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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December 22, 2016

“조대환이 민정수석? ..세월호 유가족 우롱하는 것 같아” ... [이영광의 발로GO 인터뷰105] 세월호 희생자, 故오준영 군 어머니 임영애씨

최순실 게이트로 촉발된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요구가 우여곡절 끝에 지난 9일 국회에서 234표의 찬성으로 탄핵 소추안이 가결되었다. 예상을 뛰어넘는 찬성표였다. 탄핵을 원하던 국민들은 그 순간 함께 얼싸안으며 환호했다. 12월 9일은 또 하나의 시민 혁명으로 기록해도 손색없을 것 같다.
모두가 환호하는 순간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바로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로 자식을 잃은 유가족들이었다. 당시 어떤 심정이었는지 궁금해 세월호 희생자 고 오준영 군의 어머니 임영애 씨를 지난 14일 광화문의 세월호 광장에서 만났다.

임 씨는 박 대통령 탄핵에 대해 “방송으로 보다가 가결되는 순간 준영이 이름을 부르며 많이 울었다”면서 “이제 박 대통령이 7시간 밝혀서 아이들을 왜 구하지 않았는지 밝히기 위해 지금까지 해왔던 것보다 더 열심히 해 진실을 밝히는 데에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은 탄핵 가결 후 국무위원 간담회를 통해 “피눈물이 난다는 게 무슨 말인가 했는데, 이제 어떤 말인지 알겠다”는 말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임 씨는 “저희가 자식을 잃고 흘린 피눈물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주생활만 하다가 못하게 되니 억울하고 분해서 흘린 눈물 아닌가 한다.”면서 “화가 나고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지난주 박 대통령의 세월호 7시간 중 90분을 올림머리했다는 보도가 나오자 국민은 더 분노했다. 당사자인 유가족은 어떤 심정이었을지 궁금했다. 이에 임 씨는 “7시간 동안 성형을 했다거나 굿, 혹은 인신 공양을 했다는 얘기가 나왔을 때 그 얘기가 아니기를 엄마의 심정으로 기도했다. 90분이면 충분히 살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그때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올림머리와 식사를 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올림머리를 흐트러트리기 위해 다시 20분을 소요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저희야말로 피눈물이 났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박 대통령은 탄핵 소추안이 가결된 후 최재경 민정수석의 사표를 수리하고 후임으로 세월호 특조위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다 사퇴한 조대환 변호사를 임명했다. 이에 임 씨는 “조 변호사는 세월호 특조위를 해산시킨 장본인이고 방해자다.”면서 “끝까지 머리 굴리며 유가족을 우롱하는 것 아닌가란 생각을 했다.”고 분노했다.
  
▲ 세월호 희생자 고 오준영 군의 어머니 임영애 씨 ⓒ 이영광 기자
다음은 임영애 씨와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가결 순간 준영이 이름 불으며 많이 울었다”

- 지난 9일 박 대통령의 탄핵 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었는데 어떻게 보셨어요?
“가결되는 걸 방송으로 보다가 가결되는 순간 준영이 이름을 부르며 많이 울었어요. 생각해보니 이제 시작인 거예요. 이제 박 대통령이 7시간 밝혀서 아이들을 왜 구하지 않았는지 밝히기 위해 지금까지 해왔던 것보다 더 열심히 해 진실을 밝히는 데에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 탄핵 직후 박 대통령이 국무위원 간담회에서 "피눈물이 난다는 게 무슨 말인가 했는데, 이제 어떤 말인지 알겠다.”고 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저희가 자식을 잃고 흘린 피눈물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공주생활만 하다가 못하게 되니 억울하고 분해서 흘린 눈물 아닌가 해요. 그 사람이 자식 잃고 길에서 싸우는 저희의 눈물을 진심으로 알까란 생각이 들고 90분 올림머리하고 밥까지 먹었다는 보도를 들을 때와 같이 화가 나고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아직도 자기가 뭘 잘 못 했는지 모르는 것 같아요.
“자기가 뭘 잘 못 해서 살 수 있는 아이들이 죽었고 국민들이 무엇 때문에 저렇게 고통받고 토요일마다 촛불을 드는지에 대한 공감을 못 하는 것 같아 그것에 대한 화가 많이 나는 것 같아요.”

