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미국 방문을 두고 정부와 일부 언론은 한국이 중국에 경도돼있다는 이른바 '중국 경사론'을 해소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중국 경사론을 불식시키기 위해 박 대통령이 너무 과도하게 미국에 경도된 언행을 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박 대통령이 "한-미 동맹은 미국의 아시아 태평양 재균형 정책의 핵심축"이라고 발언한 부분을 문제 삼았다. 정 전 장관은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 정책의 핵심이 미국을 최상위에 두고 그 아래 중국을 무릎 꿇게 만들겠다는 건데, 여기에 한 축이 되겠다고 이야기했으니 중국에 이걸 어떻게 설명할 거냐"고 따져 물었다.
박 대통령이 이렇게까지 미국 편을 든 이유는 무엇일까? 정 전 장관은 지난 9월 박 대통령이 중국 전승절 기념 열병식에 참석한 '죗값'을 톡톡히 치르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중국과 가까워지려는 한국에 미국이 발끈했고, 이런 미국을 달래기 위해 중국을 자극할 수 있는 발언을 쏟아냈다는 것이다.
정 전 장관은 "그런데 중국이랑 가까워지는 것처럼 비춰진 것이 뭐 그렇게 대역죄인가? 한-미 동맹과 한-중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균형 있게 가져가는 것이 박근혜 정부 동북아 외교의 기조 아닌가"라며 "중국 경사론을 적당히 불식시키면되는데, 이걸 불식시킨답시고 너무 미국에 경도된 셈이다. 앞으로 중국에 가서 어떤 말을 할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이라고 우려했다.
한편 정부에서는 한국과 미국이 '북한에 관한 한-미 공동 성명'을 채택한 것을 두고 "북한만을 다룬 최초의 양국 공동 성명"이라면서 그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정 전 장관은 이 성명이 "유통기한이 지난 물건을 가지고 와서 먼지만 털고 난 뒤에 새로운 물건인 것처럼 속인 것에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부는 이 성명을 6월부터 준비했다고 설명했다. 당시에는 북한이 노동당 창건 70주년인 10월 10일에 맞춰 장거리 로켓이나 핵실험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사전에 경고하는 의미로 북한에 강한 메시지를 보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6월과 상황이 많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지난 6월 이후 남북은 8.25 합의를 이뤘고 북한은 장거리 로켓 발사와 핵실험을 하지 않았으며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지난 10일 연설을 통해 주변정세를 안정시켜야 한다고 밝혔다. 성명에 이러한 변화된 상황이 반영되지 않은 채 예전에 작성했던 것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는 것이 정 전 장관의 진단이다.
그는 "최근 북한의 메시지는 6자회담을 하고 평화협정을 다시 이야기하자는 것"이라며 "문제는 미국과 우리가 이 행간의 뜻을 읽어주느냐에 달려 있다. 한-미가 북한의 뜻을 이해하고 6자회담 추진 쪽으로 정책 방향을 틀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자각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 박근혜 정부에서 가능할지는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인터뷰는 지난 20일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프레시안 : 박근혜 대통령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습니다. 이번 회담을 통해 한국이 중국에 치우쳐있다는 이른바 '중국 경사론'을 불식시켰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외교'를 했다는 것이 정부의 설명인데요.
정세현 : 박근혜 대통령이 "나 중국 편 아니야. 미국 편이야"라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미국에 간 건 맞습니다. 그런데 퍼포먼스를 너무 세게 했습니다. 널뛰기도 이런 널뛰기가 없습니다.
박 대통령은 이번 방미 일정 중 지난 14일(현지시각)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우호의 밤' 행사에서 "한-미 동맹은 미국의 아시아 태평양 재균형 정책의 핵심축"이라고 밝혔습니다.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 정책이 뭡니까? 중국이 미국 중심의 국제 질서에 도전하는 것을 재조정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미국이 최상위에 있고 그 밑에 중국을 무릎 꿇게 만드는 것이 아시아 재균형의 핵심인데, 여기에 한 축이 되겠다고 자진해서 이야기했으니 중국에 이걸 어떻게 설명할지 참 난감해졌습니다.
여기에 박 대통령은 16일(현지시각) 미국 '전략 국제문제 연구소'(CSIS) 연설에서 한-미 동맹을 한반도 전역으로 확대해 나가야 할 때라고 밝혔습니다. 이건 한국과 미국이 손잡고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올라가자는 이야기인데, 북한이 놀랄만한 발언이기도 하지만 중국도 대단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는 발언입니다.
