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투위에서 노무현까지 한국언론을 증언하다[신간] ‘정연주의 기록’… 평생 잊지 못할 그의 약속
‘노무현’과 ‘정연주’. 참여정부를 만든 대통령과 그 대통령이 임명한 KBS 사장. ‘조·중·동’으로 상징되는 언론권력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정면으로 싸운 정치인과 언론인. 언론개혁을 향한 집념과 열정을 한 번도 내려놓지 않은 투사.
두 사람을 관통하는 키워드다. 1946년 개띠 동갑에 경상도 출신이라는 공통점은 ‘보너스’. 그런데 두 사람이 실제 만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정연주가 KBS 사장이 되기까지 노무현을 만난 것은 세 번에 불과하다. 2001년 12월 송건호 선생 영결식, 2002년 말 대통령 당선 직후 여의도 중식당에서의 우연한 만남, 2003년 1월 대통령 당선자의 예고 없는 한겨레 방문.
KBS 사장이 된 뒤에도 정연주는 대통령을 만난 게 그리 많지 않았다. 대부분 의례적인 공식행사였다. 프로그램 출연을 위해 대통령이 KBS에 온 경우나 ‘방송의 날’ 같은 행사장에서 만나는 경우다.
노무현의 ‘약속’
그나마 조금 여유 있게 이야기한 것은 KBS 사장 초기 청와대 오찬 때다. 관례로 이뤄지던 KBS 해외동포상 수상자들의 청와대 방문행사에 대통령 내외와 오찬을 하게 된 것. 오찬이 끝나고 일행이 청와대를 떠날 때, 대통령은 정연주 사장에게 평생 잊지 못할 ‘약속’을 했다.
“정 사장님, 제가 앞으로 대통령 하면서 절대 전화하지 않을 사람이 두 분 있습니다.”
“두 사람이 누군데요?”
“검찰총장과 KBS 사장입니다. 정치적 중립과 독립이 가장 중요한 기관 아닙니까?”
2009년 5월 23일. 대통령이 봉하마을 부엉이 바위에서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그에게 맨 먼저 떠오른 것은 2003년 3월 6일의 ‘약속’이었다. “앞으로 대통령 하면서 절대 전화하지 않을 사람이 두 분 있습니다”라는 그 말.
역설적이게도 대통령은 정치적 중립과 독립을 위해 전화할 수 없다고 한두 집단, 검찰과 언론에 의해 죽음의 길로 갔기 때문이다. 정연주 전 사장은 “나는 그것이 너무나 억울했다”고 당시 비분을 표현했다.
정연주의 ‘증언’
그리고 지금도 그 말이 귓전에 쟁쟁하다. 최근 언론을 주제로 한 강연이나 토론에서 그는 이 말을 빼놓지 않고 증언한다. 대통령은 KBS 사장인 내게 그 약속을 지켰다고. KBS 보도와 프로그램 중 참여정부에 상당한 타격을 준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한 번도 전화하지 않았다고. 전화를 하지 않았다는 ‘행위’뿐만 아니라 그런 종류의 ‘개입’이나 ‘간섭’도 없었다고. 정말 철저하게 약속을 지켰다고.
그래서 그게 참 고마웠다고. 대통령 자리의 무게가 상당한 데, 직접 전화해서 “KBS 요즘 너무 심합니다” 하면 인간인 이상 압박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런 압박감이 언론인 생활을 위축시켰을 것이 분명했다고. 성격에 그런 전화를 받았다면 KBS 사장을 계속 할지 많이 고뇌했을 것이라고.
정연주 전 사장은 노무현의 ‘약속’을 ‘증언’할 때마다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자연인으로서 인연은 길지 않지만, 두 사람에게는 어쩌면 전생부터 ‘동지’였을지도 모르는 강고한 연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연주-노무현의 ‘연결고리’
그 ‘동질’과 ‘연결고리’를 최근 펴낸 <정연주의 기록-동아투위에서 노무현까지>를 통해 진솔하게 털어놨다. 2002년 말에 출간했다가 지금은 절판된 <서울-워싱턴-평양>을 크게 개정, 보완한 책이다.
