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토요판] 박성민의 2017오디세이아
(17) 안철수의 시간
안철수는 2012년에 '블랙 스완'(검은 백조)이 될 뻔했다. 17세기 말에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서 발견되기 전까지는 '검은 백조'는 존재할 수 없는 형용모순의 상징이었다. 발견 뒤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불가능하다'고 인식된 상황이 실제 발생하는 것을 가리키는 은유적 표현으로 의미가 바뀌었다. 월가에서 증권분석가로 일한 경험이 있는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는 2007년에 <블랙 스완>이라는 책에서 '극단적인 0.1%의 가능성이 모든 것을 바꾼다'고 주장하며 최악의 파국이 월가를 덮칠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그의 예측대로 2008년에 월가가 붕괴해서 크게 주목받았다.
그는 '블랙 스완'의 개념을 '과거의 경험으로 확인할 수 없는 기대 영역 바깥쪽의 관측 값으로, 극단적으로 예외적이고 알려지지 않아 발생가능성에 대한 예측이 거의 불가능하지만 일단 발생하면 엄청난 충격과 파장을 가져오고, 발생 후에야 적절한 설명과 예견이 가능해지는 사건'이라고 정의하고 '경제공황'이나 '9·11테러' 같은 사건을 예로 들었다. 한마디로 나심 탈레브는 블랙 스완이란 예측할 수 없는 '극단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반면 <커런시 워>(Currency wars, 통화전쟁)의 저자인 제임스 리카즈는 블랙 스완을 '극단적 사건'이 아니라 '일상적 사건의 극단적 결과'로 해석했다. 나는 이 해석에 동의한다. 예컨대 9·11테러도 방식과 규모에서 훨씬 충격적이긴 하지만 일상적으로 일어나던 테러가 극단적인 참사로 이어진 것뿐이다.
'블랙 스완'이 될 뻔했던 그
'안철수 현상'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이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박원순에게 후보를 양보하면서 불기 시작한 '안철수 바람'을 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듯이 호들갑을 떨면서 '현상'이라고 거창한 이름을 붙였지만 알고 보면 그런 '바람'은 이미 여러 번 있었다. 1995년 무소속으로 나와 서울시장이 거의 될 뻔했던 '박찬종 바람' 같은 작은(?) 바람은 빼더라도 대선 판을 뒤흔든 큰 바람도 세 번이나 있었다. '(이회)창풍' '노(무현)풍' '안(철수)풍' 모두 강력한 태풍이었다. 태풍은 태양으로부터 받는 열량의 차이가 '열적 불균형'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발생한다. 정치에서의 바람도 마찬가지다. 정치·경제적 질서로부터 받는 혜택의 차이가 '사회적 분노'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지금 '신자유주의'의 본거지인 미국과 영국에서는 급진 좌파 정치인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영국에서는 같은 노동당 출신의 토니 블레어 전 총리가 까무러칠 만한 주장을 거침없이 하는 제러미 코빈이 압도적 지지로 노동당 당수가 되었다. 왕정 폐지, 에너지·철도·우편 국유화, 대학 등록금 폐지, 나토 및 유럽연합 탈퇴, 건강보험 민영화조치 중단 등 그의 주장은 거의 혁명적 수준이다.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도 '사회주의자'인 버니 샌더스 돌풍이 거세다. 힐러리 클린턴의 대세론이 휘청거릴 정도다.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낳은 불평등의 분노가 좌파 열풍의 진원이다. 이들과는 다르지만 미국 공화당 대선 경선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역시 '드러내 놓고 말할 수는 없는' 백인들의 분노를 대변하면서 태풍으로 발전하고 있다.
기존 체제에 대한 '대중적 분노'는 기성 '정치가 무능'할 때 폭발한다. 대중이 분노하는데 정치가 싸우지 않으면 대중은 대신 싸워줄 '영웅'이나 싸움을 이끌어줄 '지도자'를 기다린다. 1993년 12월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총리로 임명된 이회창은 '법과 원칙'대로 하려다가 불과 4개월 만에 총리직을 그만뒀는데 이런 '대쪽' 이미지가 거센 '창풍'의 동력이었다. 정치 9단으로 불리던 3김 전성기에 이 정도의 큰 균열을 냈다는 것을 고려하면 역사적으로 '창풍'이 가장 센 바람이었을지도 모른다.
