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유학이민박람회 젊은이들 북적
"취업·주거난 등 팍팍한 현실에
4050 돼도 불안한 삶 못 벗어나,
외국 가서 겪어야 할 차별보다
한국사회 차별·멸시가 더 무서워"
지난달 서울 소재 상위권 대학을 졸업한 김모(25ㆍ여)씨는 캐나다에 있는 한 2년제 대학에 다시 입학하기로 했다. 외국인의 진입장벽이 상대적으로 낮은 2년제 대학을 디딤돌 삼아 졸업 후 취업 비자를 받기 위해서다. 그는 영주권까지 취득하면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현지에서 직장을 구해 아예 눌러 앉을 생각이다. 한국에 돌아올 생각은 전혀 없다. 김씨는 9일 “자리를 잡기까지 시간이 다소 걸리겠지만 한국에 있으면 나를 위한 삶을 살 수 없을 것 같아 유학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헬조선(Hellㆍ지옥과 조선의 합성어)을 살아가는 N포세대(연애ㆍ결혼ㆍ출산ㆍ취업ㆍ내집 마련ㆍ꿈 등 모든 것을 무한대로 포기한 세대)라는 섬뜩한 수식어가 따라 붙는 2030세대. 벼랑 끝에 몰린 이들이 결국 마지막 비상구로 이민을 선택하고 있다. 취업난, 주거난 등 팍팍한 현실에 더 이상 희망은 없으며, 미래에 마주하게 될 삶의 질까지 고려하면 해답은 ‘탈(脫) 한국’뿐이라고 이들은 말한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에서 2년 넘게 직장생활을 한 최모(30)씨는 올해 초 사직서를 던진 뒤 지난 4월 미련 없이 프랑스로 떠났다. 최씨는 현재 프랑스의 한 직업학교에서 치즈 가공법을 배우면서 자신만의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그의 눈에 대기업은 “40, 50대가 되면 실적 압박에 시달리고 사내정치에서 살아 남아야 하는 무한경쟁의 전장터”일 뿐이었다. 그래서 한국을 떠나겠다는 결정도 즉흥적으로 나온 게 아니었다. 최씨는 “입사할 때부터 목표한 돈을 모으면 프랑스로 떠나기로 마음먹었다”고 털어놨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이모(26)씨는 생활비나 교육비가 한국보다 적게 드는 러시아 이민을 염두에 두고 있다. 현재 취업문을 두드리는 것도 오로지 유학 자금을 마련할 목적에서다. 대학입시나 취업 같은 험난한 관문을 통과하더라도 직장과 일상에서의 경쟁과 차별이 지속될 것이란 게 이씨의 판단이다. 그래서 중견기업의 최종 면접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그는 이민을 준비하고 있다. “직장생활을 하는 친구들만 봐도 지금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는 이씨는 “직장에 청춘을 다 바쳐도 집 한 채 마련하지 못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라고 진단했다.
한국을 떠나는 젊은이들 앞에 마냥 장밋빛 미래가 놓여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민에는 언어의 장벽이나 낯선 이방인 대접 등의 문제가 내재해 있다. 해외의 선진국도 한국 못지않은 취업난이 계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절대 한국으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2030세대의 ‘탈 한국’ 정서가 한때의 유행으로 그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 최근 서울 강남 코엑스에서 열린 해외유학이민 박람회장에 마련된 한국유학협회 부스는 이틀 동안 900여명이 방문했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한국유학협회 김기중 사무국장은 “과거에는 유학을 갔다가 돌아와 한국에서 좋은 직장을 갖기를 희망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제는 정반대가 됐다”며 “젊은이들이 취업난을 넘어 한국 사회에 대한 불신, 그리고 ‘불안한 미래’에 대한 일종의 강박 관념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박람회장에서 만난 취업준비생 김모(25ㆍ여)씨도 그 중 한 명이다. “해외 본사로 이직하겠다는 생각으로 지난 1년간 국내에 있는 외국계 기업 30여 곳에 입사원서를 썼다”는 그는 지금도 한국 회사에는 지원할 뜻이 없다. 김씨는 “외국에 나가서 겪을 외국인에 대한 차별보다 우리 사회에서 목격한 약자에 대한 차별과 멸시가 더 무섭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경제구조와 노동정책의 총체적 개선 없이는 좌절한 청춘들의 마음을 되돌리기 어렵다고 경고한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염세적이기까지 한 청년들의 깊은 낙담에는 청년실업 등의 문제 해결에 나서지 않은 기성세대의 책임 방기가 자리잡고 있다”며 “나라를 떠나는 이들을 붙잡을 수는 없지만 젊은 세대가 대한민국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려는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도록 사회 전체의 노력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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