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께.
안녕하세요? 추석 잘 보내셨는지요? 얽히고설켜 돌아가는 나라 일을 살피느라 쉴 틈을 내지 못하셨을 텐데, 명절 동안이나마 몸과 마음의 피로를 푸셨길 바랍니다.
저는 이주노동자인 탓에, 벌써 10년 넘게 외국에서 한가위를 맞고 있습니다. 전화로 한국에 계신 부모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 아쉬운 마음을 달래야 했습니다. 나라에 대한 근심이야 어디 대통령만 하겠습니까만, 소중한 가족과 친구가 있는 한국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국정으로 바쁘신 만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혹시 '헬조선'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아무리 힘들어도 그렇지, 조국을 '지옥'에 빗댈 수 있느냐고 꾸짖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듣기에도 아름다운 말은 아닙니다만, 우리 청년들 눈에 비친 한국의 모습을 숨김없이 표현해주는 말입니다.
소수 젊은이들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냐고 반문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겠습니다만, 종편방송 JTBC가 발표한 여론조사는 이게 일부의 문제가 아님을 말해줍니다. 조사 대상자 가운데 무려 88%가 '이민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고 답했기 때문입니다. 이국의 삶을 동경해서가 아닙니다. '한국이 싫어서' 탈출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10명 중 9명이 환멸을 느끼는 나라, 한국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응답자 가운데 90%가 '2040세대'라 불리는 젊은 사람들이었다는 점입니다. 앞으로 30년 동안 한국을 이끌어 갈 젊은 세대 10명 중 9명이 삶에 환멸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떠나려는 까닭은 나약해서나, 경쟁에서 밀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지난 4월 <조선일보>는 대기업에 다니는 '고학력 엘리트 젊은이'들이 한국을 떠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과거에는 미국 이민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이제는 높은 복지와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는 노르웨이·덴마크·스웨덴·핀란드 등 북유럽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이민 희망지로 북유럽이 급부상하고 있다. 소위 좋은 대학 나와 괜찮은 직장에 다니는 20, 30대 젊은 층이 전면에 나서는 점도 특징이다. 이들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땅'을 찾고 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무한경쟁의 압박은 날로 거세지고, 뼈 빠지게 일해도 서울 시내에 아파트 한 채 사기 어려운 데다, 이런 상황이 나아질 것이란 기대도 갖기 어렵다. 이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것이다." - "북유럽 가서 살겠다는 30代들… 前직장 알아보니 삼성·LG 많더라" 2015. 4. 18.
잘 아시겠습니다만, 한국사회는 낮은 출산율, 높은 자살률, 빠른 고령화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이미 노령화 속도는 일본을 넘어 세계 1위가 되었고, 30년 뒤인 2045년에는 노동인구 평균 연령이 50세가 됩니다. 머잖아 세계 최고의 노령사회가 되는 것이지요. 이민으로 빠져나갈 젊은이들을 고려하지 않은 수치가 이렇습니다.
게다가 현재 80세인 한국인의 기대수명이 30년 후에는 90세에 달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저출산과 이민으로 경제활동의 중추인 젊은이들이 사라지고, 생계를 국가보조에 의존해야 하는 노년층이 폭증한다는 것이 국가 경제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는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시리라 믿습니다.
일할 사람들이 사라져 세수입이 줄어들고, 이로 인해 정상적 국가운영이 어렵게 되는 것은 우려할 일이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국민들 삶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고 불행하다는 점입니다. 국가의 역할은 존속 그 자체가 아니라, 국민들의 안전과 행복을 보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임금피크제', 이미 이명박 때 실패한 정책
한국 청년들이 고통 받는 가장 첫 번째 이유는 일자리 때문입니다. 청년 취업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에 '노동개혁'을 추진하는 게 아니냐고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청년들에게는 양질의 일자리가 필요합니다. '양질의 일자리'란 일한 만큼 보상받는 임금체계와 10년, 20년을 내다볼 수 있는 안정적 직장입니다. '임금피크제'라는 이름으로 임금을 깎고, '해고 요건 완화'라는 이름으로 고용 불안을 제도화하는 것이 청년들을 돕는 일일 수 없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9년부터 '일자리 나누기'라는 이름으로 임금을 깎았습니다. 그것도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사회초년생들의 초임을 깎았지요. 기존 직원의 임금조정은 노사가 합의해야 한다는 헌법조항 때문에 정부가 강제 개입할 수 없기에, 불가피하게 초봉을 깎는다고 했습니다. 현 정부는 법에 아랑곳하지 않고, 기존 직원들의 임금을 손보겠다고 나섰습니다.