2002년에는 고졸 출신의 노무현 바람 앞에 서울대 출신의 이인제·정몽준·이회창이 차례로 쓰러졌다. 아마도 노무현이 한국 정치 역사상 대중의 분노를 자신의 정치적 에너지로 만드는 데 가장 탁월한 정치인이었을 것이다. 그는 대중이 분노하는 지점을 정확히 읽을 줄 아는 능력도 있었고, 그것을 폭발시킬 수 있는 선동의 기술도 있었다. 노무현은 자기가 무엇에 분노하는지, 누구와 싸우려고 하는지, 어떤 사람들을 대변하려고 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반대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반대를 만들어내기까지 했다. 그는 대중을 위해 싸운 정치인을 넘어, 스스로 '대중'임을 선언한 정치인이었다. 최근 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네 명의 대통령을 순서대로 불러주고 '누구를 좋아하느냐'고 물어보면 2014년 지방선거 이후에는 노무현이 꾸준히 1위로 나온다. 물론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한 탓에 대중의 가슴속에 '대통령 노무현'보다 '인간 노무현'으로 더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2011년 가을에 불어온 '안풍'은 2012년에는 이름 뒤에 '현상'이란 단어가 붙을 정도로 엄청난 태풍으로 발전했다. 2014년 1월에 방송인 김새롬이 한 방송에서 "좋아하는 정치인이 누구냐?"는 질문에 "안철수"라고 밝히고 그 이유를 묻는 질문에 "유행이다"라고 솔직하게 답했는데 '안철수 현상'은 말 그대로 패션이었다. 안철수는 젊은이들이 가장 닮고 싶은 인물이자,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멘토였다. 이명박 정권에 대한 젊은이들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는 야당의 무기력과 내세울 만한 대선주자가 없는 상황이 그를 정치로 불러냈다. 젊은이들이 그를 좋아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매력적 상품을 소비하고픈 욕망과 흡사한 것이었다. 그가 갖고 있는 '강남성'이 젊은이들을 매료시켰다.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 식으로 표현하자면 우리가 스타벅스 커피를 사는 것은 스타벅스 로고(시뮐라크르)를 통해 사실은 '뉴요커가 된 듯한 기분(시뮐라시옹)'을 사는 것이다. 사람들이 안철수를 지지한다고 내놓고 밝힌 것은 사실은 '내가 이런 사람이야'라는 것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젊은이들에게 이런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안철수는 총선에서 지고 대선 전망도 어두웠던 야당에는 '구세주'와 같은 존재였다.
안철수 지지율 떨어진 것은
'새 정치' 열망 담아내지 못하고
합당으로 기성 정치에 굴복한 탓
지지율 겹치는 박원순 존재도 한몫
그래도 10% 가까운 지지는 자산
총선 참패 또는 의석 줄어들면
그다음은 안철수의 시간
총선 후 주어진 시간은 6개월
지지율 15%까지 끌어올린다면
문재인 대항마는 안철수가 될 것
왜 아직 '아이폰'을 만들지 못했나
사실 '안철수 현상'은 '디지털 혁명'으로 불리는 패러다임의 변화 때문에 가능했다. 조직과 세가 없는 개인도 한순간에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1987년에 노태우는 다수당의 다수파로 대통령이 됐다. 1992년 김영삼은 다수당의 소수파로 대통령이 됐다. 1997년 김대중은 소수파의 다수파로 대통령이 됐다. 2002년 노무현은 놀랍게도 소수파의 소수파로 대통령이 됐다. 인터넷의 힘이었다. 2012년 안철수는 그저 '개인'이었는데 대통령이 거의 될 뻔했다. 스마트폰의 힘이었다. 디지털 혁명은 콘텐츠를 만드는 (한계)비용을 '제로'로 수렴시키고, 양을 '무한 복제'하고, '빛의 속도'로 유통시킨다. 이런 세상에서는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정치인도 순식간에 흥하고 한순간에 망한다.
