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에만 온갖 주문이 몰리는 이유
"너는 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몰라(you don’t know how people live)."
미국 드라마 <보드워크 엠파이어>에서 주인공 너키(스티브 부세미)가 동생에게 하는 말입니다. 마틴 스코세지가 시리즈 초반을 연출한 이 드라마는 1920년대 미국 금주령 시대에 누가 어떻게 한 도시를 장악해 가는가 하는 이야기를 그린 누아르입니다. 정치와 조폭의 결탁에는 어떤 주저함도 없습니다. 비열한 시대, 나쁜 놈들 전성시대를 리얼하게 그리고 있는 작품입니다. 너키의 대사는 한국의 리버럴 진영이 패배를 반복하며 고전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야당은 '시대의 결(grain of history)'에 올라타고 있지 못합니다. 1987년 민주화체제가 만들어 낸 민주주의 정치질서 이후 리버럴 진영은 퇴행적 징후를 보이면서 박근혜 대통령으로 상징되는 반동적 보수주의에 이렇다 할 만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저성장 시대의 소득양극화에 따른 대중의 절망을 교묘하게 이용해 반민주, 반평화적 역주행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야당을 배제함은 물론이고 여당마저 편가르기하며 분열주의적 정치공학으로 민주주의 자체를 후퇴시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당이 이를 극복할 대안세력이라는 인식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리버럴 진영이 "새로운 시대에 부응할 새로운 가치를 찾아내는데 실패했고 이는 문화적 훈계주의, 과거주의적 경향을 보이며 오히려 태도로서의 보수 이미지를 강화"(국회 대토론회, 안병진-유승찬 발제)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야당은 세상을 보다 인간다운 곳으로 바꾸고자 하는 강한 열정도 보이지 않고, 유연혁신과 영구혁신으로 대표되는 실사구시 정신도 결여되어 있으며 이에 따라 새로운 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문화 속에서 여전히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다른 표현으로 야당의 문화는 이사야 벌린이 톨스토이 작품을 분석하며 내놓은 여우와 고슴도치 유형 가운데 고슴도치에 가깝습니다. "고슴도치 유형은 융합적 사고의 결여, 프래그머티즘 거부, 이분법적 단순함, 절대적 진리론의 오만, 경험이나 관찰보다는 거대 이론을 중시하는 경향"(네이트 실버 <신호와 소음>)을 갖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왜 야당에게만 가혹한 메스를 들이대냐고 항변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유는 매우 단순합니다.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에 맞서야 할 주체가 바로 야당이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강력할수록 더욱 강력하게 저들을 넘어서야 하는 것이 바로 야당의 숙명이기 때문입니다.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의 퇴행적, 이념적 보수주의는 재론의 여지 없이 아주 나쁜 것입니다. 한국의 보수는 1%의 이익을 대변하면서 99%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처럼 거짓말을 하는 숙명을 갖고 있습니다. 보수가 선거에서 거짓말을 일삼는 이유는 소수를 옹호하면서 다수를 위하는 것처럼 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도 없는 경제민주화를 한다고 하거나 근거없는 논리로 상대 후보를 비난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가령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를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이는 극우인사의 발언부터, 국가기관이 6번이나 검증하고 확인한 박원순 시장 아들 박주신 씨의 병역의혹을 다시 제기하는 것, 나아가 재벌 대기업을 위한 노동개혁을 하면서 이것이 마치 청년 일자리를 위한 것처럼 위장하는 수법 등이 모두 보수정치의 숙명과 연관돼 있습니다.
진보는 이 모든 거짓을 넘어 우리가 살아가는 진짜 구조를 밝히고 세상을 사회적 약자와 다수 국민의 이익이 보장되는 곳으로 바꾸어야 할 숙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보수의 저항은 정말로 완강하고 이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새로운 가치에 대한 목숨을 건 열정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선거를 앞두고 야당에게 주문이 많아지는 이유입니다.
