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 아바타와 함께 여름휴가를 - 제4막재진과 윤옥은 서로 뭐라 불렀을까?
(서프라이즈 / 폴라리스 / 2011-08-10)
권재진은 “평생 김 여사님을 ‘누님’이라 불러본 적이 없으며 영부인도 제 이름을 부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단다. 이 뉴스를 접하고 필자는 권재진의 예상외의 답변에 놀랐다. 권재진이 그동안 이에 관한 언론 보도들을 부인하지 않았고 해명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것만은 사실로 인정할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이전 글(3막)에서 시시콜콜 언급하지 않았는데, 마저 제시할 필요를 느낀다. 이전 글에 대해 책임지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 점에서 이글은 3.5막에 해당한다. 이글은 반드시 3막의 글과 함께 읽어야 한다.
권 후보자는 큰아들을 근무조건이 열악하고 왕복 4-5시간이 걸리는 시골에 위치한 친구 회사에서 근무하게 한 것에 대해 “아이가 (서울) 강남에서 성장해서 서민들의 애환을 이해하고 사회에 대해 폭넓은 시야를 갖도록 그렇게 시켰다. 실제로 성실하게 근무했다”고 답했다. 그리고 “본인도 당시는 힘들어했지만 그때 경험이 인생에서 큰 경험이 됐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해명을 보며 이 글을 쓰기로 생각을 더욱 굳혔다.
청문회 감상평
글쓰기를 위해 먼저 국회에 올라와 있는 청문회 동영상자료를 스킵하며 살펴보았다. 박영선만이 고군분투했지만 전체적으로 아쉬웠다. 지난번 글에도 언급했지만 권재진의 경우 결정적 한 방은 아들의 병역문제에서 터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대중적 감성을 자극할 수 있는 타깃은 ‘마누라인사’였다. 그러나 두 가지 다 공략에 실패하고 말았다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선택과 집중에 실패했다.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리는 현명함도 필요한데….
말한 김에 한상대 청문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아쉬움을 덧붙인다. 필자는 2막의 글에서 정동기(장인)-이상득-하나회라는 약한 고리를 강조했었다. 최근 안현태(전두환 마지막 경호실장, 육사 17기, 하나회원)가 국립묘지에 묻힌 것이 국민적 반감을 사고 있지 않은가. 이 문제를 집중 추구했어야 했는데. 역시 무척 아쉬웠다.
1막 글의 마지막에서 구태여 강조했듯이 ‘누님인사’가 아니라 ‘마누라인사’이다. ‘마누라인사’가 논리적으로는 물론이고 대중적으로도 어필할 수 있는 용어이다. 그런데 ‘누님인사’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명분도 실리도 잃고 말았다.
평생 김윤옥을 ‘누님’이라 부른 적이 없으니 ‘누님인사’가 아니며, 여기서 나아가 영부인과 친한 것도 사실이 아니며 또 그 덕분에 자신이 법무장관에 임명된 것도 아니며, 따라서 영부인(마누라)인사도 아니라는 대중적 인식을 심어주는데 권재진은 성공했다. 언론 기사를 살펴보니 모두 그런 뉘앙스를 풍긴다. 역시 권재진과 검찰의 잔머리만은 인정한다.
필자가 청문회에 임했다면 추가 질문했을 것이다. 영부인과 어린 시절에 옆집에 살았던 적이 있는가? 김윤옥과 동년배의 누나가 있는가? 어린 시절에 서로 ‘누나’ ‘재진’으로 부르지 않고 뭐라고 불렀는가? 어린 시절 이후 그리고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에 김윤옥과 이명박을 언제 어떻게 만났는가? 등등 김윤옥과의 관계를 추궁했을 것이다. 그러나 청문회에서 그 누구도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권재진의 모범답안은 이미 예상되는 것이고, 이를 돌파할 수 있는 후속 질문들이 마련되어 있었어야 하지 않을까? 권재진이 김윤옥을 ‘누님’이라 불렀는지 여부는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누님’이라고 불러야만 각별한 관계는 아니니까. 문제의 핵심은 권재진과 김윤옥이 어떤 각별한 인연이 있고 얼마나 친밀한 관계인가였다.