'임금피크제'로 14,15만 개의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현 정부의 주장입니다. 지난 정부는 더 '화끈한' 전망을 내놓았지요. 300만 개 일자리를 약속했던 이명박 정부는, 초임을 깎아 20만 개 이상의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고 장담했었습니다. 정부가 노동자 임금을 깎던 바로 그 해, 기업들에는 '법인세 인하'라는 돈다발을 안겼습니다.
인건비 부담도 줄여주고 세금까지 깎아줬으니, 약속대로 청년 고용이 대폭 늘었을까요? 놀랍게도 일자리는 오히려 줄었습니다. '일자리 나누기'가 시작된 2009년, 청년고용률은 40.5%로, 2008년보다 1.1%포인트 감소했습니다. 임기가 끝나던 2012년에는 40.4%로 떨어졌지요. 이처럼 잘못된 정책으로 청년들은 임금이 줄고 일자리까지 잃는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청년고용률이 곤두박질친 2009~2012년 사이에 10대 그룹의 사내유보금은 271조에서 457조로 1.7배 늘었습니다. 현 정부는 어떻습니까? 이명박 정부의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책을 받들어 법인세를 지속적으로 감면해 준 탓에, 2015년에는 사내유보금이 600조를 돌파해, 6년 전에 비해 2.2배 이상 늘었습니다.
만일 기업의 여유자금이 늘수록 고용도 늘어난다면, 사내유보금이 2배 이상 폭등한 기간 동안 청년고용도 가파르게 치솟았어야 합니다. 하지만 대통령 집권 후 2013~2014년 청년고용률 평균은 40.2%로, '고용지옥'이었던 이명박 정부의 청년 평균 고용률 40.7%보다도 열악합니다. 임기가 절반이나 남은 시점에서 섣부른 비교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가 보장된 정책을 따라하는 어리석음을 피하라고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남의 자리 빼앗지 않고도 일자리 만들 수 있습니다
기업 세금감면, 탈규제, 임금삭감이 일자리를 만들어 준다면, 지금쯤 국민들은 일자리 걱정을 하고 있지 않아야 정상입니다. 하지만 '친기업' 정책이 강화되어 기업이 부자가 될 수록 일자리는 줄었고, 질은 더욱 나빠졌습니다. 한국 기업들의 사내유보금이 사상 최대를 기록했던 지난 1년 사이(2014-2015 3월 기준) 비정규직 비율이 37.3%에서 39.5%로 느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기업들이 늘어난 돈으로 투자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한국 전체 상장사들의 당기순이익은 2008년 39조 원에서 2014년 84조 원으로 두 배 이상 늘었지만, 투자는 오히려 0.2% 감소했습니다. '부자 기업, 가난한 국민'으로 요약할 수 있는 현 상황은 한 가지 사실을 말해줍니다. 단기적으로는 법인세 인하 폐지를 통해 '생활임금'처럼 청년들의 최저생계를 보장하는 정책을 도입하고, 장기적으로는 규제를 통해 기업들이 이익을 생산투자에 쓰도록 유도함으로써 고용을 늘리는 선순환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대통령의 선의를 믿습니다. 청년들에게 '중동에 가라'는 제안을 하신 것이나, 중년 직장인의 임금을 줄이고 해고하기 쉽게 만들어 청년들의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발상은 분명히 그들을 염려하는 마음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앞에서 말씀 드렸듯, 그런다고 일자리가 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머잖아 중년이 될 청년의 미래에 저임금과 고용불안의 지뢰를 놓는 결과만 낳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안이 있느냐고요? 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미국의 고용정책이 좋은 본보기라고 생각합니다. 오바마 정부는 지난 2년간 무려 6백만 개가 넘는 새 일자리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는 미국에서 15년 만에 거둔 최고의 성적입니다. 미국 인구가 한국의 6배라는 사실을 감안해도, 한국 기준으로 2년 동안 100만 개를 만들어 낸 셈입니다. 올해 1월부터 5월까지 미국에 새로 추가된 일자리만도 100만 개를 훌쩍 넘어섭니다.