여기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쐐기를 박았습니다. 16일(현지시각) 정상회담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중국이 국제규범을 준수해야 하며 이에 실패한다면 한국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중국에 줄 서지 말고 자기 쪽으로 오라는 메시지입니다.
대체 박 대통령은 왜 중국이 발끈할만한 발언들을 쏟아낸 것일까요? 일단 미국에서 중국 경사론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한국에서도 보수 중심으로 중국에 경도돼있다는 지적이 나왔다는 점을 꼽을 수 있습니다. 박 대통령의 지지 기반인 보수에서 이런 지적이 나오다 보니 집토끼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에 미국에 경도된 발언을 내뱉은 것일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전승절 참석에 대한 '죗값'을 치르고 있는 측면도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천안문 망루에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올랐는데요. 미국이 여기에 불편한 기색을 보이면서 한국이 미국보다 중국과 더 가깝다고 불만을 제기했을 겁니다. 미국에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고, 중국 경사론을 불식시키기 위해 먼저 나서서 중국을 견제하는 미국의 입장에 동참하겠다는 식의 발언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이랑 가까워지는 것처럼 비춰진 것이 뭐 그렇게 대역죄입니까? 한-미 동맹과 한-중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균형 있게 가져가는 것이 박근혜 정부 동북아 외교의 기조 아닙니까? 중국 경사론을 적당히 불식시키면 되는데, 이걸 불식시킨답시고 너무 미국에 경도된 셈입니다. 앞으로 중국에 가서 어떤 말을 할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됩니다.
프레시안 : 박 대통령의 이런 발언은 의도적인 것일까요, 아니면 저 발언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고 좌충우돌한 것일까요?
정세현 : 미-중 간 균형을 잡기 위한 발언이었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저런 발언이 엄청난 후과를 몰고 올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건 사실 대통령보다는 참모들의 책임이 큽니다.
외교·안보 분야의 경험이 없는 대통령이 어떤 이야기가 어떤 파장을 불러올 것인지 상세하게 알기는 힘듭니다. 결국 연설문을 써주고, 예상 질의 응답을 작성한 참모들이 잘못한 겁니다. 왜 모범답안을 저렇게 써줬느냐는 겁니다.
대통령의 발언은 곧 정책입니다. 따라서 대통령 자료를 챙기는 수석 비서관들은 정말 꼼꼼히 검토해야 합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대통령 후보 시절 강릉에서 "쌀 시장 문제는 대통령직을 걸고 막겠다"고 연설했습니다. 그런데 취임 후 미국의 압력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되자 쌀 시장을 개방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당시 그 연설문에 원래는 '대통령 직을 걸고'라는 표현이 없었다고 합니다. 중간에 들어간 건데요. 김 전 대통령은 이런 표현을 쓴 사람이 누구냐면서 관계자를 색출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번 방미 당시 박 대통령의 발언은 북한이 문제가 아니라 중국을 기분 나쁘게 했습니다. 향후 외교·안보·경제적 측면에서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후속 조치 계획을 가지고 있겠지만, 혹시 그렇지 않다면 앞으로 감당하기 어려워집니다. 이런 부분을 생각했을 때 박 대통령을 보좌하는 사람들이 보통 수준의 직무유기를 한 것이 아닙니다.
한-미 공동 성명? 유통기한 지난 상품에 불과
프레시안 : 박근혜 대통령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북한에 관한 한-미 공동 성명'을 채택했습니다. 이를 두고 정부에서는 "북한만을 다룬 최초의 양국 공동 성명"이라면서 대단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어떻게 보십니까?
정세현 : 성명의 내용을 보고 평가해야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유통기한이 지난 물건을 가지고 와서 먼지만 털고 난 뒤에 새로운 물건인 것처럼 속인 것에 다름없습니다.
정부는 이 성명을 6월부터 준비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당시에는 북한이 노동당 창건 70주년인 10월 10일에 맞춰 장거리 로켓이나 핵실험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예측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전에 경고하는 의미로 북한에 강한 메시지를 보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6월과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북한이 장거리 로켓도 발사하지 않았고 핵실험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강하게 이야기할 하등의 상황적 근거는 없습니다.
게다가 이번 성명에서 8.25 합의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8.25 합의를 이뤄낸 것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어떤 식으로 이 합의를 풀어나갈지에 대해 한-미 정상회담에서 후속 이야기를 해줘야 하는데, 통일부와 외교부 간 협조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노동당 창건일 열병식에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연설을 했습니다. 이 연설에 대한 반응 역시 성명에는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그냥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하겠다'는 식입니다.