언론의 부끄러운 자화상
‘누님’ ‘(권)재진’이라는 상호 호칭은 평생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녹음 기록 등 증거물이 없으니 그렇게 우겨도 반박할 근거가 없다(이명박은 음성은 물론 동영상 기록까지 폭로되어도 버텼는데). ‘누님’이라고 부른 적은 없을지도 모르지만 ‘누나’ 혹은 ‘누부야’라고 그리고 김윤옥은 ‘재진아’라고 불렀을 것으로 추정했다. 권재진과 김윤옥은 어릴 적 일이라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2009년 7월에 천성관이 총장으로 내정되었을 적에 그리고 곧 이어지는 8월에 권재진이 민정수석이 되었을 적에 언론보도를 통해 권재진과 김윤옥의 친밀한 관계가 일부 신문에 처음 보도되었다. 최근에는 거의 모든 언론은 ‘누님’ ‘동생’ 관계를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대통령 부인 김윤옥 여사와는 어린 시절부터 각별한 인연이 있다. 측근들에 따르면, 김 여사 부친과 권 내정자 부친은 같은 공기업에 다녔고 그 때문에 대구에서 같은 사택(舍宅) 단지에 살았다. 김 여사가 권 내정자의 대구 수창초등학교 7년 선배다. 권 내정자는 김 여사를 큰누나처럼 따르며 10여 년을 이웃사촌으로 지냈다고 한다. 김 여사는 이후 ‘권 검사’에 대해 “똑똑하고 예의 바른 훌륭한 사람”이라고 주변에 칭찬을 자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조선일보, 7.16)
그런데 위의 권재진의 발언은 이러한 언론 보도들이 오보라고 말한 셈이다. 이에 대해 어느 언론도 자신의 보도에 대해 오보라고 솔직하게 인정하지도 않았고 또 오보가 아님을 강변하지도 않았다. 다만, 권재진의 발언을 지상중계할 뿐이었다. 적어도 오보인 부분과 아닌 부분을 가려내려는 시도라도 했어야 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언론 현실이다. 그래서 필자라도 이에 대해 책임을 다할 필요성을 느꼈다.
‘누님’ ‘재진’이라고 부른 적이 평생 단 한 번도 없다고…
아마도 권재진이 민정수석 시절에 시사저널의 다음과 같은 기사가 둘의 관계에 대한 가장 상세한 첫 보도일 것이다.
권 수석이 ‘실세’ 민정수석으로 불리는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대통령 부인 김윤옥 여사와의 ‘특별한 인연’ 때문이다. 김 여사와 권 수석의 첫 인연은 지금으로부터 5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두 사람의 부친은 전매청 대구지청에서 함께 근무하면서 대구 태평로에 있던 관사에 살았다. 권 수석은 1953년에 그 관사에서 태어났고, 김 여사는 일곱(여섯?) 살 많은 ‘동네 누나’였다. 그곳에서 12년 정도 이웃으로 함께 살다가 1965년쯤 김 여사 가족이 서울로 이사 가면서 인연이 끊겼다고 한다. - (2009년 10월 14일)
권재진은 이 기사에서도 ‘영부인과 한동네에 살았다는 기억은 있지만, (영부인과는) 친구가 아니어서 별로 추억이 없다’고 해명했다. 이번 청문회에서의 발언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여겨진다. 어린 시절에 10여 년을 같은 관사에서 지냈는데 비록 나이 차이가 난다 하더라도 둘 사이에 별 추억이 없다는 말을 그대로 믿으라고? 더구나 권재진의 누나가 김윤옥과 동기이고 친구인데.
金時龜(김윤옥 父) 전매청 경력
權輔燮(권재진 父) 전매청 경력
출전)관보에 공무원 인사 이동 정보가 실린다. 이것은 이용하기 불편하므로 이를 재정리한 안용식의 성과를 활용했다. 1962년 이후부터의 사항은 신문에 실린 인사이동란을 참조하여 정리한 것으로 네이버 아카이브를 활용했다. 괄호 속의 일자는 보도된 신문 일자이다. 공식 인사 일자는 신문 일자보다 며칠 전후인데 대체로 신문 일자보다 며칠 앞선다. |
권재진의 아버지 권보섭의 경우, 1952년 현재 대구지방전매청 총무국(주사)로서 근무한 이래 김천전매지청(55-56년)에 잠시 근무한 것을 제외하면 50년대에 대구전매청에서 근무했다. 따라서 권재진 가족은 52년경부터 대구전매청 관사에 거주했을 가능성이 크다. 바로 그 관사에서 권재진은 1953년에 태어났다.
따라서 김윤옥 권재진 家는 1952년경부터 대구전매청 관사에서 같이 살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당시 대구전매청 관사 소재지는 ‘대구시 태평로 3가 200’이다. 김시구의 주소(대한연감 1955년판)와 권보섭의 주소(1959년도 한국명사대감 제2집)가 동일하게 그곳이기 때문이다.
다음지도를 통해 보면, 철도 바로 아래쪽 편에 위치해 있다(화살 표시된 곳). 큰 창고들이 전매청 창고이다. KT&G 표시가 곳곳에 보이고 수창초등학교도 아래쪽에 보인다.
김시구는 1964년 전매청 총무과장으로 서울로 이전한 후 주로 서울에서 근무했다. 60년대 중반경 서울로 이사한 것 같다. 김윤옥이 대구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를 입학한 것도 이쯤이다. 김시구의 1967년 당시 주소는 ‘서울시 동대문구 용두동 105-34’였다(대한민국인물연감). 1962년에 부산전매지청장으로 발령받자마자 대구전매청 관사를 떠났다고 하더라도, 김윤옥 가족은 10여 년 이상을 관사에서 살았다. 시사저널의 ‘12년 이웃’이란 표현이 사실에 가까운 것 같다.
참으로 번거롭고 힘든 과정을 거쳐 권재진 김윤옥 가족은 10년 이상 이웃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양자의 주민등록과 호적, 생활기록부만 확인하면 될 것을 이렇게 뺑뺑이 돌았다.