동아일보에 입사하기 전 학창시절 이야기, ‘바보 노무현’과의 인연, KBS 사장이 되는 과정은 모두 이번에 새로 쓴 것이다. 특히 제7부 ‘바보 노무현과 나’는 정연주와 노무현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정연주가 노무현을 처음 접한 것은 ‘청문회 스타 노무현’. 그러다 1998년 종로 국회의원 시절, 노무현은 당시 정연주 한겨레 워싱턴특파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오늘 아침 ‘정연주 칼럼’의 내용이 참 좋은데, 나의 홈페이지에 옮겨서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볼 수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2000년 정연주가 귀국하고 두 달 뒤 노무현은 해양수산부 장관이 되었다. 그때까지도 두 사람은 직접 만날 기회가 없었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열심히 살았다. 노무현은 대권에 도전해 온갖 풍상을 겪으며 정면 돌파하고 있었고, 정연주는 한겨레 논설주간으로서 맡은 일을 열심히 했다.
2001년 말 송건호 선생 장례식장에서 두 사람은 첫 대면을 했다. 대통령은 민주당 상임고문으로 참석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낯설지 않았다. 정연주 전 사장은 마치 오랜만에 고향 친구를 만난 느낌이었다고 했다. 세상을 보는 눈, 특히 언론을 보는 눈이 같다는 동질감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고 회고했다.
두 사람의 ‘연결고리’는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우리나라 ‘조폭언론’의 반언론적 행태에 대해 느끼고 공유하는 강렬한 문제의식이었다. 언론문제에 대한 인식과 열정은 노무현과 정연주를 이어주는 태생적 연결고리였다. 조·중·동의 반언론적 행태와 그에 따른 인격살해의 피해를 직접 당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조폭언론’ 조·중·동의 인격살해
정연주는 1970년 동아일보에 입사했지만, 자유언론을 외치다가 동료 140여 명과 쫓겨났다. 투옥, 수배, 도피생활이 계속 됐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돼 수배를 받던 중 아내가 체포돼 곤욕을 치렀고, 늙은 아버지까지 연행되는 고통을 당하는 등 정권의 만행을 경험했다. 수배로 배웅하지 못한 부모는 미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2000년 10월 11일 그는 한겨레에 쓴 ‘한국 신문의 조폭적 행태’에서 ‘조·중·동’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내며 언론개혁 논쟁의 중심에 섰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KBS 사장으로 임명되면서, 그는 자신이 ‘몹쓸 언론’으로 지목했던 ‘조·중·동’과 수구세력, 이명박 정권의 대표적 표적이 되었다. KBS 사장 강제해직, 표적수사, 마녀사냥식 여론몰이로 인격살해를 또다시 당해야 했다.
정치인 노무현은 삶이 곧 투쟁이었다. 1991년 <주간조선>의 ‘호화요트’ 왜곡보도로 시작해 정치를 하는 동안 내내 언론과 불편한 관계였다. 수구언론의 공격은 끝내 그의 죽음까지 모질게 따라다녔다.
그러나 그는 언론과의 싸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부당한 언론의 횡포에 비굴하게 원칙 없이 침묵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겠다”는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 발언은 노무현의 정치인생에서 중요한 축이었다. 조폭언론과 맞선 투쟁의 기록이라고 할 정도로 집요한 공격을 당한 참여정부 5년 동안에도 언론개혁의 의지와 열정은 변함이 없었다.
