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세월호 참사 당일 대통령 행적 둘러싼 청와대 해명의 모순점…
형사적 책임 피해가고 ‘없던’ 보고 뒤늦게 추가되고
형사적 책임 피해가고 ‘없던’ 보고 뒤늦게 추가되고
방귀가 잦아지면 설사를 하기 마련이다. ‘세월호 7시간’을 둘러싼 박근혜 대통령의 해명이 꼬여버렸다. 한 일이 없지만 할 일은 했다고 설명해야 하고, 일을 하긴 했지만 형사적 책임이 있는 일은 저지르지 않았다고도 설명해야 하니 앞뒤를 맞출 수 없다. 청와대가 내놓은 세월호 참사 당일 대통령의 행적 공식 설명과 국정 농단 청문회, 탄핵소추 심리 공판 과정에서 관련자들이 진술한 내용을 중심으로 청와대 해명의 모순을 짚었다. _편집자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월10일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재판부 석명 사항에 대한 답변’에서 “인명 구조를 위해 수시로 보고받고 지시를 하는 과정에서 관계 기관의 잘못된 보고와 언론의 오보가 겹쳐 나라 전체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며 “국가안보실장이 오후 2시50분경 승객 대부분이 구조되었다는 보고가 잘못되었고 인명 피해가 심각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고”하였다고 설명했다.
‘짧게는 3분, 평균 20분 간격으로 쉼없이 상황을 점검하고 필요한 지시’를 했지만 오후 2시50분까지 올라온 보고와 취합된 정보가 잘못된 것이라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취지다.
박 대통령의 이 해명은 ‘세월호 7시간’에 대한 형사상 책임만은 피해가려는 기술적 답변으로 보인다. 상황을 인지한 뒤 제대로 구조 지시를 내리지 않은 것이 되면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를 벗어나기 어렵고, 이는 곧 국민의 생명권을 지켜야 하는 대통령의 헌법적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에, 상황 인지 시점을 최대한 늦춰 설명한 것이다. 하지만 이 설명은 최소 네 가지 이유 때문에 거짓말이다.
① 대통령의 최초 상황 인지는 언제 이루어졌나
TV와 인터넷 등에 세월호 사고 소식이 보도되기 시작한 시간은 당일 오전 9시19분 무렵이다. 청와대 국가안보실 역시 9시19분에 세월호 침몰을 처음 인지했다. 이후 국가안보실은 오전 9시24분에 세월호 사고 소식을 청와대 직원들의 공용 휴대전화로 일괄 전송했다.
헌재에 출석한 윤전추 행정관(3급)은 “(문자를) 받았다”는 취지로 답변했다. 애초, 청와대 사고 알림 문자는 ‘수석급’들에게만 전파된 것처럼 설명했지만, 그게 아니라 청와대 직원 전체에게 상황 문자가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대통령이 당일 오전 9시대에 전혀 상황을 몰랐던 것이라면, 청와대는 문자 발송 목록에서 대통령이 배제돼 있음을 입증해야 한다. 또한 참모들이 문자를 받고도 왜 이 사실을 대통령에게 즉각 보고하지 않았는지 책임도 규명해야 한다.
② 보고를 내렸나, 지시를 올렸나
청와대에 따르면,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사고에 대한 첫 공식 서면보고를 오전 10시에 받았다. 10시15분에 김장수 안보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단 한 명의 인명 피해도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다고 헌재에 밝혔다. 이 부분도 석연치 않다.
2014년 7월7일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한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은 “김장수 안보실장이 구두로 대통령께 세월호 참사와 관련 건을 보고드린 시점이 언제냐”는 더불어민주당 박범계 의원의 질문에 “(오전) 10시15분”이라고 답했다. “10시에 서면보고 드리고 그다음에 10시15분에 유선보고를 드렸습니다”라고 했다. 국정 농단 청문회에 출석한 김장수 전 안보실장 역시 오전 10시15분에 ‘보고를 했다’고 진술했다. 그런데 청와대는 헌재에 이를 “(보고 받은 것이 아니라) 지시를 내린 것”이라고 설명한다.
보고와 지시의 차이는 결국 누가 전화를 했는지에서 판명될 것이다. 이에 대해 청와대는 “전화를 하였다”고 말하고, 김기춘 비서실장과 김장수 안보실장은 “유선보고를 드렸다”고 설명한다. 유가족들과 4·16연대는 “이런 전화 통화 자체가 입증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대면보고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발신과 수신의 관계는 중요한 쟁점이지만, 청와대는 통화를 입증할 구체적 자료는 일절 제출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지시이건 보고이건 대통령이 해명할 일은 더 있다.