오바마는 기존 취업자의 임금을 깎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최저임금을 대폭 올리기 위해 의회와 싸우기까지 했지요. 현재 연방법으로 정해진 7.25달러(약 8700원)를 10.10달러(약 1만 2천 원)로 올리겠다는 것입니다. 오바마는 지난 1월 국정연설에서 "만일 최저임금 인상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돈으로 한 번 살아보라"고 말해 열렬한 기립박수를 받았습니다.
노동자들의 임금을 인상하는 것은 내수시장을 가장 빠르게 활성화하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서민들은 임금인상분을 즉시 구매에 쓰기 때문입니다. 반면, 부자들은 추가 수입을 상품이나 서비스 구입에 쓰기보다 비축하거나 투기에 사용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한국 내수시장의 침체가 부유층 감세, 실질임금 상승률 하락과 더불어 나타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 임금을 줄이는 것은 내수경제를 더욱 깊은 침체의 늪으로 던져 넣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노조는 경제발전의 적이 아닙니다
오바마는 노조와 싸워가며 해고를 쉽게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오바마는 작년 9월, 위스콘신주의 노조원과 가족들을 만났습니다. 위스콘신주는 '강성노조'로 이름 높은 곳이기도 하지요. 그는 6000여 명의 노조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 말을 해서 우레와 같은 갈채를 받았습니다.
"만일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좋은 일자리를 찾는다면, 노조에 가입할 것입니다."
그는 생산직뿐 아니라 서비스 종사자에게도 노조가입을 권했습니다. "만일 내가 서비스직에서 열심히 일하며 정당한 대가를 받기 원한다면, 노조에 가입할 것입니다." 실제로, 미국의 공공노조 가입률은 35.7%에 달하고, 교사, 집배원, 소방대원은 물론, 경찰까지도 노조를 결성합니다. 오바마의 노조관은 한국 대통령이나 유력 정치지도자들과 극적으로 대비됩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과거에 인도의 대졸 노동자들이 자부심이 있어서 '우리는 노동자가 아니'라며, 초과근무 수당을 거절하고, 노조도 만들지 않는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얼마 전에는 유력한 대선주자로 꼽히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노조가 쇠파이프 안 휘둘렀으면 소득 3만불 됐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지요.
사람들이 선망하는 살기 좋은 나라치고, 노조를 적대시하는 곳은 없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중 노조조직률이 한 자릿수(9.9%)인 나라는 한국이 유일합니다. 한국 젊은이들이 이민가고 싶어 하는 북유럽 국가들의 노조조직률을 보면, 덴마크가 67%, 핀란드 69%, 노르웨이 53%, 스웨덴이 68%입니다. 이 나라 사람들이 자부심이 없어서 일까요?
만일 노조가 경제의 적이라면, 노조가입률이 사상 최저인 현재 한국 경제는 활황을 기록해야 할 텐데, 상황은 오히려 반대입니다. 노조는 경제성장의 적이 아니라 동반자이기 때문입니다. 노조는 안정적 일자리를 도모해 두터운 중산층을 만들어 국가경제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은 제 주장이 아니라, 국제금융기구(IMF)의 분석입니다. 1997, 1998년 노동유연화의 선봉에 서서 한국 노동자를 해고의 늪으로 몰아넣었던 그 공포의 '아이엠에프'가 이런 뒤늦은 고백을 하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심지어 경영주들이 즐겨 읽는 경제지인 <포브스>나, 중도일간지인 <뉴욕타임스>, <로스앤젤레스타임스> 등도 노조가 와해될수록 한 나라의 소득 불균형이 심화된다고 경고합니다. 이는 고루 잘 사는 북유럽 국가의 노조 조직률이 높은 이유와, 고루 잘 사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노조에 반감을 갖는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그렇다면 미국은 어떻게 해서 성공적으로 일자리를 만들어 냈을까요? 아쉽지만 글이 길어져 두 번째 편지에서 말씀 드려야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인사드릴 때까지 건강하십시오.
낯선 땅에서
강인규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추석 잘 보내셨는지요? 얽히고설켜 돌아가는 나라 일을 살피느라 쉴 틈을 내지 못하셨을 텐데, 명절 동안이나마 몸과 마음의 피로를 푸셨길 바랍니다.