혁신위 일단락, 이제는 이기는 것이 진짜 혁신이다
새정치민주연합 혁신위 활동이 사실상 일단락됐습니다. 김상곤 혁신위는 공천제도 혁신 등 많은 혁신안을 발표했습니다. 주로 제도 개선에 관한 것들입니다. 당장 총선 공천 문제가 걸려 있으니 저항도 거셌습니다. 혁신위에 대한 이러저러한 평가가 가능하겠지만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야당의 본질적인 문제를 건드리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안철수 의원 등이 문제제기한 "국민이 공감하지 않았으면 실패"라고 한 비판은 겸허히 수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혁신위 활동으로 인해 국민들이 야당을 바라보는 태도가 바뀌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물론 혁신위 활동이 전혀 의미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비판입니다. 공고한 기득권체제 안에서 정치적 경험이 거의 없는 혁신위원들이 아마추어적이긴 하지만 상당히 아픈 지적을 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혁신위 성과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문재인 대표의 리더십이 일정하게 회복된 것입니다. 물론 아직 매우 불완전한 상태이지만 문재인 대표가 혁신 안을 지렛대로 재신임 정국을 돌파하는 과정은 새정치민주연합의 현실을 냉정하게 성찰하게 만들었습니다. 김부겸 전 의원은 "문재인만으로도 선거를 이길 수 없고, 문재인 없이도 선거를 이길 수 없다"며 그 현실을 요약했습니다. 혁신안 재가를 위한 중앙위원회에서 "대표가 앉아 있는데 어떻게 기명으로 투표할 수 있느냐"는 항변은 그 자체로 비주류의 허약함을 드러냈습니다. 언론에서는 자유롭게 비판하면서 보는 데서는 투표할 수 없다는 논리는 참 궁색합니다. 어쨌든 비주류는 당권을 대체할 만한 응집력을 보여주지 못했고 이는 상대적으로 문재인 대표의 리더십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됐습니다.
물론 수두룩한 난관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정당 지지율의 격차는 변화를 바라는 많은 국민들을 낙담시키고 있습니다. 여야의 기득권 전쟁으로 선거구획정조차 법이 정한 시기를 넘길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여야 대표가 합의한 안심번호 국민공천제마저 청와대의 반발과 여당 내 갈등으로 물건너가는 느낌입니다. 특히 새누리당 친박과 비박의 '공천 전쟁'은 어디가 끝인지 모를 정도로 첨예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 발 물러서기는 했지만 실제로 물러섰다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김무성 대표는 결정 장애로 보일 정도로 허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총선 전에 지각변동이 일어나지 말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박 대통령은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을 20대 총선에 등판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이미지 선거의 여왕다운 행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불확실성이 극대화된 가운데 새정치민주연합을 비롯한 야권이 해야 할 일은 상황변화와 상관없이 이기는 길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고슴도치처럼 경직되게 움직여서는 결코 이길 수 없는 지형입니다. 혁신의 잔치는 끝났습니다. 승리의 전투가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라도 더 이기기 위한 유연하면서도 치밀하고 냉정하면서도 열정적인 전략을 수립해야 합니다. 이제 이기는 것이 진짜 혁신이 됐기 때문입니다.
"너는 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몰라(you don’t know how people live)."
미국 드라마 <보드워크 엠파이어>에서 주인공 너키(스티브 부세미)가 동생에게 하는 말입니다. 마틴 스코세지가 시리즈 초반을 연출한 이 드라마는 1920년대 미국 금주령 시대에 누가 어떻게 한 도시를 장악해 가는가 하는 이야기를 그린 누아르입니다. 정치와 조폭의 결탁에는 어떤 주저함도 없습니다. 비열한 시대, 나쁜 놈들 전성시대를 리얼하게 그리고 있는 작품입니다. 너키의 대사는 한국의 리버럴 진영이 패배를 반복하며 고전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야당은 '시대의 결(grain of history)'에 올라타고 있지 못합니다. 1987년 민주화체제가 만들어 낸 민주주의 정치질서 이후 리버럴 진영은 퇴행적 징후를 보이면서 박근혜 대통령으로 상징되는 반동적 보수주의에 이렇다 할 만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저성장 시대의 소득양극화에 따른 대중의 절망을 교묘하게 이용해 반민주, 반평화적 역주행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야당을 배제함은 물론이고 여당마저 편가르기하며 분열주의적 정치공학으로 민주주의 자체를 후퇴시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당이 이를 극복할 대안세력이라는 인식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리버럴 진영이 "새로운 시대에 부응할 새로운 가치를 찾아내는데 실패했고 이는 문화적 훈계주의, 과거주의적 경향을 보이며 오히려 태도로서의 보수 이미지를 강화"(국회 대토론회, 안병진-유승찬 발제)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야당은 세상을 보다 인간다운 곳으로 바꾸고자 하는 강한 열정도 보이지 않고, 유연혁신과 영구혁신으로 대표되는 실사구시 정신도 결여되어 있으며 이에 따라 새로운 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문화 속에서 여전히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다른 표현으로 야당의 문화는 이사야 벌린이 톨스토이 작품을 분석하며 내놓은 여우와 고슴도치 유형 가운데 고슴도치에 가깝습니다. "고슴도치 유형은 융합적 사고의 결여, 프래그머티즘 거부, 이분법적 단순함, 절대적 진리론의 오만, 경험이나 관찰보다는 거대 이론을 중시하는 경향"(네이트 실버 <신호와 소음>)을 갖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왜 야당에게만 가혹한 메스를 들이대냐고 항변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유는 매우 단순합니다.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에 맞서야 할 주체가 바로 야당이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강력할수록 더욱 강력하게 저들을 넘어서야 하는 것이 바로 야당의 숙명이기 때문입니다.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의 퇴행적, 이념적 보수주의는 재론의 여지 없이 아주 나쁜 것입니다. 한국의 보수는 1%의 이익을 대변하면서 99%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처럼 거짓말을 하는 숙명을 갖고 있습니다. 보수가 선거에서 거짓말을 일삼는 이유는 소수를 옹호하면서 다수를 위하는 것처럼 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도 없는 경제민주화를 한다고 하거나 근거없는 논리로 상대 후보를 비난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가령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를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이는 극우인사의 발언부터, 국가기관이 6번이나 검증하고 확인한 박원순 시장 아들 박주신 씨의 병역의혹을 다시 제기하는 것, 나아가 재벌 대기업을 위한 노동개혁을 하면서 이것이 마치 청년 일자리를 위한 것처럼 위장하는 수법 등이 모두 보수정치의 숙명과 연관돼 있습니다.