그렇게 불려나온 안철수의 불행은 불러낸 대중도, 불려나온 그도 불러낸 이유를 정확히 몰랐다는 데 있다. 안철수의 '청춘 콘서트'에 몰려간 젊은이들 중에는 한나라당 지지자에서 통합진보당 지지자들까지 다 섞여 있었으므로 그들의 기대도 다양했다. 결국 그는 무엇에 분노하는지, 무엇과 싸우려 하는지, 누구를 대변하려고 하는지, 즉 정치를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추상적인 '새 정치'를 내걸었으나 안철수가 '새 인물'이라는 것 말고는 내용도, 함께하는 인물도 새롭지 못해 설득력이 떨어졌다. 나는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후보를 여전히 점유율 1위이긴 하나 '시대에 뒤떨어진 노키아', '옴니아 수준의 삼성', '아이폰 없는 애플'에 비유한 적이 있다. 결국 노키아가 스마트폰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패자가 되었다. 새누리당이 지금처럼 혁신 없이 간다면 다음 대선에서는 망한 노키아 꼴이 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아직은 문재인도 '갤럭시'를 만들지 못했고, 안철수도 '아이폰'을 만들지 못했다.
안철수는 여전히 세가 없다. 지지율은 반의반 토막이 났다. 안철수의 지지율이 떨어진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새 정치'에 대한 열망을 담아내지 못하고 대선 후보 양보와 독자 정당 창당 포기, 그리고 민주당과의 합당으로 기성 정치에 굴복한 탓이다. 또 다른 이유는 안철수와 지지층이 겹치는 박원순의 존재다. 2014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새누리당의 대권주자였던 정몽준을 크게 이기고 재선에 성공한 박원순 시장이 안철수 지지자를 상당 부분 흡수했다. 그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지지율이 한 자리로 떨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10% 가까운 지지자들이 있다는 것은 엄청난 자산이다. 역사적으로 한국의 대통령이 1당이나 2당에서만 나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민주당과의 합당이 결정적 실수라고 단정하는 것도 아직은 이른 판단이다. 제3당을 만들어 제2당을 붕괴시킨 사례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김영삼, 김대중과 대통령이었던 노무현만이 가능했던 일이다.
한국과 미국 대선을 분석해 보면 치열한 경선을 치르고 본선에서 분열하지 않으면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 2007년 한국 대선에서 이명박과 박근혜가 그랬고, 2008년 미국 대선에서 버락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이 그랬다. 대체로 정권을 빼앗긴 야당의 경우는 정권을 다시 찾아오라는 지지자들의 압력 때문에 분열하기가 쉽지 않다. 결국 당내에서 치열하게 경쟁한 결과 강한 비토 층이 형성되더라도 대선 후보로 확정되면 야당 지지층은 다 흡수할 수 있다. 따라서 문재인 대표와 안철수 의원이 치열하게 싸우는 것은 걱정할 일이 아니다. 실제로 지난 3주간 혁신을 둘러싼 문재인과 안철수의 긴장과 갈등은 두 사람 모두에게 득이 되었다.
문재인, 승부처는 서울이다
누가 뭐래도 지금 야당에서 가장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는 문재인 대표다. 대선 역사상 두번째로 많은 득표를 한 후보이면서 현재 야당의 대표다. 강력한 지지층도 있고, 유일하게 계파로 부를 만한 세를 이끌고 있다. 지금은 어느 모로 보나 문재인의 시간이다. 문재인 대표가 당의 혁신과 통합을 통해 총선 승리를 이끈다면 사실상 문재인 대세론은 조기에 구축될 것이다. 따라서 문재인 대표가 총선에서 승리하려면 안철수 의원은 '혁신'을, 그리고 문 대표는 '통합'을 주도하면서 두 사람이 전면에서 선거를 이끌어야 한다. 혁신위는 문재인 대표에게 부산 출마를 요구하면서 안철수 의원 역시 부산으로 내려가기를 원한 모양인데 나는 그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다. 당연히 문재인 대표에게 서울 출마를 권했어야 한다. 종로에서 새누리당이 오세훈을 낸다면 문재인이나 안철수 두 사람 중 한 사람에게 선봉장의 역할을 맡겨야 하는 것 아닌가. 1985년 신민당 돌풍 당시 이민우 총재가 종로로 나갔듯이 문재인 대표가 나가야 하는 것 아닌가. 노무현도 부산 지역구를 떠나서 종로에서 출마하지 않았는가. 문재인 대표는 당연히 그 길을 선택해야 한다.
1997년 김대중, 2002년에 노무현 모두 호남의 압도적 투표와 지지, 충청 승리, 그리고 수도권에서 큰 표 차 승리의 같은 방식으로 이겼다. 노무현 후보조차 부산, 울산, 경남 어느 지역도 30%를 넘지 못했다. 그러고도 이겼다. 승부처는 서울이지 부산이 아니다. 2012년에는 호남 투표율이 평균 정도로 떨어졌고, 충청은 크게 졌고, 수도권에서는 사실상 비겼다. 그래서 진 것 아닌가. 호남 흔들리고, 충청 밀리고, 수도권 불확실한데 부산 출마가 왜 나오나.