미국 역시 전혀 바꾸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겁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임기 말이라 정책을 바꿀 수 없다는 생각에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전략적 인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을 뿐이지, 사실상 북한을 압박하는 내용으로 가득 찼습니다.
김 제1위원장은 이번 연설에서 핵-경제 병진 노선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인민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경제 발전을 해야 하고, 그러려면 주변 정세를 안정시켜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도 하지 않았습니다.
북한이 이 정도까지 나왔다면 미국과 한국은 "그래 그럼 6자회담 하자. 대신 6자회담 하려면 최소한 너네도 이 정도는 해야 한다"라는 식으로 문턱을 좀 낮춰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성명을 보면 북한을 6자회담 테이블로 끌어내려는 것보다는, 오히려 북한이 6자회담에 나올까 봐 겁이 나서 사전에 조치를 취하려는 것 같아 보입니다. 북한이 6자회담에 나갈 용의가 있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도록 사방에 장벽을 쌓고, 오히려 반발을 유도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계속 평화협정 이야기를 거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북한은 한-미 정상회담 종료 이후 하루가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외무성 성명을 냈는데, 여기에서 '북한에 관한 한-미 공동 성명'에 대한 내용은 일체 언급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평화협정 이야기를 한 것인데, 이는 비핵화 의지를 드러낸 것입니다.
2005년 9.19 공동성명에서 북한과 미국은 비핵화와 평화협정을 맞바꾸기로 했었습니다. 비핵화에 대한 대가로 미-북 수교와 일-북 수교를 하기로 했는데, 미-북이 수교하려면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합니다. 전쟁 상태를 끝내지 않고 수교할 수 없지 않습니까?
2006년 북한의 1차 핵실험 이후 2007년 2.13합의가 나오기 전에, 미국과 북한은 2006년 11월 사전 합의의 틀을 마련했습니다. 미국과 북한이 판을 짜놓고 6자회담의 나머지 국가들에게 사후 승인을 받는 식이었습니다.
북한은 이번에도 평화협정 문제를 우선순위로 해서 미-북 간 협상을 해보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이는 2009년 오바마 정부 1기 때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이 1년 동안 노래를 부르고 다녔던 방법입니다. 힐러리는 북한이 비핵화를 실행할 용의가 있다면 미-북 수교와 평화협정 문제 논의를 우선적으로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최근 북한의 메시지는 바로 이때로 돌아가자는 겁니다. 핵이라는 단어는 쓰지 않고 있지만 6자회담 하자는 이야기입니다. 마치 한-미 공동 성명이 6자회담 이야기를 일체 하지 않으면서도 6자회담에서 논의돼야 할 문제인 핵 문제에 대해 굉장히 강하게 북한을 압박해 들어가듯이, 북한 역시 이런 식으로 6자회담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겁니다.
문제는 미국과 우리가 이 행간의 뜻을 읽어주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한-미가 이렇게 세게 나갔는데, 북한이 이렇게 나온 것은 6자회담을 하겠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6자회담 추진 쪽으로 정책 방향을 틀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자각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 박근혜 정부에서 가능할지는 의문입니다.
북한은 미국과 만나서 평화협정을 논의하고 비핵화로 가겠다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이것 없이 김 제1위원장이 연설에서 밝힌 주변 환경이 안정되기 힘들고, 그러면 경제 발전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북한 내부의 이같은 절박한 필요 때문에 북한은 미국과도, 남한과도 관계를 개선하고 싶어 합니다. 여기에 우리가 맞장구를 쳐줄지는 미지수입니다.
프레시안 : 6자회담이 의미가 있으려면 미-북 간 사전 밑그림이 있어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현재 오바마 정부는 그럴 겨를이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임기가 채 1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는데요.
정세현 : 그런 측면도 있지만 부시 정부도 임기 말을 코앞에 두고 2.13 합의를 만들어냈습니다. 이어 집권한 오바마 정부에서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부시 정부 때 만들었던 9.19 공동성명의 틀 안에서 북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내년 대선에서 누가 대통령이 될지 모르겠지만 정권이 바뀐다고 해도 정책의 연속성은 가져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한편으로 오바마 대통령은 갚아야 할 '외상'이 있습니다. 2009년 핵무기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연설로 노벨 평화상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럼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최소한의 디딤돌이라도 놓고 가야 평화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겁니다. 북핵 문제 해결의 좁은 문이라도 열어놓고 나가야지, 안 그러면 노벨 평화상 반납해야 합니다.
