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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October 7, 2015

[사설] 열린 사회와 그 적들

박근혜 정권이 한국 민주주의를 수십년 전으로 퇴행시키려 하고 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방침을 공론화하고, 사이버 공간에서 시민의 자유를 옥죄려 한다. 매카시즘을 신봉하는 극우 인사에게 공영방송 감독기구 이사장을 맡겨 논란을 자초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기어코 역사의 시계를 되돌릴 참인가.

■ 민주주의 모독하는 시대부적응자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 이사장의 망언 릴레이가 가관이다. 고 이사장은 그제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의 방송통신위에 대한 종합감사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가리켜 “변형된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했다. 지난 2일 국정감사에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공산주의자” “사법부가 좌경화” “국사학자 90%가 좌편향” 등의 발언을 쏟아낸 데 이은 것이다. 누가 그에게 개인이나 집단의 이념성향을 재단하는 ‘칼’을 쥐여주기라도 했나. 아무런 논리도 근거도 없는 막무가내식 매카시즘에 충격과 개탄을 금할 수 없다.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이 6일 열린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의원 질의를 듣고 있다.|강윤중 기자


고 이사장은 이번 사태 이전에도 ‘문제적 인물’이었다. 박근혜 정권은 과거 권위주의 정권의 공안검사 출신인 그를 끊임없이 ‘활용’해왔다. 고 이사장은 ‘통진당 해산 국민운동본부’ 상임위원장을 맡아 통합진보당 해산 청원서 작성·제출을 주도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는 특별조사위원회 비상임위원(새누리당 추천)으로 활동하며 세월호 유가족을 ‘떼쓰는 사람’에 비유했다. 정권의 신임을 얻은 그는 마침내 공영방송 MBC를 장악하라는 사명까지 부여받기에 이르렀다. 집권세력은 지금 고영주라는 한 시대부적응자를 통해 ‘청부 공안통치’를 시현하고 있다.

‘고영주 사태’는 그러나 정권의 취약성 또한 드러낸다. 모름지기 품격 있는 보수정권이라면 최소한의 상식과 지성을 갖춘 ‘정상적’ 보수 인사를 기용해서 국가를 운영해야 옳다. 고 이사장은 새누리당 의원들조차 날선 비판을 할 만큼 시민적 상식에 위배되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 인사다. 박 대통령이 고 이사장을 이대로 방치한다면, 자신이 ‘비정상적’ 극우 인사에게 통치를 의존해야 하는 궁박한 처지임을 고백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주권자의 48%가 지지한 야당 대선후보를 근거 없이 공산주의자로 매도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고 이사장은 당장 물러나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의 사퇴나 해임은 최소한의 조치에 불과하다고 본다. 고 이사장의 배후에서 그를 조종하고 정치적 이익을 노리는 세력을 가려내 함께 심판해야 한다. 

고 이사장의 잇단 망언은 문 대표나 노 전 대통령이라는 특정인, 새정치민주연합이라는 특정 정당에 대한 모독을 넘어서는 차원의 문제다.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빨갱이’라고 낙인찍는 행태야말로 보수세력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다. 그것은 또한 이념 갈등 조장, 사회 분열, 시민 감시로 열린 사회를 무너뜨리려는 적대 행위이기도 하다. 시민과 야당은 작금의 사태를 직시하고 비상한 결의로 민주주의 후퇴를 막아야 한다. 다시금 이런 언명을 해야 하는 시대가 부끄러울 뿐이다.

