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누워서 해도 될까요?”
지금 김형근(55)은 아프다. 그는 채 10분을 앉아 있지 못했다. 간암 4기. 암세포는 간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폐와 신장까지 번져 있다. 병원에서도 손을 쓸 수 없는 말기. 그의 육신은 과학으로 중무장한 현대 의학의 경계를 지났다. 어두워 두려우니 인간이면 누구나 가기를 꺼리되 종내 가야만 하는 곳, 명계(冥界)를 지키는 신을 서양인들은 플루토(명왕성)라고 여겼다. 명왕성을 지난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탐사선 이름이 얄궂다. 뉴호라이즌스(New Horizons), 새로운 지평선.
그가 나고 자란 곳은 전북 김제시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땅. 김제에서 땅은 하늘과 만난다. 인간이 발 디딘 현실과 인간이 불어 올린 꿈이 만나는 곳. 인간의 지평선이다. 광복 이전까지 김제의 곡창은 한반도 사람을 살리지 못하고 군산항을 통해 현해탄 너머 일제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곡창마다 통곡이 가득했던 땅, 김제는 한반도의 새로운 지평선을 잉태해야 마땅한 들판이었다. 그곳에서 김형근은 새로운 지평선을 희망했다, 분단을 부수고 통일의 문을 여는 꿈.
그러나 지금 그는 쓰러지다시피 누워 있다. 병에 시달려 피부를 뚫고 골격이 그대로 드러날 듯한 육체는 설산 고행을 마친 부처의 몸과 같았다. 7월22일 전북 임실군의 한 마을, 초막 같은 농가에서 김형근을 만났다. 이유는 하나. 국가정보원의 ‘민간인 사찰, 불법 해킹 의혹’이 대낮의 태양보다 뜨거웠기 때문이다. 농가 앞을 흐르는 섬진강 물줄기가 바짝 졸아 있었다. 인터뷰는 힘에 부쳤다. 그는 한 번에 두 문장을 말하지 못했다.
7월22일 전북 임실군의 한 농가에서 만난 김형근 전 교사. 암세포가 그의 심성을 침범하지는 못했다. “사람들한테 희망을 줘야 하는데….”
1. “내 직업은 국가보안법 피고인”
“내 것 말고도 그 인터넷 회선에 들어가는 건 다 감시했다. 당시 거의 첩보영화 수준으로 24시간 감시를 당했다. 국가의 역량을 사람을 잡도리하고 감시하는 데 썼다. 유신의 후예, 정보기관의 못된 습성이고 파렴치한 짓이다.”-김형근
2007년 4월14일 전북지방경찰청 보안수사대는 김형근의 집과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그의 휴대전화와 컴퓨터 하드디스크 등을 모조리 가져갔다. 이듬해인 2008년 1월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찬양·고무 등)로 구속됐다. 사건의 발단은 <조선일보> 2006년 12월6일치 기사다. 이 신문은 당시 ‘전교조 교사, 중학생 180명 데리고 비전향 장기수들과 ‘빨치산 추모제’’ ‘행사장엔 과격한 친북·반미 구호 넘쳐’ 등의 표현을 썼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북지부 통일위원장이었던 그를 사실상 ‘빨갱이’로 내몰았다.
문제가 된 행사는 2005년 5월28일 전북 순창군 회문산의 한 청소년수련원에서 열린 ‘남녘통일 애국열사 추모제’. 당시 임실군 관촌중 교사였던 김형근은 학생·학부모 180여 명과 함께 전야제에 참석했다. 학생들은 전야제에서 6·15 공동선언을 외우거나 노래(<서울에서 평양까지>)를 부른 게 전부였다. 친북·반미 구호는 듣지도 외치지도 않았다. 이튿날 본행사에는 아예 참석도 안 했고 등산을 갔다.
1심과 2심에서는 무죄가 선고됐지만 대법원(주심 김용덕 대법관)은 2013년 3월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전주지법으로 돌려보냈다. 같은 해 9월27일 전주지법 형사4부(재판장 강상덕)는 그에게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자격정지 2년을 선고했다. 해당 판결이 나기 이틀 전인 9월25일 김형근은 자신의 인터넷 카페 등에 북한 체제를 찬양·동조하는 글을 올렸다는 혐의로 또다시 구속됐다. 앞서 2012년에는 통일대중당이라는 이적단체를 결성하려고 예비했다는 혐의로 집행유예를 선고받기도 했다. 김형근을 옥죈 것은 단 하나, 보안법 위반 혐의였다. 그는 “서울중앙지법에서 판사가 직업을 묻길래 ‘내 직업은 국가보안법 피고인’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거의 한 달에 한 번씩 검찰, 법원, 심지어 보호관찰소에까지 불려갔다”고 했다.