프레시안 : 오바마 대통령을 움직이려면 남한이 움직여야 할 필요도 있지 않을까요?
정세현 : 이번 회담에서 박 대통령이 오바마 대통령에게 계속 이야기했어야 합니다. "북한의 핵 능력과 미사일 능력이 고도화되는 것 미국이 더 잘 알고 있지 않냐, 그대로 두면 우리는 어떻게되냐, 미국이야 북핵이 늘어나도 걱정할 건 없지만 우리는 북핵 능력이 높아지면 그만큼 국민들의 불안감이 커지는 절박한 상황이다"라고 호소했어야 합니다.
북한이 핵 폐기 의지를 표현하는 수준에서 6자회담을 시작하도록 문턱을 낮추자고 미국에 제안하고 설득하는 작업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과 철 지난 성명만 발표하고 온 겁니다.
이산가족 이후 남북관계는?
프레시안 : 우려했던 이산가족 상봉이 예정대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대로면 이번 상봉은 무난히 치러질 것 같은데요. 상봉 이후 남북관계는 어떻게 될까요?
정세현 : 북한은 이번 상봉을 무사히 끝내고 8.25 합의에서 약속했던 남북 당국회담을 어떻게 해서든지 살려보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남북 당국회담이 돼야 미국과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북한은 뉴욕 채널 통해 혹시라도 미국이 자신들의 제안에 호응해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은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남한도 별다른 반응이 없고 미국도 호응이 없다면 북한은 남한과 대화도 하지 않은 채 악을 쓰고 나설 것입니다.
따라서 남한이 8.25 합의에 근거한 당국 회담을 공식적이고 공개적으로 북한에 제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북한이 한-미 공동성명에도 불구하고 평화협정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분명 남한, 미국과 대화 의지가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당국 회담을 제안해서 남북, 미-북 대화가 같이 가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남북관계 개선과 북핵 문제 해결을 동시에 추진해야 합니다.
실제 이 시나리오가 실현될 수 있도록 임기가 2년 남은 박근혜 정부가 임기 1년이 남은 오바마 정부를 끌고 가야 합니다. 오바마 정부 임기가 1년밖에 남지 않았는데 뭘 할 수 있겠느냐는 인식이 아니라, 이렇게라도 만들어 놓으면 다음 정부가 최소한 북핵문제 해결의 문은 열린 상태에서 집권할 수 있다는 점을 자각해야 합니다.
통일부는 이런 분위기를 만들고 실제 실행하는데 노력해야 합니다. 세계 평화회의 같은 학술행사를 할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남북문제, 북핵 문제 해결에 힘을 써야 합니다. 한반도 평화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면서 무슨 세계 평화를 논하고 있는 겁니까?
예전에 남북 대화가 한창일 때, 1년에 서른 번 이상 회담을 했을 때는 회담 사무국 예산이 모자라서 정책실, 교육원 등등에서 가져다 쓴 적도 있습니다. 통일부가 세계평화회의를 한다는 걸 보니, 예산에서 불용액 남기지 않으려고 그런 것 같은데, 예산을 거기에 쓸 것이 아니라 당국회담을 열어서 실제적인 남북관계 개선과 북핵문제 해결에 써야 합니다.
프레시안 : 그런데 북한은 여전히 이산가족 상봉을 부담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상봉 정례화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북한이 여기에 호응하기는 쉽지 않아 보이는데요.
정세현 : 20일부터 시작된 1차 이산가족 상봉 인원을 보면, 남한은 389명인데 비해 북한은 141명입니다. 총 96가족 만남에 141명이 나왔다는 이야기는 동반하는 가족이 없이 혼자 오는 사람이 적어도 절반은 된다는 뜻입니다. 북한이 이산가족 상봉 사업을 굉장히 어려운 일로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고 북쪽 가족들이 남쪽 가족을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민들의 생사를 확인하는 것이 북한의 행정력으로는 쉽지 않고, 또 설사 만나고 싶어한다고 해도 북한은 아무나 내보내지는 않습니다. 내보낼 수 있는 상태가 돼야 명단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상봉 대상자의 건강 상태가 나쁜 경우 북한은 절대 내보내지 않습니다. 상봉 나가는 가족들 옷도 따로 준비해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남한의 대북 지원이 없지 않았습니까? 없는 돈 모아서 억지로 상봉을 준비하는 것이라 북한은 반대급부가 없다면 정기적인 상봉은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박 대통령이 "한-미 동맹은 미국의 아시아 태평양 재균형 정책의 핵심축"이라고 발언한 부분을 문제 삼았다. 정 전 장관은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 정책의 핵심이 미국을 최상위에 두고 그 아래 중국을 무릎 꿇게 만들겠다는 건데, 여기에 한 축이 되겠다고 이야기했으니 중국에 이걸 어떻게 설명할 거냐"고 따져 물었다.