진보는 이 모든 거짓을 넘어 우리가 살아가는 진짜 구조를 밝히고 세상을 사회적 약자와 다수 국민의 이익이 보장되는 곳으로 바꾸어야 할 숙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보수의 저항은 정말로 완강하고 이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새로운 가치에 대한 목숨을 건 열정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선거를 앞두고 야당에게 주문이 많아지는 이유입니다.
혁신위 일단락, 이제는 이기는 것이 진짜 혁신이다
새정치민주연합 혁신위 활동이 사실상 일단락됐습니다. 김상곤 혁신위는 공천제도 혁신 등 많은 혁신안을 발표했습니다. 주로 제도 개선에 관한 것들입니다. 당장 총선 공천 문제가 걸려 있으니 저항도 거셌습니다. 혁신위에 대한 이러저러한 평가가 가능하겠지만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야당의 본질적인 문제를 건드리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안철수 의원 등이 문제제기한 "국민이 공감하지 않았으면 실패"라고 한 비판은 겸허히 수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혁신위 활동으로 인해 국민들이 야당을 바라보는 태도가 바뀌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물론 혁신위 활동이 전혀 의미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비판입니다. 공고한 기득권체제 안에서 정치적 경험이 거의 없는 혁신위원들이 아마추어적이긴 하지만 상당히 아픈 지적을 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혁신위 성과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문재인 대표의 리더십이 일정하게 회복된 것입니다. 물론 아직 매우 불완전한 상태이지만 문재인 대표가 혁신 안을 지렛대로 재신임 정국을 돌파하는 과정은 새정치민주연합의 현실을 냉정하게 성찰하게 만들었습니다. 김부겸 전 의원은 "문재인만으로도 선거를 이길 수 없고, 문재인 없이도 선거를 이길 수 없다"며 그 현실을 요약했습니다. 혁신안 재가를 위한 중앙위원회에서 "대표가 앉아 있는데 어떻게 기명으로 투표할 수 있느냐"는 항변은 그 자체로 비주류의 허약함을 드러냈습니다. 언론에서는 자유롭게 비판하면서 보는 데서는 투표할 수 없다는 논리는 참 궁색합니다. 어쨌든 비주류는 당권을 대체할 만한 응집력을 보여주지 못했고 이는 상대적으로 문재인 대표의 리더십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됐습니다.
물론 수두룩한 난관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정당 지지율의 격차는 변화를 바라는 많은 국민들을 낙담시키고 있습니다. 여야의 기득권 전쟁으로 선거구획정조차 법이 정한 시기를 넘길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여야 대표가 합의한 안심번호 국민공천제마저 청와대의 반발과 여당 내 갈등으로 물건너가는 느낌입니다. 특히 새누리당 친박과 비박의 '공천 전쟁'은 어디가 끝인지 모를 정도로 첨예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 발 물러서기는 했지만 실제로 물러섰다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김무성 대표는 결정 장애로 보일 정도로 허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총선 전에 지각변동이 일어나지 말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박 대통령은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을 20대 총선에 등판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이미지 선거의 여왕다운 행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불확실성이 극대화된 가운데 새정치민주연합을 비롯한 야권이 해야 할 일은 상황변화와 상관없이 이기는 길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고슴도치처럼 경직되게 움직여서는 결코 이길 수 없는 지형입니다. 혁신의 잔치는 끝났습니다. 승리의 전투가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라도 더 이기기 위한 유연하면서도 치밀하고 냉정하면서도 열정적인 전략을 수립해야 합니다. 이제 이기는 것이 진짜 혁신이 됐기 때문입니다.