문제는 공안 당국에서 그의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사용한 감청 방식에 있다. 국정원은 2010년 12월28일~2011년 2월27일 서울중앙지법에서 통신제한조치 허가서(감청영장)를 받았다. 김형근이 수사와 재판을 받던 시기와 정확히 겹친다. 허가서에는 김형근 명의로 가입된 서울 종로구 낙원동 사무실의 SK브로드밴드 인터넷 전용회선과 인터넷 전화 등에 대한 감청, 인터넷 주소(IP) 로그기록 추적, 국내외 통화 내역 등이 담겨 있다.
핵심은 인터넷 전용회선에 대한 감청, 바로 ‘패킷 감청’이다. 인터넷 회선을 통해 한 뭉치씩(패킷·Packet) 나뉘어 전송되는 정보를 중간에서 가로채는 방식인데, 접속한 웹페이지 주소 목록과 이동 경로, 로그인 정보, 접속 시간은 물론 인터넷 전화의 경우 통화까지 무차별·무제한으로 엿듣게 된다. 김형근은 “내 것 말고도 그 인터넷 회선에 들어가는 건 다 감시했다. 당시 거의 첩보영화 수준으로 24시간 감시를 당했다. 국가의 역량을 사람을 잡도리하고 감시하는 데 썼다. 유신의 후예, 정보기관의 못된 습성이고 파렴치한 짓이다”라고 했다.
2. 해킹팀 RCS 구입은 패킷 감청의 연장선
패킷 감청은 기존 감청과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피의자의 전자우편 기록이나 휴대전화 통화 목록 따위를 나중에 압수하는 방식과 달리 패킷 감청은 ‘실시간 감시’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패킷 감청은 송신자와 수신자가 정보를 주고받을 때 중간에서 감청하는 방식이다. 감청 대상인 타깃(Target)이 인터넷 회선을 통해 주고받는 모든 정보가 수사기관의 컴퓨터에 실시간으로 ‘복사’된다.
국정원이 2012년 1월 이탈리아 해킹팀에서 구입해 운용한 ‘원격제어시스템’(RCS·Remote Control System) 또한 실시간 감시를 목적으로 한다. 감청을 당하는 사람이 감청 사실을 전혀 알 수 없다는 점도 똑같다. 국정원은 감청한 내용 가운데 범죄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자료만을 따로 추려서 법원에 제출해왔다. 감청을 위한 ‘백지수표’와 다름없다. 패킷 감청에 대해 “범죄 수사를 위한 증거 수집이 아니라 사찰과 감시를 위한 광범위한 정보 수집”이라는 시민단체의 비판이 나오는 대목이다. 김형근은 “나중에 재판 과정에서 보니, 내가 누구와 통화했는지 등이 다 도표화돼 있었다. 심지어 원그래프, 꺾은선그래프까지 있었다”고 했다.
이탈리아 스파이웨어 회사 해킹팀은 인터넷 회선 중간에서 정보를 빼내는 패킷 감청(위)보다, 직접 악성코드를 대상에 심는 RCS의 우수성(아래)을 국가정보원에 거듭 강조했다.
패킷 감청의 한계도 있다. 인터넷 회선을 특정해서 감청하기 때문에 그 회선을 오가는 정보 전체를 분석해야 한다. 감청 대상자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해당 회선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RCS는 국정원의 ‘무한 감청 욕망’을 충족시키는 ‘미다스의 손’ 구실을 했다. 해킹팀이 국정원에 보낸 RCS 홍보자료에서도 패킷 감청보다 RCS가 우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회사는 이른바 ‘잠재적 범죄자’를 감청하는 방법을 ‘수동적 방식’과 ‘공격적 방식’으로 구분했다. 수동적 방식이 패킷 감청이고, 공격적 방식이 RCS다.
해킹을 통하면 법원의 허가서를 받을 필요도 없어진다. 한 개인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광범위하게 수집한 뒤 혐의점을 찾아내 수사에 나서면 그만이다. 패킷 감청이 인터넷 회선을 통해 주고받는 정보만을 감청 대상으로 한다면, RCS는 컴퓨터나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상황’까지 감시한다는 점에서 한 단계 진화한 수법이다. 패킷 감청이 “의식의 흐름까지 감청한다”는 비판을 받았다면, RCS는 컴퓨터와 휴대전화를 만지는 사람의 얼굴과 손가락까지 감청하는 것이다. 패킷 감청이나 RCS 앞에서 개인의 사생활은 존재하지 않는다.
