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누리당현수막 '좌파학자들의 전유물에서 국민의 역사로' 새누리당의 국정교과서 관련 현수막 | |
ⓒ 김민수 |
역사교과서 국정화 시도와 관련한 새누리당의 현수막이 갈수록 치졸함을 더해가고 있는 가운데, 서울 송파구 지하철 5호선 개롱역 사거리에도 황당한 현수막이 나붙었다. 현수막 글귀는 '좌파 역사학자들의 전유물에서 국민의 역사로'다.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우리 아이들이 배우고 있습니다'보다는 조금 격이 높은(?) 현수막이니 자신을 위로해야 할까?
새누리당이 최근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관련해 붙인 현수막 내용대로라면, 먼저 국가보안법상으로 처벌을 받아야 할 당사자들은 집권당인 새누리당이다. 현재 사용 중인 검정 역사교과서를 채택하고 허락해준 교육부 당사자들도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앞뒤 맞지도 않는 억지 주장으로 현재 사용 중인 역사교과서를 왜곡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바로잡겠다는 역사가 과연 객관성을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역사교과서의 국정화 작업이 박근혜 대통령의 복심에서 나왔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그렇다면 이번 일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치적만 강조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한 나라의 국정을 책임지는 위치에 있으면서 한 나라의 역사와 한 개인의 가정사를 혼동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더 불행한 일은 이를 바로 잡아주어야 할 이들이 오히려 한발 더 나아가 과열 충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새누리당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으며, 차기 대선주자인 김무성 대표가 그 정점에 서 있다. 이 나라의 미래를 생각했을 때 불행한 일이다.
새누리당 '막장 현수막', 50대들의 반응은?
▲ 새누리, 내렸던 '주체사상' 현수막 다시 걸어 새누리당이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홍보하기 위해 지난 14일 저녁 서울 여의도 국회 앞 대로변에 내건 현수막. | |
ⓒ 남소연 |
새누리당이 내건, 거의 막장 수준의 현수막을 본 50대 중반의 내 친구들은 한결같은 반응이었다. 참고로 우리는 1960년대 초반 출생으로, 베이비 붐 세대에 속한다. 1970년대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국민교육헌장'과 '국기에 대한 맹세' 등을 달달 외우던 세대였고, 반공 웅변 대회나 반공 글짓기 대회에서 "때려잡자 공산당"을 외치던 세대였다. 게다가 반공 교육을 통해 북한 사람들이 정말로 빨갛고 뿔이 딸린 괴상한 존재로 믿고 살았던 세대이기도 하다.
나름 끝자락이지만 보릿고개의 배고픔도 경험했고,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소식을 접하면서도 편향된 언론의 보도를 그대로 믿었던 세대이기도 하다. 80년대 초에 대학생이 되어 비로소 광주민주화운동의 실체를 접했고, 1987년 민주화 운동의 과정까지 대학생활을 했던 세대다. 졸업 후 취업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외환 위기에 직격탄을 맞은 세대였다. 오랜 불황이 겨우 회복되려는 무렵에 은퇴 압박에 시달리는 불안한 세대이기도 하다.
지난 17일 친구 3명과 한자리에 모였다. 국정교과서와 새누리당이 내건 현수막 이야기도 주제 중 하나였다. 이들과 나눈 대화의 내용을 다 옮길 수는 없지만, 대략 이런 이야기들이 오갔다. 이름 대신 쓴 별칭은 친구의 정치성향에 따라 기자가 임의로 붙인 것이다.
- 진보파 : "도대체 있을 수 없는 일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네. 국정교과서를 만들겠다는 속내는 뻔하지. 보수 진영에서 주장하는 것들, 이승만 국부만들기나 박정희 유신체제 미화, 친일파들의 면피성 역사 기술 뭐 그런 거 아니겠어?"
- 중도파 : "쿠데타는 쿠데타지 혁명이 될 수 없을 거야. 그래도 박정희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지. 긍정적인 면도 분명히 있지만, 딸이 직접 나서서 이러는 것은 좋아 보이지 않아. 더군다나, 일제 시대를 바라보는 보수 인사들의 역사관은 위험하다고 생각해. 가끔, 그 사람들은 한국사람이 아니고 일본 사람이 아닌가 싶다니까."