박 대통령이 이렇게까지 미국 편을 든 이유는 무엇일까? 정 전 장관은 지난 9월 박 대통령이 중국 전승절 기념 열병식에 참석한 '죗값'을 톡톡히 치르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중국과 가까워지려는 한국에 미국이 발끈했고, 이런 미국을 달래기 위해 중국을 자극할 수 있는 발언을 쏟아냈다는 것이다.
정 전 장관은 "그런데 중국이랑 가까워지는 것처럼 비춰진 것이 뭐 그렇게 대역죄인가? 한-미 동맹과 한-중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균형 있게 가져가는 것이 박근혜 정부 동북아 외교의 기조 아닌가"라며 "중국 경사론을 적당히 불식시키면되는데, 이걸 불식시킨답시고 너무 미국에 경도된 셈이다. 앞으로 중국에 가서 어떤 말을 할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이라고 우려했다.
한편 정부에서는 한국과 미국이 '북한에 관한 한-미 공동 성명'을 채택한 것을 두고 "북한만을 다룬 최초의 양국 공동 성명"이라면서 그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정 전 장관은 이 성명이 "유통기한이 지난 물건을 가지고 와서 먼지만 털고 난 뒤에 새로운 물건인 것처럼 속인 것에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부는 이 성명을 6월부터 준비했다고 설명했다. 당시에는 북한이 노동당 창건 70주년인 10월 10일에 맞춰 장거리 로켓이나 핵실험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사전에 경고하는 의미로 북한에 강한 메시지를 보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6월과 상황이 많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지난 6월 이후 남북은 8.25 합의를 이뤘고 북한은 장거리 로켓 발사와 핵실험을 하지 않았으며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지난 10일 연설을 통해 주변정세를 안정시켜야 한다고 밝혔다. 성명에 이러한 변화된 상황이 반영되지 않은 채 예전에 작성했던 것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는 것이 정 전 장관의 진단이다.
그는 "최근 북한의 메시지는 6자회담을 하고 평화협정을 다시 이야기하자는 것"이라며 "문제는 미국과 우리가 이 행간의 뜻을 읽어주느냐에 달려 있다. 한-미가 북한의 뜻을 이해하고 6자회담 추진 쪽으로 정책 방향을 틀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자각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 박근혜 정부에서 가능할지는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인터뷰는 지난 20일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프레시안 : 박근혜 대통령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습니다. 이번 회담을 통해 한국이 중국에 치우쳐있다는 이른바 '중국 경사론'을 불식시켰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외교'를 했다는 것이 정부의 설명인데요.
정세현 : 박근혜 대통령이 "나 중국 편 아니야. 미국 편이야"라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미국에 간 건 맞습니다. 그런데 퍼포먼스를 너무 세게 했습니다. 널뛰기도 이런 널뛰기가 없습니다.
박 대통령은 이번 방미 일정 중 지난 14일(현지시각)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우호의 밤' 행사에서 "한-미 동맹은 미국의 아시아 태평양 재균형 정책의 핵심축"이라고 밝혔습니다.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 정책이 뭡니까? 중국이 미국 중심의 국제 질서에 도전하는 것을 재조정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미국이 최상위에 있고 그 밑에 중국을 무릎 꿇게 만드는 것이 아시아 재균형의 핵심인데, 여기에 한 축이 되겠다고 자진해서 이야기했으니 중국에 이걸 어떻게 설명할지 참 난감해졌습니다.
여기에 박 대통령은 16일(현지시각) 미국 '전략 국제문제 연구소'(CSIS) 연설에서 한-미 동맹을 한반도 전역으로 확대해 나가야 할 때라고 밝혔습니다. 이건 한국과 미국이 손잡고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올라가자는 이야기인데, 북한이 놀랄만한 발언이기도 하지만 중국도 대단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는 발언입니다.