국정원에서 해킹팀의 RCS에 눈길을 준 시점도 예사롭지 않다. 국정원이 통신비밀보호법을 교묘히 악용해 패킷 감청을 한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처음 알려진 시점은 2009년 8월이다. 개인의 전화 통화나 팩스·우편물을 감청하거나 전자우편 기록을 압수수색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다. 반인권적 행위라는 점에서 사회적 파문이 일었다. 불과 1년 뒤인 2010년 8월 국정원은 나나테크를 통해 해킹팀과 첫 접촉을 했다. 그리고 국회의원 총선거와 대통령 선거가 열린 해인 2012년 1월 RCS를 들여왔다. 그리고 궁극적인 목표는 전 국민 누구나 감청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제1071호표지이야기 ‘최종 목표 ‘전 국민’’ 참조).
김형근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등 시민사회단체는 2011년 3월29일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냈다(2011헌마165). 이들은 헌법소원 심판 청구서에서, 패킷 감청이 헌법에서 정한 통신(제18조)·사생활(제17조)의 비밀과 인간으로서의 존업과 가치, 행복추구권(제10조)을 침해한다며 통신비밀보호법의 관련 조항들이 위헌이라고 주장했다. 같은 시기 국정원은 해킹팀과 RCS 구입을 위한 가격 협상을 은밀히 벌이고 있었다. 헌재는 4년 넘도록 묵묵부답이다.
3. “악착같이 살려고 한다”
“현재를 비롯하여 앞으로 펼쳐질 모든 디지털 시대에 있어서, 현재의 수사 관행으로 디지털 감청을 시행한다는 것은 처참한 기본권 침해가 필연적으로 따른다는 의미와 다름없다.” -오길영, <민주법학> 48호
김형근은 지난 5월 초 간암 진단을 받았다. 그는 1993년 세 번째로 교도소에서 출감한 뒤 간염을 앓았다. 그러나 몸을 돌볼 시간이 없었다. 끝없이 이어진 보안법의 굴레는 그의 몸을 점점 더 나락으로 내몰았다. 한 번 재판을 받으면 검찰에서 제출한 수사기록이 3천 장을 훌쩍 넘었다. “내 병의 원인은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이다. 박근혜 공안세력이 준 것이다. 그런데 조치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공소장을 읽고 싸워야 했다. 결국 참담하게 이렇게 됐다. 몸을 돌볼 틈이 없었다.”
김형근은 이제 더는 휴대전화를 쓰지 않는다. 자기 자신과 연관돼 피해를 볼까 염려해서다. 국가기관의 감청은 지금도 두 발을 묶은 차꼬처럼 그를 옥죄고 있다. 스스로 세간과 떨어졌지만 그의 꿈은 학교에 있다. “아이들이 너무 야비한 환경에 노출돼 있다. 교사들이 아이들에게 접근하려면 아이들의 심장을 조심스럽게 두드려야 한다. 그러려면 교사가 지향성과 확신이 있어야 한다. 가르치는 문제만큼은 뼈대 있게 가르치는 나라였으면 좋겠다.”
국정원은 패킷 감청에서 RCS로 널뛰기하며 지금의 파국에 이르렀다. 딸 둘을 둔 가장인 담당 직원의 죽음조차 날마다 정치적으로 덧칠되고 있다. 패킷 감청의 최대 피해자는 날마다 기력을 잃고 있다. “현재를 비롯하여 앞으로 펼쳐질 모든 디지털 시대에 있어서, 현재의 수사 관행으로 디지털 감청을 시행한다는 것은 처참한 기본권 침해가 필연적으로 따른다는 의미와 다름없다.”(오길영, <민주법학> 48호, ‘국가정보원의 패킷감청론에 대한 비판’)
그의 삶은 국가기관에 의해 철저히 짓밟힌 세월이었다. 교도소 수감과 수배 기간이 10년을 훌쩍 넘는다. 1978년 입학했던 대학은 3차례 제적과 복교를 거쳐 10년 만인 1988년 졸업했다. 1999년 39살 나이에 겨우 교단에 섰지만 2009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내가 유죄를 받는 거야 분단 상황에 철저히 저항해 깨지 못한 어른들의 책임이라고 느꼈다. 그런데 아이들이 증인으로 법정에 나오도록 하는 국가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조선일보> 보도 뒤 내가 있던 중학교가 하루아침에 쑥대밭이 됐다.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이 나라에 정의도, 미래도 없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는데 주변에서 살아야 한다고 기대가 많다. 그래서 악착같이 살려고 한다. 통일된 세상만 보고 죽으면 얼마나 좋을까.”
전북 임실군은 그가 늦깎이로 처음 교단에 선 곳이다. 그곳에서 지금 김형근은 아프다. 그러나 살아 있다. 그리고 살려고 한다. 그러므로 살아야 한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