몇 가지 제안들
먼저 문재인 대표를 중심으로 단결해야 합니다. 최근 통합행동 일각에서 통합전대론이 나오긴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현실성에 의문을 던졌습니다. 지금까지는 싸웠지만 이번 총선은 문 대표를 중심으로 덧셈의 정치를 해야 그나마 승산이 있을 것입니다. 문재인 대표를 중심으로 안철수, 김한길 전 대표나 정세균 전 대표 등 모든 세력이 힘을 합해야 합니다. 한 표라도 더 모을 수 있는 길을 찾아내야 합니다.
둘째, 혁신위가 제안한 선출직평가위원회도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합니다. 평가위원회는 현역의원 20% 물갈이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2012년 한나라당의 박근혜 비대위는 25%를 결정하고 밀어붙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박 위원장의 리더십과 문 대표의 리더십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당시에 박 위원장은 유력한 대권후보였고 강한 장악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갈등을 제압할 수 있었죠. 하지만 야당의 상황은 조금 다릅니다. 대통령 선거도 멀리 있고 문 대표의 계파 장악력도 크지 않습니다. 평가위원회의 '칼질'에 따른 분열과 갈등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힘이 있는지 먼저 살펴야 합니다.
세인 클레스터가 만화로 재해석한 마키아벨리 <군주론>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새로운 변화의 물결을 선도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질서 하에서 잘 지냈던 사람들은 모두 개혁가의 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반대파는 공격할 기회만 있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공격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출직평가위원회 활동이 불가피하다면 인재영입위원회를 병행해서 진행할 것을 제안합니다. 평가위원회가 뺄셈의 정치라면 영입위원회는 덧셈의 정치를 뜻합니다. 뺄셈과 덧셈을 통해 분열의 위기를 지혜롭게 넘어설 필요가 있습니다. 나아가 평가위원회의 활동도 혁신의 관점보다는 승리의 관점에서 냉정한 잣대를 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평선에 머무는 듯했던 전선은 순식간에 우리 앞에 다가옵니다.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의 말대로 "강한 것이 옳은 것을 이기"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셈입니다.
셋째, 20~30대의 열정을 불러일으킬 가치를 말해야 합니다. 성장론의 숲에 숨은 중도확장전략은 총선에서 필패 전략입니다. 지금 한국의 청년들은 미래를 붕괴와 동의어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저성장 시대의 좌절과 절망 속에서 디스토피아적 미래인식이 퍼져 있습니다. 자살률 압도적 1위, OECD 국가 중 기업소득 점유율 1위, 상위 10% 소득점유율 2위, 노인빈곤률 1위 등 한국사회의 양극화는 잠재적 분노를 키우고 있습니다. 미국 대선에서의 샌더스 돌풍이나 영국을 충격에 빠뜨리고 있는 노동당의 제러미 코빈을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소득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 야당은 무슨 일을 할 것입니까. 야당과 후보는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왜 출마했는지), 지역구 시민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핵심공약), 소속정당을 위해 어떻게 헌신할 것인지(집권의지)에 대답해야 합니다.
총선에서 중도확장 전략이 위험한 것은 수학도 아닌 산수에 가깝습니다. 정당 지지자들조차 투표장에 다 나오지 않는 것이 현실이니까요. 지금 여야 정당지지율을 합하면 65%가 조금 넘습니다. 그런데 총선 투표율은 50% 중반대에 머무를 가능성이 많습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이 대대적으로 성공한 중도확장 전략은 대선에 임박해서 설득력을 갖습니다. 총선은 누구를 위한 정당이고 누구를 위한 후보인지를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게임입니다. 60대가 야당을 지지하게 만드는 것은 선택사항이지만 20~30대가 투표장에 나와 야당을 지지하게 만들어야 하는 과제는 필수적입니다. 진보는 그들 없이 결코 선거에서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재인 대표를 중심으로 지도체제를 다듬고 문 대표는 통이 큰 포용적 리더십을 보여야 승리의 길을 열 수 있습니다. 문 대표는 생각이나 계파가 다른 야당 정치인을 향해 욕설을 퍼붓는 행위의 중단을 지지자들에게 요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셜 미디어에 난무하는 욕설은 야권을 분열시킬 뿐 아니라 정치 혐오를 유발합니다. 나아가 욕설이 가득한 타임라인엔 분열을 바라는 세력의 습한 곰팡이도 함께 자라납니다.
무엇보다 이번 선거의 가치와 의미를 명확히 해야 합니다. 국민은 야당이 누구의 편인지 간절하게 반복해서 묻고 있습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