김윤옥과 권재진 누이는 동기이자 친구 사이
이제는 ‘권 내정자의 친 누님과 김 여사는 동기간 친구 사이로 지금까지 알고 지내는 사이’라는 백영준 기자의 중대한 제보에 대해 추구해 보겠다. 경북일보의 백영준 정치부장은 고향 사람인 권재진 내정을 옹호하는(그 논리의 용감무식함에 대해서는 첨언하지 않겠다) 글을 쓰면서 오히려 필자에게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준 셈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마누라인사’라는 필자의 주장은 보다 설득력을 가질 것이다. 한편 ‘누님’ ‘재진(동생)’ 호칭이 평생 한 번도 없었다는 권재진의 주장은 그 신뢰도에 손상을 입을 것이다.
주민등록과 호적을 살피면 좋겠지만 접근이 불가능하니, 안동권씨 족보라도 찾아보기로 했다. 그림에서 보듯이 권재진을 비롯한 세 아들과 두 딸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안동권씨 종보인 능동춘추에는 3남 3녀라고 했는데?). 그러나 안동권씨 족보에는 딸 대신 사위가 등재되어 있다. 그래서 권재진 누나의 이름과 생년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권보섭의 나이(19년생)를 고려하면 2명의 딸은 권재진보다 누이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김윤옥과 동기간 친구이며 지금까지 알고 지내는 사이라고 하는 이는 큰누이일 것으로 추정한다. 물론 이것은 합리적 추정에 불과하다.
권재진의 누나와 김윤옥이 같은 중고등학교에 다녔는지, 과연 친했는지 지금도 연락하고 친한지는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둘이 동년배이고 같은 관사에 살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면, 김윤옥과 친구의 동생 권재진은 자주 만났을 것이고 서로 호칭했을 것이다. 서로 원수지간이어서 외면하거나 소 닭 보듯 지내지 않았다면 말이다. ‘누나’ ‘재진’ 외에 무슨 호칭이 있을까? ‘누나’ 혹은 ‘누부야’라고 불렀을 뿐 ‘누님’이라고 부르지 않았으니 틀린 말은 아니라고 강변할 것인가? 근자에 ‘누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과정에서의 의도하지 않은 실언이었다고 변명할 것인가? 길게 설명하는 것이 오히려 구차하게 느껴진다.
거듭 강조하건대 ‘누님’ ‘재진’이라는 호칭의 여부는 권재진-김윤옥의 친밀한 관계와는 별개이다. 핵심은 양자가 친밀한 관계인가의 여부이다. 그런데 권재진은 그 친밀한 관계마저 부정하려 애쓴다. 더 나아가 어린 시절의 친밀한 관계마저 부정했다. 그래서 ‘누님’ ‘재진’이라는 호칭이 평생에 단 한 번도 없었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했던 것이다. ‘어려서의 일이라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했다면 필자가 이 글을 구태여 쓰지 않았을 것이다.
최고 명문으로 부상한 동지상고와 수창초등학교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첨언하겠다. 필자가 ‘마누라인사’를 강변하는 상황 증거이기도 하다. 이명박 정권 들어 갑자기 유명해진 세 학교가 있다. 이명박 이상득 형제가 졸업한 동지상고, 김윤옥이 졸업한 수창초등학교, 장다사로가 졸업한 경동고등학교이다.
박상원이 이명박 김윤옥과 자리를 같이하는 경우를 자주 목격하게 된다. 자선행사에 이들의 동행을 자주 살필 수 있다. 언젠가 대통령과의 대화에 박상원이 출연하여 엉뚱한 소리 하며 버벅대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리고 사진에서 보듯이, 최근에는 에티오피아에서 같이 삽질했다. 막연히 ‘똥물’이 튀었을 것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이번에 조사를 하면서 박상원이 김윤옥의 수창초등학교 후배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역시나’ 하는 생각을 했다.
김윤옥 권재진 박상원은 수창초등학교 각각 45회 52회 58회다. 김윤옥 여사마저 ‘수창초교 출신 중 자랑할 만한 인물은 박상원’이라고 소개했다며 박상원은 제 자랑했다. 김윤옥은 후배 권재진에 대해서도 그렇게 자랑스러워했을 것이다. 이명박 인사에서 똥물이라도 튀어야 한다는 말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폴라리스
사족)
이상이 지난번 글에 구태여 적지 않았고 또 추가로 급히 확인한 것이다. 나머지는 누군가가 확인해주고 바로잡아 줄 것으로 믿는다. 진정한 청문회라면 아무리 사적인 정보라도 공개되는 것이 옳다. 권재진 아들의 병역문제를 살피기 위해 그 아들 통장계좌조차 들여다볼 수 없는 그딴 청문회를 왜 하는지?
권재진은 법무부장관에 조만간 임명될 것이다. 내 글이 그 대세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임도 잘 안다. 하지만, 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두려움과 망설임도 있었다. 어떤 형태로든지 치사한 보복을 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를 이명박 정권 들어 익히 보지 않았던가? 대가도 성과도 없는데 힘들고 두려운 일을 왜 자청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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