- 보수파 : "이번엔 할 말이 없어. 주체사상을 가르치네, 좌편향이네 하는데 그런 주장들이 터무니없더라고. 더군다나 새누리당 현수막을 보고 실망했어. 이게 뭐 수준이 있어야지. 창피해서. 이번 현수막을 보면서 그 사람들은 보수가 아닌 것 같았어. 사실 나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기대가 많았고, 지금도 잘만 하면 그냥 지지를 보낼 거 같아. 그런데 실망이야."
보수마저, "역사교과서 좌편향? 터무니 없어"
▲ 역사교과서 국정화 강행에 반대하는 청년들의 기발한 대자보가 화제다. 연세대학교 학생들은 박근혜 대통령을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에 비유해 비판했다. | |
ⓒ 트위터 화면갈무리 |
다양한 정치 성향과 상관없이 친구들은 이번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새누리당 현수막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동시에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에게도 비판적이었다. 진보 혹은 중도파 친구들 역시 새정치민주연합의 행태를 마뜩해하지 않았다.
- 진보파 : "국정교과서를 반대하는 것은 좋은데 논리가 없어. 지난번에 보니 문재인 대표가 국정교과서를 하면 수능이 어려워지네 어쩌네 했어. 학부모의 표를 겨냥한 발언이겠지? 너무 속이 보여서 싫어. 새누리당이나 보수파가 역사 교과서를 어떻게 바꾸고자 하는지 그 내용을 국민에게 정확하게 각인시키는 것이 중요하지. 아무튼, 싸움을 잘 못 해."
- 중도파 : "조금 걱정스럽긴 했지만, 연세대학교하고 고려대학교에 붙은 대자보 재밌더라. 이 대자보들은 북한 말투로 역사교과서 국정화 강행을 비판했는데, 딱 그런 상황인 것 같아. 마치 우리가 초등학교 때 비판적으로 배웠던 북한의 모습과 지금의 우리 사회가 판박이라고 할까? 그나저나 새정치민주연합은 이렇게 자신들이 입지를 다질 수 있는 좋은 호재가 있는데 뭐 하는 거야?(관련기사:"력사교과서 국정화, 박근혜 최고지도자의 혜안"?)"
- 보수파 : "새정치민주연합은 새누리당에 상대가 안 돼. 그냥 '새누리당 2중대'라고 하면 되지 않겠어? 야당이 역할이 뭐야. 선명해야 하는데, 지금 새정치민주연합은 야당인지 여당인지 난 구분이 안 가. 난 내년 총선에도 마음에 들지 않아도 새누리당을 지지할 것 같아. 대안이 없어."
분명한 건 내 친구들은 새누리당이 국정교과서를 홍보하려고 내건 현수막을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는 거다. 나는 새누리당이 이렇게 선정적이고 부정적인 문구를 내걸어 각인 효과를 누리는 것이 아닌가 싶어 섬뜩하기도 하다. 현행 교과서의 내용과 상관없이 '주체사상을 가르치는 교과서'로 낙인을 찍어 버리는 거다.
국민이 무지하다면, 새누리당은 이런 막가파식 현수막으로도 자신들이 얻고자 하는 걸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수와 진보를 막론한 우리 대화의 결론은 "국민의 역사 수준을 뭐로 알고 이따위 현수막으로?"였다.
50대 중반. 보수로 분류되는 것이 싫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차로 보수화하는 걸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물론 그 보수화라는 것이 정치 성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다른 부분은 대체로 보수화하고 있으며, 사회에서도 50대는 보수로 구분하니 보수층이라고 하자. 그런 보수층조차도 이번 새누리당의 현수막과 교육부나 정부의 주장을 불쾌하게 여기고 있다. 앞서 사례는 단편적인 이야기일 수 있지만, 내 친구들만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닐 거다.
이번 역사교과서 국정화 시도는 '위험한 도박'이라고 생각한다. 도박이기에 이를 추진하는 이들의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국정교과서 시도를 사과하고, 제대로 된 역사를 우리의 아이들이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만이 이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해서 좋은 일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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