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릴라칼럼] 촛불의 시대, 기업인들의 자발적 커밍아웃.. 본색이 드러난다
[오마이뉴스 글:하성태, 편집:김지현]
"여러분이 시위할 때 다른 4900만 명은 무엇인가 하고 있다."
참으로 논쟁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다. 난세에 영웅이 나는 법이라고 했지만, 그 난세가 또 여러 사람을 풍랑에 휩쓸리게도 하는 법이다. 특히나 가벼운 말이 그 풍랑을 거대한 파도로, 태풍으로 만들기도 한다.
22일 논란이 된 자라코리아 이봉진 사장의 저 발언이 딱 그런 꼴이다. 발단은 21일 트위터 상에 이봉진 사장이 최근 한 강연에서 서울 광화문광장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번지고 있는 '촛불 집회'를 두고 한 말이 전해지면서다. 최초로 문제를 제기한 트위터 사용자(@hyun***)가 연이어 적은 관련 글의 내용은 이렇다.
"자라코리아 이봉진 사장이 특강 왔는데 '여러분이 시위 나가 있을 때 참여 안 한 4900만명은 뭔가를 하고 있어요. 여러분의 미래는 여러분이 책임져야 합니다'라고 했음. 시위 참여한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하는 건가?? 우리 미래를 바꾸려고 우리가 시위에 참여하는 건데."
"그리고 패션산업의 변화라는 주제로 자라 자랑을 하고 있다. 네... 자라가 바라는 인재상, '두 팔 두 다리 튼튼한'에서 저는 강의 헛들었다는 생각이네요."
"그는 트럼프가 대통령이 당선된 것, 정치가 여러분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여러분은 공부만 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어떤 상황이나 위치에서도 감정과 분위기에 휩쓸리지 마세요."
▲ 지난 19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광화문에서, 전국으로! 박근혜는 즉각 퇴진하라 전국동시다발 4차 박근혜 퇴진 범국민행동'에 참석한 수많은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박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
ⓒ 사진공동취재단 |
그런데, 이후 이봉진 사장이 쓴 해명글이 다시 공개되면서 파장이 커졌다. 이 사용자는 22일 오전 1시께, 이봉진 사장이 직접 트위터 쪽지 글(DM, 다이렉트 메시지)을 보내왔다면서, 그 전문을 공개했다.
그는 "충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는 발언이었고 해명을 해주셨습니다. 하지만 장애인 배제에 관련한 부분에 대한 말씀이 없으셔서 따로 질문을 드렸고 회사 내의 장애인 채용, 그리고 직원들의 복지에 관련 질문 드렸습니다"라며 이 사장의 글을 게재했다. 이 트위터 사용자에 따르면, 이 사장은 "오해나 의혹이 있으시다면, 제게 언제든 연락을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며 정중한 장문의 글을 남겼다.
"그러나, 지금 올리신 글처럼, 제가 마치 집회 참여하는 것을 비하하는 것은 아니었음을 분명히 밝혀 드립니다. 저 역시 지금의 저 정치 상황이 매우 부당하고 우리 모두에게 불행한 사태이며 이번 같은 일이 반드시 명명백백하게 진실이 밝혀져야 하며, 정의가 바로 잡혀야 하며 이를 위한 집회나 국민운동은 정당하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잡히기 위해서 모두가 최선을 다해 목소리를 맞추어야 한다고 봅니다.
또한, 그러나, 우리는 각자 자기 위치에서, 직장인은 본인의 일을, 회사는 자신의 사업을, 그리고 학생은 자기 자신의 공부에 최선을 다해 주어야 하며, 그래야만이, 각자의 미래를 더 나아지게 바꾸어 갈 수 있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저는 집회에 참여한 분들이 백만 명이지만, 나머지 4900만 명은 같은 시간대에 각자의 사정에 따라서 또는 취향에 따라서 집회에 참여하지 않고 각자 자기 위치에서 일을 하고 있거나 공부를 하고 있거나 놀러가거나 잠을 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을 테지만,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 어떤 위치에서도 감정이나 분위기에 지나치게 휩쓸리지 말고, 각자 자기가 맡은 본업을 잘 유지해주어야만 하며, 학생은 자기의 본업인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을 잊지 말고 다시 강조하여 드렸던 것이 제 취지입니다."
