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정원 대선 개입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지난 2월 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공판에 참석하기 위해 법정에 들어서고 있다. | |
ⓒ 유성호 |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파기환송심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자칫하면 '원 전 원장을 정점으로 하는 지휘체계에 따라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들이 사이버 활동을 벌였다'는 대전제마저 무너질 수 있다.
2일 열린 2차 공판준비기일에서 재판장 김시철 부장판사(서울고법 형사7부)는 "1·2심 판결이 잘못됐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두 재판부의 판단이 달랐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만이 아니라 연달아 유죄가 나왔던 국정원법 위반 혐의까지 포함하는 얘기였다.
이날 재판부는 1차 준비기일과 마찬가지로 지난 공판기록을 하나하나 제시하며 검찰과 변호인에게 의견을 물었다. 특히 국정원 직원들의 사이버 활동 내역을 일일이 언급하며 이 일이 원 전 원장 지시에 따른 것인지, 검찰이 관련 증거를 이전 재판부에 제출했는지 등을 확인했다. 원세훈 전 원장과 국정원 직원들 간의 '공모공동정범' 성립 여부를 겨냥한 지적이었다.
공모공동정범은 A라는 사람이 B의 범행에 직접 가담하진 않았지만, 그에게 영향을 미쳤을 때 성립하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조직폭력배 두목이 조직원들에게 'C 좀 혼내주라'고 했고, 조직원들이 그 말대로 움직였다면 두목도 C 폭행에 가담한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2010년 대법원은 설령 두목이 직접 지시를 하지 않더라도 그는 조직원을 충분히 좌지우지할 수 있으므로(기능적 행위지배) 공모공동정범 관계가 성립한다고 했다.
검찰은 원 전 원장과 이종명 전 3차장, 민병주 전 심리전단장을 기소하며 이 논리를 끌어왔다. 국정원 직원들이 포털사이트와 트위터,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정부와 여당을 옹호하고 야당 등을 비난하는 활동을 벌인 일이 곧 세 사람의 범행이라는 얘기였다. 1심과 항소심 재판부는 이 주장을 받아들여 '국정원 직원들의 사이버 활동=원 전 원장의 행위'라며 국정원법 위반 혐의를 유죄로 판단했다. 다만 1심 재판부는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의 경우 공모공동정범 관계가 성립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용 면에서 선거운동으로 보기 어렵다며 무죄로 봤다.
변호인단 논리와 꼭 닮은 재판부의 지적
그런데 2일 김시철 부장판사는 거듭 '개별 사이버 활동마다 구체적인 지시가 있었느냐'는 취지로 질문을 던졌다. 여기에 반발한 검찰은 "기존 판결은 잘못됐다는 것이냐"고 재판부에 되물었다.
"최소한 민병주 전 심리전단장의 변호인 의견서에 따른다면, 행위별로 입증이 안 됐는데 (이전 재판부가) 유죄판결을 했다는 것이다. 그게 잘못됐을 수도 있다."
김 부장판사는 "확정적이진 않다"면서도 "(이전 판결이) 맞는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공모공동정범 관계가 성립하지 않을 가능성을 염두에 둔 모습이었다.
재판부의 태도는 변호인단 논리와 비슷하다. 원 전 원장 등의 변호인들은 ▲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은 일반론일 뿐 구체적인 업무지시가 아니고 ▲ 피고인들은 직원들의 세부 활동 내용을 알지 못했다며 피고인들과 국정원 직원들 사이에 공모공동정범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해왔다. 또 검찰이 자신들의 공소사실을 뒷받침하려면 사이버 활동마다 원 전 원장 등의 지시대로 이뤄졌는지 입증하지 못하면 피고인들은 무죄라고 했다.
사건 초기 원 전 원장 등을 고발했던 박주민 변호사는 파기환송심 재판부가 공모공동정범 관계를 판단하는 잣대를 바꿀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법원은 공모공동정범과 관련해 대체로 두목이 부하의 행위를 지배하는 분위기만 만들어도 처벌해왔다"며 "재판부가 이걸 엄격하게 봐야 한다고 하면 '직접 지시가 없었다'는 이유로 원 전 원장 등이 빠져나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재판부가 준비기일에 증거 하나하나를 따지는 일은 굉장히 이례적인데, 변호인에게 변론방향을 귀띔해주는 것일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정식 공판도 아닌 준비기일에 주요 쟁점을 두고 결론을 내비치는 듯한 재판부의 모습에 검찰도 강하게 항의했다. 공모공동정범 성립 여부에 의문이 있더라도 '국정원 직원들의 불법행위 규모 등을 다시 정리해야 한다'는 대법원의 파기환송대로 재판을 진행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검찰은 또 "재판부의 질문 방식은 결론이 어떻다고 보일 수 있다"며 "부적절한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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