■ 교과서를 이념도구로 삼는 정권
청와대가 역사교과서의 국정화 의지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청와대 관계자는 어제 “균형 잡힌 역사교과서를 개발해야 한다는 입장에 변함이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 교육부 업무보고에서 이같이 지시한 것을 소개하면서 “이것이 청와대의 최종적 입장”이라고 말했다. 이는 국정화 추진 방침이 사실상 확정됐다는 얘기다. 청와대 발표는 국정화 방침을 밀어붙여온 사람이 다름 아닌 박 대통령이었음을 시사한다. 국정화 시사 후 사회적 반발에 부딪혀 꼬리를 내렸던 여권의 기류가 최근 갑자기 국정화 쪽으로 선회한 것이 이해된다.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현 검정교과서가 북한에 우호적이고 대한민국을 깎아내리는 서술이 많으며 좌편향 집필진이 많다는 이유를 제시한다. 그러나 이는 현행 검정체제를 왜곡하는 사실과 다른 주장이다. 아무리 검정교과서라고 해도 출판사 마음대로 서술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정부가 제시한 교과서 집필기준과 편수 용어 등을 지켜야 하고, 집필이 끝나면 교육부의 검증 절차를 밟아야 한다. 게다가 교육부는 2013년 논란이 되는 부분을 고치도록 해 이미 현장에서는 바뀐 교과서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니 여권의 검정교과서 평가는 자가당착일 뿐이다. 백번 양보해 아직도 교과서에 이념편향적 내용이 들어 있다면 현행 검정체제를 통해 걸러내면 그만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인 다원성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다양성은 역사교과서의 생명이나 다름없다. 이를 무시하고 하나의 역사만을 고집한다면 교과서를 보수정권의 이념도구로 삼으려는 목적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이런 이유로 북한 등 비민주적, 비정상적 국가 외에 정상적인 국가 대부분이 검정교과서를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야당은 국정화 강행 시 ‘유신 잠재세력’으로 규정하고 저지 투쟁에 나설 것이라고 어제 밝혔다. 앞서 시민사회와 언론계, 학계 등 사회 전반이 강력한 반대 입장을 천명했다. 박 대통령은 이런 상황을 무겁게 받아들이기 바란다. 그럼에도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붙인다면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 시민감시 빅브러더 꿈꾸는 권력
지난해 검찰의 감청영장(통신제한조치) 집행에 불응하겠다고 선언했던 카카오가 1년 만에 입장을 바꿔 검찰에 협조하기로 했다. 김진태 검찰총장이 그제 대검찰청 국정감사에서 “두 기관이 (감청영장을) 원만하게 제대로 집행하는 방법을 찾았다”고 밝히면서 이 같은 사실이 알려졌다. 양쪽 실무진 간 합의에 따르면 검찰이 법원에서 감청영장을 받아 카카오에 통신 자료 제출 협조를 요청하면 카카오는 수사 대상자를 제외한 나머지 대화 참여자들을 익명으로 처리해 자료를 제공한다. 수사 대상자 이외 대화자들의 이름과 전화번호 등은 보호되지만 대화 내용은 모두 넘긴다. 검찰이 자료를 검토해 범죄 관련성이 있는 사람이 추가로 나오면 다시 공문을 통해 그 신원확인을 요청한다는 것이다. 

검찰과 카카오가 합의했다는 내용을 보면 지난해 논란이 됐던 것에서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감청 요건과 절차를 강화했다고 하지만 3900만명에 이르는 국내 카카오 이용자 누구든 수사기관의 판단에 따라 감청 대상이 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자기가 한 일과 무관하게 통신 내용이 노출됨으로써 프라이버시가 침해될 수 있는 것이다. 지난해 비판을 받았던 ‘편법 감청’, 즉 대화 내용을 저장했다가 제공하는 것을 금지하지도 않았다. 시민의 권익에 영향을 주는 협상이 몰래 진행되었다는 것도 문제다. 이 밀실 협상 때문에 인터넷은행 진출을 추진 중인 카카오가 정부와 타협한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페이스북 등 외국 업체와 달리 검찰이 들여다볼 수 있는 국내 사회관계망의 경쟁력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다. 

헌법 17조, 18조는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 모든 국민은 통신의 비밀을 침해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수사·정보 기관의 감청과 압수수색은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 유엔도 디지털 통신 비밀보호 강화를 권고하고 있다. 그런데 집권당은 네이버 등 포털들이 편향돼 있다며 포털을 옥죄고 검찰은 카카오 감청으로 시민권을 훼손하고 있다. 권력은 시민의 일상을 감시하는 ‘빅브러더’가 되려고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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