잘 가시라 노무현, 나의 친구
당당하게 살기를 원하는 한 피할 수 없는 싸움이고,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싸움이라고 믿었기에 끝까지 포기하거나 굴복하지 않았던 노무현. 언론계에 발을 들인 뒤 평생토록 수구언론과 싸워온 정연주. 두 사람 모두 지금 같은 언론구조와 토양이 바뀌지 않는 한 이 땅에서 사람다운 삶을 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정연주가 다시 ‘기록’과 ‘증언’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역사가 역류하는 시대, 언론의 자유가 다시 심각하게 위협받은 시대에 언론과 역사에 대한 인식은 더욱 절실하기 때문이다. 정연주는 우리 언론과 역사의 살아 있는 이야기를, 특히 젊은 세대에게 전하고 싶어했다.
그는 KBS 사장을 그만두고 2008년 10월 처음으로 봉하를 찾았을 때 대통령과 나눈 얘기를 소개했다. 그때도 대통령은 시민의식을 바꾸는 시민언론운동을 같이하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제가 KBS 사장할 때 어느 언론사에서 인터뷰를 나왔습니다. 기자가 오기 전에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지난 1년 동안 조·중·동에서 가장 심하게 비판과 욕설을 한 인물 1등이 노무현 대통령이고, 2등이 KBS 사장 정연주라고 했습니다.”
“아, 그래요?”
“그런데 저는 조·중·동에게 비판과 욕을 얻어먹으면 ‘아,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구나’ 생각이 듭니다. 조·중·동의 생각과 내 생각이 너무 다르고, 그들이 잘못 했다고 비판하는 내용들이 내 눈에는 정말 잘된 것이거든요. 그래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통령은 파안대소했다. 정연주는 대통령의 그 모습과 웃음소리가 아직도 가슴과 귓전에 남아 맴돈다. 그 미안함과 죄스러움, 회한을 눈곱만큼이라도 씻기 위해 노무현재단 이사도 기꺼이 맡았고, 사료편찬특별위원회 위원장 자리도 맡았다고 했다.
어쩌면 대통령이 더 이상 하지 못하는 언론개혁을 멈추지 않기 위해 이 책도 냈을 것이다. “잘 가시라 노무현, 나의 좋은 친구.” 우리들 모두의 가슴을 파고드는 인사다.
‘노무현’과 ‘정연주’. 참여정부를 만든 대통령과 그 대통령이 임명한 KBS 사장. ‘조·중·동’으로 상징되는 언론권력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정면으로 싸운 정치인과 언론인. 언론개혁을 향한 집념과 열정을 한 번도 내려놓지 않은 투사.
두 사람을 관통하는 키워드다. 1946년 개띠 동갑에 경상도 출신이라는 공통점은 ‘보너스’. 그런데 두 사람이 실제 만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정연주가 KBS 사장이 되기까지 노무현을 만난 것은 세 번에 불과하다. 2001년 12월 송건호 선생 영결식, 2002년 말 대통령 당선 직후 여의도 중식당에서의 우연한 만남, 2003년 1월 대통령 당선자의 예고 없는 한겨레 방문.
KBS 사장이 된 뒤에도 정연주는 대통령을 만난 게 그리 많지 않았다. 대부분 의례적인 공식행사였다. 프로그램 출연을 위해 대통령이 KBS에 온 경우나 ‘방송의 날’ 같은 행사장에서 만나는 경우다.
노무현의 ‘약속’
그나마 조금 여유 있게 이야기한 것은 KBS 사장 초기 청와대 오찬 때다. 관례로 이뤄지던 KBS 해외동포상 수상자들의 청와대 방문행사에 대통령 내외와 오찬을 하게 된 것. 오찬이 끝나고 일행이 청와대를 떠날 때, 대통령은 정연주 사장에게 평생 잊지 못할 ‘약속’을 했다.
“정 사장님, 제가 앞으로 대통령 하면서 절대 전화하지 않을 사람이 두 분 있습니다.”
“두 사람이 누군데요?”
“검찰총장과 KBS 사장입니다. 정치적 중립과 독립이 가장 중요한 기관 아닙니까?”
