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중국 70년 관계…대만은 아직도 유엔 가입 못 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유엔총회 연설은 유엔과 중국의 뒤얽힌 관계사에서 또 다른 이정표로 기록될 만하다.
한국전쟁에서 유엔 연합군에 맞서 싸우고 오랫동안 '죽의 장막'에서 숨어 있던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이 중화민국(대만)을 대신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 편입한지 40여년만에 유엔의 실질적인 주요 지도국으로 부상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유엔이 창설된 1945년 당시 중국 대륙을 장악하고 있던 장제스(蔣介石)의 중국 정부는 유엔 헌장에 처음으로 서명한 51개국 중 하나로 유엔 창립에 적지 않은 역할을 맡았었다.
특히 중국은 윈스턴 처질 영국 총리를 포함한 일부의 반대에도 2차대전 전승국의 자격으로 유엔 안보리 5대 상임이사국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당시 중국은 유엔 인권선언의 초안 작성과 서명에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1949년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와 부대가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끄는 공산당 군대에 패퇴해 대만으로 패주하면서 유엔과 중국과 관계는 묘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중국 대륙을 차지한 중화인민공화국은 유엔에서 중화민국을 대신해 중국을 대표하는 유일한 국가로 인정할 것을 주장했지만, 중국의 동맹인 소련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의도로 유엔에서 그 위상을 인정받지 못했다.
반면 중화민국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계속 안보리 의석을 유지했다.
그러던 와중에 1950년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유엔 안보리는 북한의 남침을 인정하고 미국 주도로 21개국 군부대로 편성된 연합군을 한반도에 파견했다.
중국도 수세에 몰린 북한군을 지원하기 위해 대규모 파병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유엔 연합군은 1953년 정전협정이 이뤄지기까지 한반도 곳곳에서 중국군과 잦은 전투를 치렀다.
1950∼1960년대 냉전 시기는 중국이 유엔을 상대로 줄기차게 '합법적 권리의 회복'을 주창했던 시기였다. 미국의 강력한 지지로 중화민국은 겨우 유엔의 말석을 유지했지만, 유엔 총회에서 중화민국 지지도는 점점 약해졌다.
결국, 중국은 21차례의 시도 끝에 1971년 10월 25일 아프리카의 26개 신생 독립국 등의 지지를 얻어 유엔총회에서 2758호 결의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 결의로 1949년 수립된 중화인민공화국이 중화민국을 승계한 것으로 간주됐고 유엔에서 합법적인 중국의 대표는 오직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대표임이 인정됐다.
이에 따라 유엔에서 중화민국의 축출이 결의됨에 따라 중화민국은 이에 반발, 유엔에서 자진 탈퇴했다.
하지만, 탈퇴 20년이 되던 때인 1991년 중화민국은 유엔 가입 신청을 냈다. 대만을 자국의 부속 도서로 간주하던 중국은 2758호 결의에 위배된다며 강력히 반발했고 결국 이 안건은 유엔총회 안건에도 오르지 못한 채 대만의 유엔가입은 무산되고 말았다.
중국의 유엔 복귀가 실현된 지 3년 후인 1974년 집권을 앞둔 덩샤오핑(鄧小平)은 유엔총회에서 연설한 첫 중국 지도자가 됐다. 덩샤오핑은 당시 연설에서 중국이 앞으로도 패권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라며 중국의 국제무대에서 역할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중국은 열심히 유엔 평화유지군 파견활동을 시작했다. 1992년 캄보디아에 공정부대를 보내는 것을 시작으로 중국은 5대 안보리 상임이사국 중 가장 활발히 평화유지군 활동을 벌이는 국가가 됐다. 지금도 3천명의 중국 군인과 경찰이 평화유지군 활동을 수행 중이다.
덩샤오핑을 시발로 유엔총회는 또 중국 지도자들이 국제무대에 데뷔하는 장이기도 하다.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이 2000년 9월 6일 유엔총회 연설을 통해 세계 평화와 안보 유지를 위한 유엔 활동에 지지의 뜻을 밝힌 바 있다. 후진타오(胡錦濤) 전 국가주석도 2009년 9월 24일 유엔총회에 등장, "더 발전된 중국은 세계에 기여할 더 많은 기회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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