“올림머리, 밥 먹었다는 보도에 유가족이야말로 피눈물 났다”

- 세월호 당시 박 대통령의 7시간이 미스터리였는데 그중 밝혀진 게 90분 동안 미용사 불러서 머리를 했다는 것이잖아요. 그 보도 어떻게 보셨어요?
“7시간 동안 성형을 했다거나 굿, 혹은 인신 공양을 했다는 얘기가 나왔을 때 그 얘기가 아니기를 엄마의 심정으로 기도했었거든요. 우리 아이들이 팽목항의 그 시간은 저희에겐 죽음의 시간이었고 우리 아이들은 살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90분이면 충분히 살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그때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올림머리와 식사를 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올림머리를 흐트러트리기 위해 다시 20분을 소요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팽목항을 떠올리게 돼요.

  
▲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 표결이 진행된 9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탄핵안이 234표로 가결되자 방청석에 있던 세월호 유가족들이 사고로 희생된 고인들의 사진을 펼쳐보이며 구호를 외치자 방호원이 프랜카드를 빼앗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90분에 아이들은 죽어갔고 에어포켓을 믿던 부모님들은 언젠가는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어요. 그리고 전 대통령만 진도체육관이나 팽목항에 와서 ‘구해라. 왜 지금 사람을 구하지 않고 있느냐’라고 하면 아이들이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그것도 무너졌는데 그 시간에 올림머리를 했다고 하면 저희야말로 피눈물이 나는 거죠.”

- 올림머리를 한 것도 문제지만 그보다 그 시간에 보고도 받고 뉴스를 통해 상황 파악을 할 수 있었는데 안 했어요.
“맞아요. 그런데 그 시간 서면 보고를 받고 대면 보고를 안 받았다는 말이 많고 나중에 김기준 전 비서실장이 국정조사에서 만들어낸 말 아닌가 해요. 서면보고가 몇 차례 됐다는 말도 전 믿을 수가 없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우리 아이들을 구하지 않고 버려뒀다는 마음밖에 들지 않아요.
왜냐면 처음부터 그런 말이 나온 게 아니에요. 김 전 실장이 2014년 청문회 때 뭐라고 했냐면 어디에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했어요. 그래서 지금 서면보고를 했다는 건 만들어낸 말 아닌가 생각해요. 저는 믿을 수가 없는 거예요. 무조건 올림머리하고 작기 사생활에만 신경 셨지 세월호 안에 있는 아이들은 버려뒀다는 생각밖에 할 수 없는 거예요.”

- 이제 겨우 90분 밝혀졌고 5시간 30분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어요.
“네. 그래서 물꼬를 튼 것이잖아요. 물론 헌재에서 결정이 나오겠지만 길면 6개월 걸린다고 아는데 빨리 결정 나서 탄핵되고 저희는 즉각 퇴진이거든요. 정말 촛불민심이 끝이지 않고 끝까지 저희 부모도 앞장서서 우리 아이들 304명을 잊지 않는다면 모든 시간이 다 밝혀져서 구속 시킬 수 있죠. 304명이 진정한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저희는 버티고 그렇게 싸워나갈 거예요.”

- 최순실 게이트가 터졌을 때 어땠어요?
“그때 7시간을 밝히라는 말이 같이 나왔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저희는 뭔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박 대통령에 대한 믿음은 없었지만 저런 인간이었고 최순실도 세월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까지 생각하면서 이제는 더 열심히 국민과 연대하면 되겠다는 희망이 생겼어요.
저희 부모님들은 9월 30일 특조위가 강제종료되고 진실규명이 안 되면 아이들에게 미안해서 어떻게 하지란 생각에 많이 좌절해서 그 뒤로 우울증약이 없으면 생활이 안 되고 수면제 안 먹으면 못 잘 정도로 절망스러웠거든요. 그런데 물꼬가 뜨여서 다시 시작이란 마음으로 부모님들은 포기할 수 없는 문제잖아요. 저희는 어떤 상황이든 싸워야 한다는 마음입니다.”