이봉진 사장은 "제 표현 방식과 단어의 사용이 적절치 않거나 그런 표현들로 인해서, 여전히 제 의도와 취지에 대해서 오해나 의혹이 있으시다면, 제게 언제든 연락을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덧붙였다. 미안하지만, 번지수가 틀렸다. 표현이나 단어 사용의 적절함이 문제가 아니다.
그저 이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시민들의 촛불집회를 바라보는 이 사장의 관점 자체가 작금의 현실과는 아주 멀리 동떨어져 있다. 그게 문제다. 국가 기반을 뒤흔든 국정농단을 저지른 범죄 세력에 분노하고 그를 규탄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광장에 나간 국민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그 어떤 위치에서도 감정이나 분위기에 지나치게 휩쓸리지 말고", 그저 본업에 충실하라고 충고할 수 있는 이 사장의 자리는 과연 어떤 위치인가. 그 발언이 자신의 회사인 자라코리아 노동자들에게는 과연 납득될 수 있는 발언이라 생각한 것은 아닌가.
기업인들의 자발적 커밍아웃, 차라리 고맙다
신기한 건 이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기득권층이 자처하고 숙성시켜온 이 난세(?)에 자신의 평소 신념을 커밍아웃하는 이들이 하나둘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대통령이 여자 하나 잘못 쓸 수도 있지, 하야하라 탄핵하라 등 대한민국이 좌파의 최면에 걸려 미쳐 날뛰고 있다."
김영식 천호식품 회장이 자신이 운영하는 온라인 커뮤니티 '뚝심이 있어야 부자된다'에 게재한 글 중 일부다. 김 회장은 보수단체인 '부정부패추방시민연합회(부추연)'가 만든 촛불집회 비난 동영상을 게재했고, 지난 주말 이후 여론의 비난이 거세지자 "국민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린 점 고개 숙여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며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다"라는 내용의 사과문을 올렸다.
하지만 성난 여론은 식을 줄 모르고 있다. 지난 19일, 다음 아고라에는 '촛불집회 비난한 천호식품 불매운동 동참해 주세요'라는 청원이 올라왔고, 22일 오후까지 4000명이 넘는 인원이 청원에 동참했다.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한 불매운동 역시 확산 조짐을 보인다. 19일 이후 연일 포털 실시간 검색어를 장식한 천호식품과 김영식 회장의 발언은 자라코리아 이봉진 회장의 강연 발언으로 인해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비단 성난 민심이 비난할 곳을 찾아다니는 걸까. 그렇지 않다. 이제 우리 기업들도 자신들의 철학과 가치를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 이러한 김 회장과 이 사장의 커밍아웃이 반가운 이유이기도 하다.
▲ 박근혜-최순실 일당 전원 구속 촉구하며 촛불 밝히는 시민들 19일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광화문에서, 전국으로! 박근혜는 즉각 퇴진하라 전국동시다발 4차 박근혜 퇴진 범국민행동'에 참석한 시민들이 박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며 촛불을 밝히고 있다. |
ⓒ 유성호 |
단순히, 정치 성향의 차이라면 소비자들의 선택에 맡기면 된다. 하지만 과격하고 단순한 막말로 "좌파의 최면" 운운한 김 회장과 달리 이 사장의 발언은 좀 더 교묘하고 질이 나쁘다. 그의 발언은 그 자체로 100만과 4900만의 국민을 나누고, 경계 짓고, 그 사이의 경쟁을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강연에 참여한 학생들에게 "공부" 운운한 것이 대표적이다. 기성세대로서, 기업주로서, 경제인으로서 공포심을 조장한 것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자발적인 '커밍아웃'이야말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가져다 준 선물일지도 모른다. 정치인이나 기업인, 그러니까 이 사회기득권층이 과연 이 난국을, 이 국정혼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평가하는지에 따라 국민들이, 소비자들이 그들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을 자연스레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천호식품 김영식 회장과 자라코리아 이봉진 사장 모두 자발적으로 글을 쓰고 발언을 한 것 아닌가. 적극적으로 환영한다. 정치인, 기업인, 사회지도층의 이러한 자발적인 정치적 커밍아웃을. 난세에 영웅이 나듯, 난세에 옥석이 가려지는 법이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