우선, 지시를 내렸다면 박 대통령이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랬는데도 이후 왜 구조활동을 제대로 지휘하지 않았는지 소명해야 한다. 이는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방문을 결정할 정도로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시점이 ‘오후 2시50분’이라는 설명과 배치된다. 반면 정확한 보고를 받았다 해도, 중대 상황을 보고받고도 왜 구체적으로 지시를 내리지 않았는지 해명돼야 한다.
③ 오전 11시20분, 23분 보고는 왜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가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탑승 인원이 470명 이상이라는 보고를 이미 첫 서면보고인 오전 10시에 받았다. 이후 오전 11시20분에 ‘11:00 현재, 161명 구조, 10:49분 선체 전복’이란 보고를 침몰 선체 사진과 함께 받았다. 그리고 3분 뒤인 11시23분에 안보실장과 통화하며 “315명의 선체 잔류 가능성 높다”는 ‘똑 떨어지는’ 보고를 받는다.
이 대목에 대해 청와대는 오전 11시20분에는 ‘161명 구조’라는 보고를 받았다고만 적었다. 구조가 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던 것처럼 보이려는 기술이다. 오전 11시23분에 이뤄진 안보실장의 보고는 그 내용을 적지 않고 ‘유선보고(4보) 받고 통화’라고만 간략히 적었다. 실제 보고 내용을 은폐하여 헌재에 제출한 것이다.
박 대통령이 정상적인 의사소통과 인지 판단이 가능한 상태였다면, 이미 11시23분에 ‘315명이 갇힌 채 배가 침몰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밖에 없었다. 탑승 인원은 이미 알고 있었고 선체가 침몰한 사진까지 받은 상황에서 ‘161명 구조’라는 보고는 310명 이상의 미구조자가 있다는 긴박한 보고였다. 11시23분에는 이 내용을 더 정확한 말로 들었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의 다음 지시가 내려진 것은 오후 2시11분이다. 세월호 안에 사람이 갇혔다는 것을 보고받고도 무려 2시간48분 동안 지시를 내리지 않았던 것이다. 오전 10시대에 올라온 보고를 지시로 바꾼 청와대가 오전 11시에 올라온 보고에 대해서는 주요 내용을 축소해 설명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청와대는 에둘러 오전 11시1분 무렵 MBC를 비롯한 언론이 ‘전원 구조 오보’를 냈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박 대통령 탄핵소추 대리인단 이중환 변호사는 “(참사 당일 박 대통령이) TV를 보지 않은 것으로 들었다”고 말했다. TV를 보지 않았는데, 오보 때문에 혼란스러웠다는 설명은 ‘뜨거운 얼음’ 같은 형용모순이다.
다른 증언도 있다. <머니투데이>와 인터뷰한 박 대통령의 측근은 “박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당일 오전에는 서류를 검토하느라 바빠 TV를 보지 못했지만 점심 무렵 TV를 통해 사고 영상을 봤다”고 말했다. 당일, 박 대통령은 12시5분께부터 점심 식사를 시작했다. 그때는 전 국민이 세월호 참사 현장을 실시간으로 보던 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왜 오후 2시11분까지 지시를 내리지 않았을까.
④ 대면보고 있었나, 없었나
세월호 참사 이후 1천 일 넘도록 청와대는 한결같이 ‘대면보고는 없었다’고 했다. 김기춘 비서실장은 국정농단 청문회에서 “(대면보고가) 있었더라면, 좋았겠지만…”이라고까지 진술했다. 김 비서실장뿐만 아니라 국회에 출석한 모든 청와대 관계자가 다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박근혜 대통령은 헌재에 다르게 설명했다. 참사 당일, 오전에는 안봉근 제2부속비서관이 “세월호 상황을 대면보고하였고, 점심 식사 후 즈음에도 정호성 제1부속비서관으로부터 세월호 관련 상황을 대면보고 받은 사실이 있다”는 것이다.
이 설명대로라면 국회 청문회 등에 출석한 김기춘 비서실장, 김장수 안보실장, 이재만 총무비서관, 김규현 국가안보실 제1차장, 조여옥 대위, 신보라 대위 등이 모두 위증을 한 것이다.