저는 이주노동자인 탓에, 벌써 10년 넘게 외국에서 한가위를 맞고 있습니다. 전화로 한국에 계신 부모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 아쉬운 마음을 달래야 했습니다. 나라에 대한 근심이야 어디 대통령만 하겠습니까만, 소중한 가족과 친구가 있는 한국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국정으로 바쁘신 만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혹시 '헬조선'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아무리 힘들어도 그렇지, 조국을 '지옥'에 빗댈 수 있느냐고 꾸짖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듣기에도 아름다운 말은 아닙니다만, 우리 청년들 눈에 비친 한국의 모습을 숨김없이 표현해주는 말입니다.
소수 젊은이들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냐고 반문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겠습니다만, 종편방송 JTBC가 발표한 여론조사는 이게 일부의 문제가 아님을 말해줍니다. 조사 대상자 가운데 무려 88%가 '이민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고 답했기 때문입니다. 이국의 삶을 동경해서가 아닙니다. '한국이 싫어서' 탈출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10명 중 9명이 환멸을 느끼는 나라, 한국
▲ 2005-2014년 청년 고용동향 '비즈니스프렌들리'를 표방한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청년 고용률은 떨어지고, 실업률은 늘었습니다. '일자리나누기'를 한다며 임금을 깎은 후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청년 실업률은 박근혜 정부 들어서 사상 최고를 기록했습니다. | |
ⓒ 통계청 |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응답자 가운데 90%가 '2040세대'라 불리는 젊은 사람들이었다는 점입니다. 앞으로 30년 동안 한국을 이끌어 갈 젊은 세대 10명 중 9명이 삶에 환멸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떠나려는 까닭은 나약해서나, 경쟁에서 밀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지난 4월 <조선일보>는 대기업에 다니는 '고학력 엘리트 젊은이'들이 한국을 떠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과거에는 미국 이민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이제는 높은 복지와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는 노르웨이·덴마크·스웨덴·핀란드 등 북유럽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이민 희망지로 북유럽이 급부상하고 있다. 소위 좋은 대학 나와 괜찮은 직장에 다니는 20, 30대 젊은 층이 전면에 나서는 점도 특징이다. 이들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땅'을 찾고 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무한경쟁의 압박은 날로 거세지고, 뼈 빠지게 일해도 서울 시내에 아파트 한 채 사기 어려운 데다, 이런 상황이 나아질 것이란 기대도 갖기 어렵다. 이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것이다." - "북유럽 가서 살겠다는 30代들… 前직장 알아보니 삼성·LG 많더라" 2015. 4. 18.
잘 아시겠습니다만, 한국사회는 낮은 출산율, 높은 자살률, 빠른 고령화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이미 노령화 속도는 일본을 넘어 세계 1위가 되었고, 30년 뒤인 2045년에는 노동인구 평균 연령이 50세가 됩니다. 머잖아 세계 최고의 노령사회가 되는 것이지요. 이민으로 빠져나갈 젊은이들을 고려하지 않은 수치가 이렇습니다.
게다가 현재 80세인 한국인의 기대수명이 30년 후에는 90세에 달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저출산과 이민으로 경제활동의 중추인 젊은이들이 사라지고, 생계를 국가보조에 의존해야 하는 노년층이 폭증한다는 것이 국가 경제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는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시리라 믿습니다.
일할 사람들이 사라져 세수입이 줄어들고, 이로 인해 정상적 국가운영이 어렵게 되는 것은 우려할 일이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국민들 삶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고 불행하다는 점입니다. 국가의 역할은 존속 그 자체가 아니라, 국민들의 안전과 행복을 보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임금피크제', 이미 이명박 때 실패한 정책
한국 청년들이 고통 받는 가장 첫 번째 이유는 일자리 때문입니다. 청년 취업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에 '노동개혁'을 추진하는 게 아니냐고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청년들에게는 양질의 일자리가 필요합니다. '양질의 일자리'란 일한 만큼 보상받는 임금체계와 10년, 20년을 내다볼 수 있는 안정적 직장입니다. '임금피크제'라는 이름으로 임금을 깎고, '해고 요건 완화'라는 이름으로 고용 불안을 제도화하는 것이 청년들을 돕는 일일 수 없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9년부터 '일자리 나누기'라는 이름으로 임금을 깎았습니다. 그것도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사회초년생들의 초임을 깎았지요. 기존 직원의 임금조정은 노사가 합의해야 한다는 헌법조항 때문에 정부가 강제 개입할 수 없기에, 불가피하게 초봉을 깎는다고 했습니다. 현 정부는 법에 아랑곳하지 않고, 기존 직원들의 임금을 손보겠다고 나섰습니다.