여기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쐐기를 박았습니다. 16일(현지시각) 정상회담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중국이 국제규범을 준수해야 하며 이에 실패한다면 한국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중국에 줄 서지 말고 자기 쪽으로 오라는 메시지입니다.
대체 박 대통령은 왜 중국이 발끈할만한 발언들을 쏟아낸 것일까요? 일단 미국에서 중국 경사론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한국에서도 보수 중심으로 중국에 경도돼있다는 지적이 나왔다는 점을 꼽을 수 있습니다. 박 대통령의 지지 기반인 보수에서 이런 지적이 나오다 보니 집토끼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에 미국에 경도된 발언을 내뱉은 것일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전승절 참석에 대한 '죗값'을 치르고 있는 측면도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천안문 망루에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올랐는데요. 미국이 여기에 불편한 기색을 보이면서 한국이 미국보다 중국과 더 가깝다고 불만을 제기했을 겁니다. 미국에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고, 중국 경사론을 불식시키기 위해 먼저 나서서 중국을 견제하는 미국의 입장에 동참하겠다는 식의 발언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이랑 가까워지는 것처럼 비춰진 것이 뭐 그렇게 대역죄입니까? 한-미 동맹과 한-중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균형 있게 가져가는 것이 박근혜 정부 동북아 외교의 기조 아닙니까? 중국 경사론을 적당히 불식시키면 되는데, 이걸 불식시킨답시고 너무 미국에 경도된 셈입니다. 앞으로 중국에 가서 어떤 말을 할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됩니다.
프레시안 : 박 대통령의 이런 발언은 의도적인 것일까요, 아니면 저 발언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고 좌충우돌한 것일까요?
정세현 : 미-중 간 균형을 잡기 위한 발언이었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저런 발언이 엄청난 후과를 몰고 올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건 사실 대통령보다는 참모들의 책임이 큽니다.
외교·안보 분야의 경험이 없는 대통령이 어떤 이야기가 어떤 파장을 불러올 것인지 상세하게 알기는 힘듭니다. 결국 연설문을 써주고, 예상 질의 응답을 작성한 참모들이 잘못한 겁니다. 왜 모범답안을 저렇게 써줬느냐는 겁니다.
대통령의 발언은 곧 정책입니다. 따라서 대통령 자료를 챙기는 수석 비서관들은 정말 꼼꼼히 검토해야 합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대통령 후보 시절 강릉에서 "쌀 시장 문제는 대통령직을 걸고 막겠다"고 연설했습니다. 그런데 취임 후 미국의 압력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되자 쌀 시장을 개방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당시 그 연설문에 원래는 '대통령 직을 걸고'라는 표현이 없었다고 합니다. 중간에 들어간 건데요. 김 전 대통령은 이런 표현을 쓴 사람이 누구냐면서 관계자를 색출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번 방미 당시 박 대통령의 발언은 북한이 문제가 아니라 중국을 기분 나쁘게 했습니다. 향후 외교·안보·경제적 측면에서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후속 조치 계획을 가지고 있겠지만, 혹시 그렇지 않다면 앞으로 감당하기 어려워집니다. 이런 부분을 생각했을 때 박 대통령을 보좌하는 사람들이 보통 수준의 직무유기를 한 것이 아닙니다.
한-미 공동 성명? 유통기한 지난 상품에 불과
프레시안 : 박근혜 대통령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북한에 관한 한-미 공동 성명'을 채택했습니다. 이를 두고 정부에서는 "북한만을 다룬 최초의 양국 공동 성명"이라면서 대단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어떻게 보십니까?
정세현 : 성명의 내용을 보고 평가해야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유통기한이 지난 물건을 가지고 와서 먼지만 털고 난 뒤에 새로운 물건인 것처럼 속인 것에 다름없습니다.
정부는 이 성명을 6월부터 준비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당시에는 북한이 노동당 창건 70주년인 10월 10일에 맞춰 장거리 로켓이나 핵실험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예측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전에 경고하는 의미로 북한에 강한 메시지를 보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6월과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북한이 장거리 로켓도 발사하지 않았고 핵실험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강하게 이야기할 하등의 상황적 근거는 없습니다.
게다가 이번 성명에서 8.25 합의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8.25 합의를 이뤄낸 것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어떤 식으로 이 합의를 풀어나갈지에 대해 한-미 정상회담에서 후속 이야기를 해줘야 하는데, 통일부와 외교부 간 협조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노동당 창건일 열병식에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연설을 했습니다. 이 연설에 대한 반응 역시 성명에는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그냥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하겠다'는 식입니다.