2009년 5월 23일. 대통령이 봉하마을 부엉이 바위에서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그에게 맨 먼저 떠오른 것은 2003년 3월 6일의 ‘약속’이었다. “앞으로 대통령 하면서 절대 전화하지 않을 사람이 두 분 있습니다”라는 그 말.
역설적이게도 대통령은 정치적 중립과 독립을 위해 전화할 수 없다고 한두 집단, 검찰과 언론에 의해 죽음의 길로 갔기 때문이다. 정연주 전 사장은 “나는 그것이 너무나 억울했다”고 당시 비분을 표현했다.
정연주의 ‘증언’
그리고 지금도 그 말이 귓전에 쟁쟁하다. 최근 언론을 주제로 한 강연이나 토론에서 그는 이 말을 빼놓지 않고 증언한다. 대통령은 KBS 사장인 내게 그 약속을 지켰다고. KBS 보도와 프로그램 중 참여정부에 상당한 타격을 준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한 번도 전화하지 않았다고. 전화를 하지 않았다는 ‘행위’뿐만 아니라 그런 종류의 ‘개입’이나 ‘간섭’도 없었다고. 정말 철저하게 약속을 지켰다고.
그래서 그게 참 고마웠다고. 대통령 자리의 무게가 상당한 데, 직접 전화해서 “KBS 요즘 너무 심합니다” 하면 인간인 이상 압박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런 압박감이 언론인 생활을 위축시켰을 것이 분명했다고. 성격에 그런 전화를 받았다면 KBS 사장을 계속 할지 많이 고뇌했을 것이라고.
정연주 전 사장은 노무현의 ‘약속’을 ‘증언’할 때마다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자연인으로서 인연은 길지 않지만, 두 사람에게는 어쩌면 전생부터 ‘동지’였을지도 모르는 강고한 연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연주-노무현의 ‘연결고리’
그 ‘동질’과 ‘연결고리’를 최근 펴낸 <정연주의 기록-동아투위에서 노무현까지>를 통해 진솔하게 털어놨다. 2002년 말에 출간했다가 지금은 절판된 <서울-워싱턴-평양>을 크게 개정, 보완한 책이다.
동아일보에 입사하기 전 학창시절 이야기, ‘바보 노무현’과의 인연, KBS 사장이 되는 과정은 모두 이번에 새로 쓴 것이다. 특히 제7부 ‘바보 노무현과 나’는 정연주와 노무현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정연주가 노무현을 처음 접한 것은 ‘청문회 스타 노무현’. 그러다 1998년 종로 국회의원 시절, 노무현은 당시 정연주 한겨레 워싱턴특파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오늘 아침 ‘정연주 칼럼’의 내용이 참 좋은데, 나의 홈페이지에 옮겨서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볼 수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2000년 정연주가 귀국하고 두 달 뒤 노무현은 해양수산부 장관이 되었다. 그때까지도 두 사람은 직접 만날 기회가 없었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열심히 살았다. 노무현은 대권에 도전해 온갖 풍상을 겪으며 정면 돌파하고 있었고, 정연주는 한겨레 논설주간으로서 맡은 일을 열심히 했다.
2001년 말 송건호 선생 장례식장에서 두 사람은 첫 대면을 했다. 대통령은 민주당 상임고문으로 참석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낯설지 않았다. 정연주 전 사장은 마치 오랜만에 고향 친구를 만난 느낌이었다고 했다. 세상을 보는 눈, 특히 언론을 보는 눈이 같다는 동질감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고 회고했다.