'임금피크제'로 14,15만 개의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현 정부의 주장입니다. 지난 정부는 더 '화끈한' 전망을 내놓았지요. 300만 개 일자리를 약속했던 이명박 정부는, 초임을 깎아 20만 개 이상의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고 장담했었습니다. 정부가 노동자 임금을 깎던 바로 그 해, 기업들에는 '법인세 인하'라는 돈다발을 안겼습니다.
인건비 부담도 줄여주고 세금까지 깎아줬으니, 약속대로 청년 고용이 대폭 늘었을까요? 놀랍게도 일자리는 오히려 줄었습니다. '일자리 나누기'가 시작된 2009년, 청년고용률은 40.5%로, 2008년보다 1.1%포인트 감소했습니다. 임기가 끝나던 2012년에는 40.4%로 떨어졌지요. 이처럼 잘못된 정책으로 청년들은 임금이 줄고 일자리까지 잃는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청년고용률이 곤두박질친 2009~2012년 사이에 10대 그룹의 사내유보금은 271조에서 457조로 1.7배 늘었습니다. 현 정부는 어떻습니까? 이명박 정부의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책을 받들어 법인세를 지속적으로 감면해 준 탓에, 2015년에는 사내유보금이 600조를 돌파해, 6년 전에 비해 2.2배 이상 늘었습니다.
만일 기업의 여유자금이 늘수록 고용도 늘어난다면, 사내유보금이 2배 이상 폭등한 기간 동안 청년고용도 가파르게 치솟았어야 합니다. 하지만 대통령 집권 후 2013~2014년 청년고용률 평균은 40.2%로, '고용지옥'이었던 이명박 정부의 청년 평균 고용률 40.7%보다도 열악합니다. 임기가 절반이나 남은 시점에서 섣부른 비교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가 보장된 정책을 따라하는 어리석음을 피하라고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남의 자리 빼앗지 않고도 일자리 만들 수 있습니다
기업 세금감면, 탈규제, 임금삭감이 일자리를 만들어 준다면, 지금쯤 국민들은 일자리 걱정을 하고 있지 않아야 정상입니다. 하지만 '친기업' 정책이 강화되어 기업이 부자가 될 수록 일자리는 줄었고, 질은 더욱 나빠졌습니다. 한국 기업들의 사내유보금이 사상 최대를 기록했던 지난 1년 사이(2014-2015 3월 기준) 비정규직 비율이 37.3%에서 39.5%로 느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기업들이 늘어난 돈으로 투자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한국 전체 상장사들의 당기순이익은 2008년 39조 원에서 2014년 84조 원으로 두 배 이상 늘었지만, 투자는 오히려 0.2% 감소했습니다. '부자 기업, 가난한 국민'으로 요약할 수 있는 현 상황은 한 가지 사실을 말해줍니다. 단기적으로는 법인세 인하 폐지를 통해 '생활임금'처럼 청년들의 최저생계를 보장하는 정책을 도입하고, 장기적으로는 규제를 통해 기업들이 이익을 생산투자에 쓰도록 유도함으로써 고용을 늘리는 선순환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대통령의 선의를 믿습니다. 청년들에게 '중동에 가라'는 제안을 하신 것이나, 중년 직장인의 임금을 줄이고 해고하기 쉽게 만들어 청년들의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발상은 분명히 그들을 염려하는 마음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앞에서 말씀 드렸듯, 그런다고 일자리가 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머잖아 중년이 될 청년의 미래에 저임금과 고용불안의 지뢰를 놓는 결과만 낳게 될 것입니다.
▲ 노조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오바마 대통령 2014년 9월, 오바마는 노조원과 가족들을 만난 자리에서 '안정적 일자리를 원한다면 노조에 가입하라'고 권했습니다. 노조는 노동환경을 개선하고 일자리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비윤리적 기업활동을 고발하는 내부감시자의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 |
ⓒ White House |
그렇다면 대안이 있느냐고요? 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미국의 고용정책이 좋은 본보기라고 생각합니다. 오바마 정부는 지난 2년간 무려 6백만 개가 넘는 새 일자리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는 미국에서 15년 만에 거둔 최고의 성적입니다. 미국 인구가 한국의 6배라는 사실을 감안해도, 한국 기준으로 2년 동안 100만 개를 만들어 낸 셈입니다. 올해 1월부터 5월까지 미국에 새로 추가된 일자리만도 100만 개를 훌쩍 넘어섭니다.