미국 역시 전혀 바꾸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겁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임기 말이라 정책을 바꿀 수 없다는 생각에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전략적 인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을 뿐이지, 사실상 북한을 압박하는 내용으로 가득 찼습니다.
김 제1위원장은 이번 연설에서 핵-경제 병진 노선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인민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경제 발전을 해야 하고, 그러려면 주변 정세를 안정시켜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도 하지 않았습니다.
북한이 이 정도까지 나왔다면 미국과 한국은 "그래 그럼 6자회담 하자. 대신 6자회담 하려면 최소한 너네도 이 정도는 해야 한다"라는 식으로 문턱을 좀 낮춰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성명을 보면 북한을 6자회담 테이블로 끌어내려는 것보다는, 오히려 북한이 6자회담에 나올까 봐 겁이 나서 사전에 조치를 취하려는 것 같아 보입니다. 북한이 6자회담에 나갈 용의가 있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도록 사방에 장벽을 쌓고, 오히려 반발을 유도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계속 평화협정 이야기를 거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북한은 한-미 정상회담 종료 이후 하루가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외무성 성명을 냈는데, 여기에서 '북한에 관한 한-미 공동 성명'에 대한 내용은 일체 언급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평화협정 이야기를 한 것인데, 이는 비핵화 의지를 드러낸 것입니다.
2005년 9.19 공동성명에서 북한과 미국은 비핵화와 평화협정을 맞바꾸기로 했었습니다. 비핵화에 대한 대가로 미-북 수교와 일-북 수교를 하기로 했는데, 미-북이 수교하려면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합니다. 전쟁 상태를 끝내지 않고 수교할 수 없지 않습니까?
2006년 북한의 1차 핵실험 이후 2007년 2.13합의가 나오기 전에, 미국과 북한은 2006년 11월 사전 합의의 틀을 마련했습니다. 미국과 북한이 판을 짜놓고 6자회담의 나머지 국가들에게 사후 승인을 받는 식이었습니다.
북한은 이번에도 평화협정 문제를 우선순위로 해서 미-북 간 협상을 해보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이는 2009년 오바마 정부 1기 때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이 1년 동안 노래를 부르고 다녔던 방법입니다. 힐러리는 북한이 비핵화를 실행할 용의가 있다면 미-북 수교와 평화협정 문제 논의를 우선적으로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최근 북한의 메시지는 바로 이때로 돌아가자는 겁니다. 핵이라는 단어는 쓰지 않고 있지만 6자회담 하자는 이야기입니다. 마치 한-미 공동 성명이 6자회담 이야기를 일체 하지 않으면서도 6자회담에서 논의돼야 할 문제인 핵 문제에 대해 굉장히 강하게 북한을 압박해 들어가듯이, 북한 역시 이런 식으로 6자회담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겁니다.
문제는 미국과 우리가 이 행간의 뜻을 읽어주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한-미가 이렇게 세게 나갔는데, 북한이 이렇게 나온 것은 6자회담을 하겠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6자회담 추진 쪽으로 정책 방향을 틀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자각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 박근혜 정부에서 가능할지는 의문입니다.
북한은 미국과 만나서 평화협정을 논의하고 비핵화로 가겠다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이것 없이 김 제1위원장이 연설에서 밝힌 주변 환경이 안정되기 힘들고, 그러면 경제 발전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북한 내부의 이같은 절박한 필요 때문에 북한은 미국과도, 남한과도 관계를 개선하고 싶어 합니다. 여기에 우리가 맞장구를 쳐줄지는 미지수입니다.
프레시안 : 6자회담이 의미가 있으려면 미-북 간 사전 밑그림이 있어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현재 오바마 정부는 그럴 겨를이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임기가 채 1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는데요.
정세현 : 그런 측면도 있지만 부시 정부도 임기 말을 코앞에 두고 2.13 합의를 만들어냈습니다. 이어 집권한 오바마 정부에서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부시 정부 때 만들었던 9.19 공동성명의 틀 안에서 북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내년 대선에서 누가 대통령이 될지 모르겠지만 정권이 바뀐다고 해도 정책의 연속성은 가져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한편으로 오바마 대통령은 갚아야 할 '외상'이 있습니다. 2009년 핵무기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연설로 노벨 평화상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럼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최소한의 디딤돌이라도 놓고 가야 평화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겁니다. 북핵 문제 해결의 좁은 문이라도 열어놓고 나가야지, 안 그러면 노벨 평화상 반납해야 합니다.