두 사람의 ‘연결고리’는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우리나라 ‘조폭언론’의 반언론적 행태에 대해 느끼고 공유하는 강렬한 문제의식이었다. 언론문제에 대한 인식과 열정은 노무현과 정연주를 이어주는 태생적 연결고리였다. 조·중·동의 반언론적 행태와 그에 따른 인격살해의 피해를 직접 당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조폭언론’ 조·중·동의 인격살해
정연주는 1970년 동아일보에 입사했지만, 자유언론을 외치다가 동료 140여 명과 쫓겨났다. 투옥, 수배, 도피생활이 계속 됐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돼 수배를 받던 중 아내가 체포돼 곤욕을 치렀고, 늙은 아버지까지 연행되는 고통을 당하는 등 정권의 만행을 경험했다. 수배로 배웅하지 못한 부모는 미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2000년 10월 11일 그는 한겨레에 쓴 ‘한국 신문의 조폭적 행태’에서 ‘조·중·동’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내며 언론개혁 논쟁의 중심에 섰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KBS 사장으로 임명되면서, 그는 자신이 ‘몹쓸 언론’으로 지목했던 ‘조·중·동’과 수구세력, 이명박 정권의 대표적 표적이 되었다. KBS 사장 강제해직, 표적수사, 마녀사냥식 여론몰이로 인격살해를 또다시 당해야 했다.
정치인 노무현은 삶이 곧 투쟁이었다. 1991년 <주간조선>의 ‘호화요트’ 왜곡보도로 시작해 정치를 하는 동안 내내 언론과 불편한 관계였다. 수구언론의 공격은 끝내 그의 죽음까지 모질게 따라다녔다.
그러나 그는 언론과의 싸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부당한 언론의 횡포에 비굴하게 원칙 없이 침묵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겠다”는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 발언은 노무현의 정치인생에서 중요한 축이었다. 조폭언론과 맞선 투쟁의 기록이라고 할 정도로 집요한 공격을 당한 참여정부 5년 동안에도 언론개혁의 의지와 열정은 변함이 없었다.
잘 가시라 노무현, 나의 친구
당당하게 살기를 원하는 한 피할 수 없는 싸움이고,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싸움이라고 믿었기에 끝까지 포기하거나 굴복하지 않았던 노무현. 언론계에 발을 들인 뒤 평생토록 수구언론과 싸워온 정연주. 두 사람 모두 지금 같은 언론구조와 토양이 바뀌지 않는 한 이 땅에서 사람다운 삶을 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정연주가 다시 ‘기록’과 ‘증언’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역사가 역류하는 시대, 언론의 자유가 다시 심각하게 위협받은 시대에 언론과 역사에 대한 인식은 더욱 절실하기 때문이다. 정연주는 우리 언론과 역사의 살아 있는 이야기를, 특히 젊은 세대에게 전하고 싶어했다.
그는 KBS 사장을 그만두고 2008년 10월 처음으로 봉하를 찾았을 때 대통령과 나눈 얘기를 소개했다. 그때도 대통령은 시민의식을 바꾸는 시민언론운동을 같이하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제가 KBS 사장할 때 어느 언론사에서 인터뷰를 나왔습니다. 기자가 오기 전에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지난 1년 동안 조·중·동에서 가장 심하게 비판과 욕설을 한 인물 1등이 노무현 대통령이고, 2등이 KBS 사장 정연주라고 했습니다.”
“아, 그래요?”
“그런데 저는 조·중·동에게 비판과 욕을 얻어먹으면 ‘아,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구나’ 생각이 듭니다. 조·중·동의 생각과 내 생각이 너무 다르고, 그들이 잘못 했다고 비판하는 내용들이 내 눈에는 정말 잘된 것이거든요. 그래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통령은 파안대소했다. 정연주는 대통령의 그 모습과 웃음소리가 아직도 가슴과 귓전에 남아 맴돈다. 그 미안함과 죄스러움, 회한을 눈곱만큼이라도 씻기 위해 노무현재단 이사도 기꺼이 맡았고, 사료편찬특별위원회 위원장 자리도 맡았다고 했다.
어쩌면 대통령이 더 이상 하지 못하는 언론개혁을 멈추지 않기 위해 이 책도 냈을 것이다. “잘 가시라 노무현, 나의 좋은 친구.” 우리들 모두의 가슴을 파고드는 인사다.
2011년 08월 12일
노무현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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