세 역시 주권이 오랫동안 유린당해온 근현대사의 산물이다. 한데 남한은 전혀 다른 외교적 궤도를 따랐다. 비록 이제 북한과 비교 못 할 정도로 부강해졌지만, 대미종속의 정도는 가난했던 1950~60년대와 별로 달라지지 않고 사실 거의 그대로다. 이번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 사태야말로, 대한민국에 사실상 주권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점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말았다.
우파가 좋아하는 단어 중의 하나는 ‘국익’인데, 보통 저들이 국익이라고 말하는 것은 저들의 집단 사익에 불과하다. 진정한 의미의 국익이 있다면 이는 바로 공익, 즉 모두들의 생명, 평화, 행복이다. 이와 같은 의미의 국익 차원에서 본다면 사드 배치만큼 국익을 침해할 수 있는 일도 상상하기 어렵다. 생명을 해칠 가능성이 큰 유해시설이며, 이 시설의 배치는 중국 상대 포위망의 하나의 거점으로 한국의 위치를 고착시킨다. 나아가서 가상적의 공격에 대한 중국의 대응을 무력화하기에 군사력 균형에 기반한 지역 평화를 크게 해치는 시설이다. 한국을 하나의 잠재적 전장으로 만들 이런 시설이 한국 땅에 있는 이상, 한국 주민들의 집단적 행복추구권은 그저 무의미한 빈말이 된다. 일부 보수 매체마저도 사드 배치가 한국 경제에 생명 같은 한-중 경협을 해칠 우려를 표명하지만, 이 문제는 ‘경제’의 영역을 훨씬 뛰어넘는다. 사드가 배치되면 한국은 대륙 침공을 꿈꿀지도 모를 외세의 병참기지가 된다. 경제뿐만 아니고 모든 차원에서 그 침공의 잠재적인 타깃이 될 나라들로부터 고립을 당할 것이다. 그래서 사드에 대한 반대는 거의 식민지 시대의 좌우합작처럼 포괄적이고 거국적이다. 중국 대상 교역과 투자로 먹고사는 기업인들은 물론이고 일부 외교 관료들까지 반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성주 같은 피해지역에서는 가장 보수적인 주민들도 반대에 나섰다. 그런데도 펜타곤의 ‘요청’대로 사드 배치가 강행되는 배경에, 바로 대한민국 주권의 제한성이 있다고 본다. 군부나 청와대로서는 미국의 ‘요청’에 ‘아니요’라고 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여기에서 특기해야 할 것은, 이 문제는 한국의 명목상의 최고권력자가 누구인가와 거의 무관하다는 것이다. 나는 박근혜의 정치 스타일이나 정책을 좋아할 일은 없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박근혜는 여태까지 -주로 재벌들의 이해관계에 근거하여- 중국과의 파트너십 공고화에 계속 공을 들여왔다. 미국의 만류를 무릅쓰고 2015년에 중국 전승절 열병식에 참여한 것만 해도, 그녀가 챙겨주는 재벌들에 중국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보여준다. 러시아의 크림 반도 병합 이후에는 한국은 -미국의 동맹국 중에서는 다소 보기 드물게- 러시아 제재를 가동하지 않아 사실상 중립에 가까운 자세로 일관했다는 것은, 재벌들과 재벌 정부가 가능만 하다면 안보 차원에서 미국에 종속돼도 경제 본위주의적 입장에서 열강 사이의 균형적 실리외교를 선호할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박근혜의 대륙 이웃들과의 파트너십 전략 이상으로 노무현 정권의 중국 외교는 더더욱 더 적극적이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 이전에 한-중 자유무역협정에 대한 내부적인 검토가 먼저 있었으며, “동북아 균형자” 같은 발언들은 중국 쪽에 한국의 상대적 자주화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심었다. 한데 노무현은 -지지층 붕괴를 뻔히 각오하면서도- 미국의 ‘요청’대로 이라크 파병을 강행했으며, 박근혜는 -지배층 안에서조차도 합의되지 않은- 사드 배치를 미국의 ‘요청’대로 추진한다. 거역 못할 이 ‘요청’의 진정한 성격이 무엇인지 과연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하지 않는가?
“우리는 미국의 동맹국이라서 어쩔 수 없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미국의 동맹국 중에서도 미국의 ‘요청’ 앞에서 이렇게 무력해지는 나라들은 보기가 드물다. 미국과 가장 가까운 우방이라고 할 캐나다도 이라크 파병을 능히 거절했으며, 중동에서 미국의 가장 오래된 동맹국인 터키도 이라크 침략의 동참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침략을 위한 자국 영토 이용도 미군에 거절했다. 이 정도의 주권도 가지지 못한 대한민국은, 과연 자국민과 자국 영토를 전쟁의 참화로부터 지켜낼 수 있을까? 1930년대처럼 주권회복과 전쟁반대를 동시에 외쳐야 할 시점이 다시 온 것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