프레시안 : 오바마 대통령을 움직이려면 남한이 움직여야 할 필요도 있지 않을까요?
정세현 : 이번 회담에서 박 대통령이 오바마 대통령에게 계속 이야기했어야 합니다. "북한의 핵 능력과 미사일 능력이 고도화되는 것 미국이 더 잘 알고 있지 않냐, 그대로 두면 우리는 어떻게되냐, 미국이야 북핵이 늘어나도 걱정할 건 없지만 우리는 북핵 능력이 높아지면 그만큼 국민들의 불안감이 커지는 절박한 상황이다"라고 호소했어야 합니다.
북한이 핵 폐기 의지를 표현하는 수준에서 6자회담을 시작하도록 문턱을 낮추자고 미국에 제안하고 설득하는 작업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과 철 지난 성명만 발표하고 온 겁니다.
이산가족 이후 남북관계는?
프레시안 : 우려했던 이산가족 상봉이 예정대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대로면 이번 상봉은 무난히 치러질 것 같은데요. 상봉 이후 남북관계는 어떻게 될까요?
정세현 : 북한은 이번 상봉을 무사히 끝내고 8.25 합의에서 약속했던 남북 당국회담을 어떻게 해서든지 살려보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남북 당국회담이 돼야 미국과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북한은 뉴욕 채널 통해 혹시라도 미국이 자신들의 제안에 호응해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은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남한도 별다른 반응이 없고 미국도 호응이 없다면 북한은 남한과 대화도 하지 않은 채 악을 쓰고 나설 것입니다.
따라서 남한이 8.25 합의에 근거한 당국 회담을 공식적이고 공개적으로 북한에 제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북한이 한-미 공동성명에도 불구하고 평화협정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분명 남한, 미국과 대화 의지가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당국 회담을 제안해서 남북, 미-북 대화가 같이 가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남북관계 개선과 북핵 문제 해결을 동시에 추진해야 합니다.
실제 이 시나리오가 실현될 수 있도록 임기가 2년 남은 박근혜 정부가 임기 1년이 남은 오바마 정부를 끌고 가야 합니다. 오바마 정부 임기가 1년밖에 남지 않았는데 뭘 할 수 있겠느냐는 인식이 아니라, 이렇게라도 만들어 놓으면 다음 정부가 최소한 북핵문제 해결의 문은 열린 상태에서 집권할 수 있다는 점을 자각해야 합니다.
통일부는 이런 분위기를 만들고 실제 실행하는데 노력해야 합니다. 세계 평화회의 같은 학술행사를 할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남북문제, 북핵 문제 해결에 힘을 써야 합니다. 한반도 평화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면서 무슨 세계 평화를 논하고 있는 겁니까?
예전에 남북 대화가 한창일 때, 1년에 서른 번 이상 회담을 했을 때는 회담 사무국 예산이 모자라서 정책실, 교육원 등등에서 가져다 쓴 적도 있습니다. 통일부가 세계평화회의를 한다는 걸 보니, 예산에서 불용액 남기지 않으려고 그런 것 같은데, 예산을 거기에 쓸 것이 아니라 당국회담을 열어서 실제적인 남북관계 개선과 북핵문제 해결에 써야 합니다.
프레시안 : 그런데 북한은 여전히 이산가족 상봉을 부담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상봉 정례화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북한이 여기에 호응하기는 쉽지 않아 보이는데요.
정세현 : 20일부터 시작된 1차 이산가족 상봉 인원을 보면, 남한은 389명인데 비해 북한은 141명입니다. 총 96가족 만남에 141명이 나왔다는 이야기는 동반하는 가족이 없이 혼자 오는 사람이 적어도 절반은 된다는 뜻입니다. 북한이 이산가족 상봉 사업을 굉장히 어려운 일로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고 북쪽 가족들이 남쪽 가족을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민들의 생사를 확인하는 것이 북한의 행정력으로는 쉽지 않고, 또 설사 만나고 싶어한다고 해도 북한은 아무나 내보내지는 않습니다. 내보낼 수 있는 상태가 돼야 명단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상봉 대상자의 건강 상태가 나쁜 경우 북한은 절대 내보내지 않습니다. 상봉 나가는 가족들 옷도 따로 준비해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남한의 대북 지원이 없지 않았습니까? 없는 돈 모아서 억지로 상봉을 준비하는 것이라 북한은 반대급부가 없다면 정기적인 상봉은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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