안봉근·정호성의 대면보고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은 점심 식사 뒤에 있었다는 정호성 비서관의 대면보고다. <한겨레21> 취재에 응한 ‘십상시’ 비서관 가운데 한 명은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 1시30분 무렵 (정호성과) 통화했다. 그 무렵 상황이 바뀐 걸 알았고, 심상찮다고 판단해 정호성 제1부속실장에게 ‘박 대통령이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로 가야 한다’고 연락했다”고 말한 바 있다.
정 비서관은 이미 오후 1시30분에 상황의 심각성을 다른 비서들로부터 들었고 ‘직접 보고해야 한다’는 요청까지 받았다. 청와대 설명에 따르면 당시 정 비서관은 관저 사무공간에 있었다. 대통령과 한 건물에 있었던 정 비서관은 몇 시에 대통령을 봤을까.
이에 대해 정 비서관은 구치소에서 열린 비공개 국회 청문회에서 “(오후) 2시 후반대에 대통령을 관저에서 뵈었다”고 말했다. 간호장교와 미용사 자매 외엔 세월호 참사 당일 관저에서 대통령을 본 적이 없다는 진술을 뒤집는 최초의 증언이었는데, 이 증언 뒤 청와대는 갑자기 안봉근·정호성의 관저 출입을 겨우 인정했다.
이 대목은 조직적 비호 속에 국회 청문회에 불출석한 이영선·윤전추 행정관이 헌재에서 짜맞춘 진술을 한 대목과 더불어 청와대가 일사불란하게 증언과 증거들을 통제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의구심이 들게 한다.
박 대통령이 헌재에 제출한 답변서에는 세월호 참사 이후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던 낮 12시54분 보고가 추가돼 있다. 행정자치비서관실의 보고인데, 그 내용은 ‘해군 및 해경 특공대 선체 투입하여 생존자 여부를 확인 중’이란 것이다.
1천 일 넘도록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보고가 왜 갑자기 튀어나온 것일까. ‘구명조끼 발언’ 외에 ‘특공대 투입 성과’를 묻는 질문을 뒷받침하기 위한 알리바이다. 이 대목에 대해 박 대통령 쪽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방문 때 대통령의 “구명조끼를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 발언이 ‘뜬금없는 발언’이 아니라 특공대 투입 등을 이미 지시한 상황의 취지를 묻는 맥락 있던 질문이라고 강조했다. 그 맥락이 설명되기 위해 없던 보고가 ‘발견’된 셈이다.
짜깁기를 더한 흔적은 또 있다. 이영선 행정관은 헌재 답변에서 세월호 참사 당일 대통령의 점심 식사 장소에 대한 질문에 “식당으로 들어가는 것을 봤다”며 “특별한 일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날도 12시에 대통령이 들어간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식당에 가서 TV를 봤다는 청와대 관계자의 설명과 일치한다.
하지만 청와대 답변서를 보면 대통령은 낮 12시5분 집무실에서 사회안전비서관의 여객선 침몰 상황 보고서 4보를 검토했고, 12시33분에도 5보를 검토했다. 상황이 너무 급박해 30여 분 사이에 식사를 마친 것일까. 그런데 뜻밖에도 대통령은 12시50분 최원영 고용복지수석과 기초연금법 국회 협상 상황을 얘기한다. TV로 침몰 상황을 지켜봤고 보고까지 검토했지만, 정작 급하게 밥을 먹고 와서는 다른 통화를 한 셈이다.
더 말이 안 되는 건 미용 시간이다. 청와대 해명에 따르면, 대통령은 당일 오후 3시35분부터 20여 분간 올림머리 손질을 했다. 55분까지는 꼼짝없이 미용사와 시간을 보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그 사이 관저에서 집무실로 이동해, 외교안보수석실의 서면보고(3시42분)를 받고, 사회안전비서관실의 보고(3시45분)까지 받았다. 머리를 하며 이동하고, 머리를 하는 도중에 서면보고를 받은 셈이다. 정돈되지 않은 상태에선 윤전추 비서조차 잘 만나지 않았다는 대통령인데, 그 서면은 그럼 누가 전달한 것일까.
헌재에 제출된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 행적 답변서는 진실이 아닐 가능성이 농후하다. 오히려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짜깁기된 페이퍼워크(paperwork)일 공산이 크다. 카지노 용어로 페이퍼워크는 ‘속임수를 위한 작업’이다.
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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