오바마는 기존 취업자의 임금을 깎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최저임금을 대폭 올리기 위해 의회와 싸우기까지 했지요. 현재 연방법으로 정해진 7.25달러(약 8700원)를 10.10달러(약 1만 2천 원)로 올리겠다는 것입니다. 오바마는 지난 1월 국정연설에서 "만일 최저임금 인상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돈으로 한 번 살아보라"고 말해 열렬한 기립박수를 받았습니다.
노동자들의 임금을 인상하는 것은 내수시장을 가장 빠르게 활성화하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서민들은 임금인상분을 즉시 구매에 쓰기 때문입니다. 반면, 부자들은 추가 수입을 상품이나 서비스 구입에 쓰기보다 비축하거나 투기에 사용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한국 내수시장의 침체가 부유층 감세, 실질임금 상승률 하락과 더불어 나타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 임금을 줄이는 것은 내수경제를 더욱 깊은 침체의 늪으로 던져 넣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노조는 경제발전의 적이 아닙니다
▲ 노조 와해가 국가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을 경고하는 보도들 노조는 부의 재분배에 핵심적 역할을 담당합니다. 노조가 무너지면 임금 불균형이 심화되어 중산층이 사라지고, 국가경제는 위기에 처합니다. 정확히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 |
ⓒ 강인규 |
오바마는 노조와 싸워가며 해고를 쉽게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오바마는 작년 9월, 위스콘신주의 노조원과 가족들을 만났습니다. 위스콘신주는 '강성노조'로 이름 높은 곳이기도 하지요. 그는 6000여 명의 노조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 말을 해서 우레와 같은 갈채를 받았습니다.
"만일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좋은 일자리를 찾는다면, 노조에 가입할 것입니다."
그는 생산직뿐 아니라 서비스 종사자에게도 노조가입을 권했습니다. "만일 내가 서비스직에서 열심히 일하며 정당한 대가를 받기 원한다면, 노조에 가입할 것입니다." 실제로, 미국의 공공노조 가입률은 35.7%에 달하고, 교사, 집배원, 소방대원은 물론, 경찰까지도 노조를 결성합니다. 오바마의 노조관은 한국 대통령이나 유력 정치지도자들과 극적으로 대비됩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과거에 인도의 대졸 노동자들이 자부심이 있어서 '우리는 노동자가 아니'라며, 초과근무 수당을 거절하고, 노조도 만들지 않는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얼마 전에는 유력한 대선주자로 꼽히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노조가 쇠파이프 안 휘둘렀으면 소득 3만불 됐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지요.
사람들이 선망하는 살기 좋은 나라치고, 노조를 적대시하는 곳은 없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중 노조조직률이 한 자릿수(9.9%)인 나라는 한국이 유일합니다. 한국 젊은이들이 이민가고 싶어 하는 북유럽 국가들의 노조조직률을 보면, 덴마크가 67%, 핀란드 69%, 노르웨이 53%, 스웨덴이 68%입니다. 이 나라 사람들이 자부심이 없어서 일까요?
만일 노조가 경제의 적이라면, 노조가입률이 사상 최저인 현재 한국 경제는 활황을 기록해야 할 텐데, 상황은 오히려 반대입니다. 노조는 경제성장의 적이 아니라 동반자이기 때문입니다. 노조는 안정적 일자리를 도모해 두터운 중산층을 만들어 국가경제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은 제 주장이 아니라, 국제금융기구(IMF)의 분석입니다. 1997, 1998년 노동유연화의 선봉에 서서 한국 노동자를 해고의 늪으로 몰아넣었던 그 공포의 '아이엠에프'가 이런 뒤늦은 고백을 하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심지어 경영주들이 즐겨 읽는 경제지인 <포브스>나, 중도일간지인 <뉴욕타임스>, <로스앤젤레스타임스> 등도 노조가 와해될수록 한 나라의 소득 불균형이 심화된다고 경고합니다. 이는 고루 잘 사는 북유럽 국가의 노조 조직률이 높은 이유와, 고루 잘 사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노조에 반감을 갖는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그렇다면 미국은 어떻게 해서 성공적으로 일자리를 만들어 냈을까요? 아쉽지만 글이 길어져 두 번째 편지에서 말씀 드려야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인사드릴 때까지 건강하십시오.
낯선 땅에서
강인규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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