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가 지난 12일 ‘유신독재시대로의 회귀’를 공식으로 선언했다.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 황우여는 세종시 정부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2017년 중고교 신입생부터 역사 교과서를 국정화해 ‘객관적 사실에 입각하고 헌법적 가치에 충실한 균형 잡힌 올바른 역사관 확립을 위한 교과서’(약칭 올바른 역사교과서)를 만들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까지 중고등학생들은 ‘객관적 사실에 입각하지 않고 헌법적 가치에 어긋나는 균형 안 잡힌 역사관으로 집필된 검정교과서’에 세뇌당해 왔다는 뜻이다. 이 무슨 낮도깨비 같은 소리인가? 이명박 정부 시기인 2011년에 국정에서 검정으로 전환된 역사교과서는 박근혜 정부 초기에 개편되어 허가를 받았다. 스스로 ‘검증’을 마치고 발행을 허가한 정부가 그 교과서에 대해 뜬금없이 사형선고를 내리는 이유를 납득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대통령 박근혜가 지난해 2월 13일 교육부·문화체육관광부 업무보고에서 “사실에 근거한 균형 잡힌 역사교과서 개발 등 제도 개선책을 마련하기 바란다”고 지시한 이래 집권세력 일각에서는 검정의 국정화 움직임이 끈질기게 나타났지만 야권과 역사 전문가들, 심지어 보수언론, 그리고 많은 국민의 반대로 그런 시도는 좌절되는 듯했다. 그러나 친일파의 후손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박근혜와 새누리당 대표 김무성은 미래권력을 위한 암투에서는 대립하면서도 이 문제에서만은 ‘의기투합’했다. 특히 아버지 박정희가 친일파인데다 유신독재로 온 나라를 암흑천지로 만든 사실을 어떻게 해서라도 역사에서 지우고 싶어 하는 것이 분명한 박근혜는 국정화를 ‘맹신’하는 발언을 자주 해왔다.
최근 집권세력이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고집하면서 쏟아낸 말들은 그것이 강행될 경우 한국사회가 정치·사회·문화적으로 어떤 혼란과 갈등에 빠질 것인지를 명백히 ‘예고’하고 있다. “검정교과서 근현대사 집필자 다수가 특정이념 경도” “이적성 논란 있는 전교조 교사가 다수 포진” “검정교과서는 이념적으로 편향된 내용” “주체사상 노골적 소개” “좌편향 교과서가 친북 숙주” “국정교과서만이 역사 교육 정상화 가능” 등등. 이런 주장은 사실 왜곡이 분명하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검정 당시에 그런 문제들을 밝혀내지 못한 관료들이나 국사편찬위원회 간부들은 지금이라도 총사퇴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다시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주도한다면 야당이 주장하는 대로 ‘역사쿠데타’가 자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일제강점기의 친일반민족행위가 교과서에서 사라지고, 이승만 이래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로 이어지는 독재정권이나 수구반동정권의 부정과 부패, 무능과 독선이 없었던 일들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한국사회는 맹목적으로 ‘반공’을 외치는 극우파와 평화통일을 주창하는 진보적 세력이 종전보다 훨씬 심각하게 대립하는 싸움터로 변할 것이다. 그런 와중에서, 정권이 일방적으로 만든 ‘극우편향 교과서’로 공부하는 학생들은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그 책을 달달 외우면서도 사회에서 벌어지는 기성세대의 충돌을 목격하며 갈피를 잡을 수 없을 것이 명백하다.
▲ 5·16 쿠데타 직후인 1960년 5월 18일의 박정희(가운데) 박종규(왼쪽) 차지철. ⓒ 연합뉴스 | ||
박근혜 정권은 박정희 ‘탄신 100주년’이 되는 2017년 3월부터 ‘올바른 역사교과서’를 중고등학생들에게 공급할 것이라고 한다. 오는 11월 중순에 ‘교과서 집필진과 교과용도서편찬위원회’를 구성하고 11월 말부터 2016년 11월까지 집필을 마칠 계획이라니 아궁이에 군불도 안 때고 밥을 지으려는 어리석은 짓이다. 지난 날 뉴라이트가 만든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가 2년이라는 집필 기간을 거쳤는데도 무려 2261건이나 되는 오류를 범한 사실을 벌써 잊었단 말인가?
박근혜 주연, 김무성과 황우여를 비롯한 집권세력 일부의 조연으로 벌어지고 있는 ‘역사쿠데타’는 반드시 저지되어야 한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김종필 일파가 자행한 군사쿠데타가 한국의 민주화를 수십년이나 후퇴시켰다면 박근혜와 그의 추종자들이 막무가내로 밀고나가는 역사교과서 국정화라는 역사쿠데타는 사상과 이념의 자유로운 소통을 가로막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한편 자랑스러운 민족·민주·민중운동사를 교육과정에서 배제하는 폭거가 될 것이 분명하다. 이런 반역사적 우거(愚擧)를 원천적으로 패퇴시키려면 모든 야당과 시민단체, 그리고 주권자인 국민이 단일전선 성격의 범국민운동체를 결성해야 한다고 믿는다.
▲ 지난 12일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와 이종걸 원내대표를 비롯한 새정치민주연합 지도부가 국회 로텐더홀에서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결의대회를 가지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새정치민주연합 홈페이지 | ||
황우여가 역사교과서 국정화 방침을 발표한 지난 12일 오후 새정치민주연합 지도부는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대표 문재인을 선두로 피켓 시위를 시작했고, 그동안 문재인 체제를 극렬하게 비판해온 김한길, 안철수, 박지원 등도 공동보조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제1야당으로서 많은 지지자들에게 실망과 좌절감을 안겨주던 새정치민주연합의 주류와 비주류가 모처럼 한 목소리를 낸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그동안 내년 총선을 앞두고 공천권 다툼을 일삼는다는 비판을 받던 비주류가 이번의 역사쿠데타를 계기로 화합의 정당을 만드는 데 주력한다면 생산적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박근혜 정권의 역사쿠데타는 새정치민주연합 만의 힘으로는 막을 수가 없다. 정의당도 ‘천정배 신당’도 노동당도 녹색당도 단일 대오에 참여해서 명실상부한 야권대연합을 구축해야 한다. 특히 역사교과서 국정화라는 한국적 파시즘을 격렬히 반대하는 466개 시민사회단체, 역사학 교수들과 교사들, 65개 대학의 역사학도,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선 청소년들, 그리고 평범한 국민들이 야권과 함께 범국민운동체를 결성하는 일이 시급하다. 야권이 범국민운동체의 중심이 되어 역사쿠데타를 좌절시키는 활동을 꾸준히 펼치며 내년 총선을 대비하는 과정에서 대연합을 성사시킨다면 다수 주권자들의 신뢰를 얻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서 2017년 대통령선거에서 야권대연합의 후보가 당선된다면 극우보수세력의 장기집권을 막고 진정한 민주정부, 통일 지향의 정부를 세우는 일이 가능해질 것이다. 이것이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현실로 나타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이 글은 '뉴스타파'에도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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