- 탄핵의결 할 때 민주당에서 방청석에 유가족이 오도록 배려했어요.
“그것은 세월호 유가족이 피해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35석 방청권이 나왔어요. 그래서 못 가신 부모님도 계세요. 저는 방송으로 봤지만 가신 부모님들은 제가 느꼈던 것보다 더 많이 울고 환호도 지르셨죠. 그때 뭔가를 얻었다는 마음을 가지셨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저는 잘 된 것 같아요. 부모님이 가서 방청하신 것도 역사의 증인으로 남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 자리에 유가족이 있었다는 것도 좋게 생각해요.”

- 아쉽진 않나요?
“제가 약간 공황장애가 있거든요. 그날 발작이 온 거예요. 그래서 못 갔지만, 방송으로나마 봤고 유가족이 거기 갔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을 한 것 같아요. 저는 어느 자리고 유가족이 앞장서서 해야 진실이 더 빨리 밝혀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 아닌 다른 유가족이 참석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 합니다.”

“조대환 임명, 끝까지 머리 굴리며 유가족 골탕 먹여”

- 탄핵이 가결된 직후 박 대통령은 세월호 특조위 부위원장을 맡았던 조대환 변호사를 신임 민정수석으로 임명했는데.
“조 변호사는 세월호 특조위를 해산시킨 장본인이고 방해자잖아요. 그래서 끝까지 머리 굴리며 유가족을 우롱하는 것 아닌가란 생각을 했어요. 그러나 저희는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는 것을 조 변호사와 박 대통령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거예요. ‘나네 둘이 방해했지만 촛불 들고 국민의 힘으로 지금까지 싸우고 멈추지 않을 것이다.’며 조 변호서 임명을 선물로 받아들이고 더 할 거예요. 지금 한 것보다 총력을 다해서 조 변호사와 박 대통령 그리고 여당과 저희 뜻을 같이하지 않는 야당 의원들에게 우리 주권은 어떤 것이고 유가족은 어떤 마음이란 것을 꼭 보여줄 거예요.”
  
▲ 조대환 신임 민정수석 <사진출처=조대환 수석 페이스북>
- 지난 3일 6차 촛불 집회 때 청와대 100미터 앞까지 행진했잖아요. 세월호 유가족이 맨 앞에 서서 화제가 되었는데.

“저도 갔었어요. 대통령의 7시간은 아이들이 살 수 있었던 시간이에요. 그리고 진실을 밝히는 것이 죽을 수 없는 이유이기 때문에 저희가 앞장서서 퇴진시키고 구속시켜야 한다는 마음으로 앞장섰어요. 100미터 앞에 갔을 때는 100미터 간 것이 문제가 아니라 뭔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죠. 국민이 화나면 뭐든 할 수 있다는 거죠. 분수대 앞까지는 중국인도 여행차 갈 수 있는 곳을 유가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안에 못 들어갔거든요. 국민과 함께 갔을 때 벅차오름은 고마움도 있었지만 분함도 있었어요. 아이 생각이 많이 난 것 같아요. 왜 해야하는지 자괴감도 있었지만 뭘 해냈다는 자긍심도 있었던 것 같아요.”

- 지난 토요일이 7차 촛불집회였는데 어떻게 보셨어요?

“제가 건강상 7번 중 5번 왔어요. 올 때마다 느낀 게 뭐냐면 아이들이 발언하는데 너무 감동스러우면서도 미안한 거예요. 저 어린아이들이 나와서 발언하게 하는 어른으로서 미안하고 박 대통령이 더 미운 거예요. 마음 바꿔서 내려오기만 하면 되는 데 저 어린아이들이 뭔 죄라고 고생시키나 하죠. 다 준영이 또래이나 형 동생 또래 아이들이 해요. 특히 초등학생이 나와 저희를 위로하기도 했어요. 제일 가슴에 남았던 말이 ‘저는 조금만 아파도 우리 엄마가 발발 떠는데 부모님들은 잃으셔서 그 마음이 어떻겠어요? 라는 말을 했어요. 그게 기억에 남아요.

그리고 에피소드로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처음 본 분인데 유가족이라 안아주고 싶다며 안아줘요. 제가 처음 본 사람을 안는 성격은 아니었는데 누구든 안고 ’힘냅시다‘라고 해요. 그리고 추운 데 앉아 있으면 누군지 모르는 데도 핫 팩이나 커피를 갖다 줘요. 저도 주죠. 그런 것이 힘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박 대통령은 모르는 끈끈함을 촛불집회에서 느꼈고 발언 하나하나에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어요.”

“이젠 울지 않고 끝까지 싸울 것…인양에 관심 많이 가져달라”

-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2년 8개월이 지나는데 어떻게 보내셨어요?
“2014년 4월 16일처럼 2년 8개월을 그렇게 보낸 것 같아요, 시간이 갈수록 아들은 더 보고 싶어져요. 꿈에서 1초라도 안아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많이 힘들기는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힘들 때마다 집회나 간담회 그리고 인터뷰를 하면서 제가 살아가는 이유를 다시 되새기는 것 같아요.

준영이는 자기 생일에 올라왔어요. 참사 일주일 후인 4월 23일이 생일이거든요. 몸이 물속에 일주일 동안 있었기 때문에 사람 체온으로 만지면 아이가 녹는다고 해서 못 만지고 보냈어요. 다친 곳은 없는지만 봤는데 잠자는 아기처럼 있더라고요. 그러나 못 만졌기 때문에 꿈에 한 번만이라도 만지고 싶다는 생각으로 2년 8개월을 산 것 같아요.

꿈이라 꾸면 좋겠어요. 그리우니 병이 되잖아요. 그 모든 것을 활동하며 처음엔 준영이를 위해서라고 했었는데 지금은 희생자와 아직 올라오지 못한 미수습자를 모두를 위해 살았고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그렇게 살려고요.”

- 언제 가장 준영이가 보고 싶어요?
“준영이는 다정다감했고 살가웠던 아이예요. 항상 보고 싶지만 길을 가다 보면 엄마와 아들이 장난치면서 어깨동무하고 가는 걸 볼 때 부러우면서 보고 싶죠, 준영이가 저보다 컸거든요. 아침에 눈을 뜨면 보고 싶고 길에서 대학생 정도 되는 아이를 보면 더 생각나죠.

그리고 교실을 옮겼잖아요. 제가 다니는 정신과 병원이 바로 앞이에요. 그래서 병원을 갈 때마다 지나가지만 들어가지 못해요. 왜냐면 학교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너무 큰 거예요. 교육청으로 옮겨 예쁘게 잘 꾸며 놓기는 했어요. 신경을 쓰시기는 했지만, 준영이가 생활하던 곳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갈 때마다 들어가지 않아요. 겉만 보지만 준영이 책상이 저기 있다는 생각에 보고 싶죠.”

- 마지막으로 한마디 해주세요.
“제가 이젠 울지 않고 웃으면서 끝까지 버텨야 하니 건강 챙기면서 싸우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많이 생각해 주시고 저희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응원해 주시는 분들을 위해서라도 더 이상 아프지 않고 울지 않고 웃으면서 아이 진실 밝히는 날까지 싸울 거예요. 3주기가 다가오고 있잖아요. 그때는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해서 조금은 나아졌다고 아이 영정사진 앞에서 말할 수 있는 부모가 되고 싶어요.

여러분들에게 가장 바라는 것은 인양에 관심을 많이 가져 주세요. 지금 미수습자 가족은 아직은 유가족이 되지 못한 아픔을 가지고 팽목항에서 아픈 몸으로 기다리시거든요. 그분들 마음 헤아려 주세요. 미수습자 올라오는 날까지 많이 관심 가져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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