만약 총선에서 참패하거나 적어도 현재보다 의석이 줄어든다면 그다음은 안철수의 시간이다. 문재인의 경쟁력과 지도력에 실망한 야권 지지자들은 다시 안철수 의원을 주목할 것이다. 총선 후 안철수 의원에게 주어진 시간은 6개월 정도뿐이다. 그 짧은 시간에 뭔가를 해야 한다. 2016년 추석이 끝난 직후의 지지율을 15%까지 끌어올린다면 문재인 대표의 경선 대항마는 안철수 의원이 될 것이다. 2011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후보를 양보받았고, 2014년 합당을 통해 재선의 도움을 받은 박원순 시장은 지지율에서 역전되면 나올 명분을 찾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때도 안철수의 지지율이 지금과 같은 상태가 지속된다면 그다음은 박원순의 시간이다. 본격적으로 박원순 시장을 경선으로 불러낼 것이다. 문재인, 안철수의 대선 레이스가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박성민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
정치 컨설턴트. 1991년 설립한 '민(MIN) 컨설팅' 대표. 30년간 정치를 현장에서 관찰하고 수많은 선거를 이끌었다. 전략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승리를 위한 캠페인 방법을 몸으로 익혔다. 세계 최고의 전략컨설팅 회사를 꿈꾼다. 생각이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가 민주주의라고 믿고 있다. '힘든 일은 있어도 나쁜 일은 없다'는 인생관으로 버틴다. 책과 영화, 커피를 사랑하며 걷는 것을 즐긴다. '2017 오디세이아'를 통해 차기 대선을 향한 여정을 독자들과 함께한다. 격주 연재.
(17) 안철수의 시간
안철수는 2012년에 '블랙 스완'(검은 백조)이 될 뻔했다. 17세기 말에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서 발견되기 전까지는 '검은 백조'는 존재할 수 없는 형용모순의 상징이었다. 발견 뒤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불가능하다'고 인식된 상황이 실제 발생하는 것을 가리키는 은유적 표현으로 의미가 바뀌었다. 월가에서 증권분석가로 일한 경험이 있는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는 2007년에 <블랙 스완>이라는 책에서 '극단적인 0.1%의 가능성이 모든 것을 바꾼다'고 주장하며 최악의 파국이 월가를 덮칠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그의 예측대로 2008년에 월가가 붕괴해서 크게 주목받았다.
'블랙 스완'이 될 뻔했던 그
'안철수 현상'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이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박원순에게 후보를 양보하면서 불기 시작한 '안철수 바람'을 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듯이 호들갑을 떨면서 '현상'이라고 거창한 이름을 붙였지만 알고 보면 그런 '바람'은 이미 여러 번 있었다. 1995년 무소속으로 나와 서울시장이 거의 될 뻔했던 '박찬종 바람' 같은 작은(?) 바람은 빼더라도 대선 판을 뒤흔든 큰 바람도 세 번이나 있었다. '(이회)창풍' '노(무현)풍' '안(철수)풍' 모두 강력한 태풍이었다. 태풍은 태양으로부터 받는 열량의 차이가 '열적 불균형'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발생한다. 정치에서의 바람도 마찬가지다. 정치·경제적 질서로부터 받는 혜택의 차이가 '사회적 분노'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지금 '신자유주의'의 본거지인 미국과 영국에서는 급진 좌파 정치인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영국에서는 같은 노동당 출신의 토니 블레어 전 총리가 까무러칠 만한 주장을 거침없이 하는 제러미 코빈이 압도적 지지로 노동당 당수가 되었다. 왕정 폐지, 에너지·철도·우편 국유화, 대학 등록금 폐지, 나토 및 유럽연합 탈퇴, 건강보험 민영화조치 중단 등 그의 주장은 거의 혁명적 수준이다.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도 '사회주의자'인 버니 샌더스 돌풍이 거세다. 힐러리 클린턴의 대세론이 휘청거릴 정도다.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낳은 불평등의 분노가 좌파 열풍의 진원이다. 이들과는 다르지만 미국 공화당 대선 경선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역시 '드러내 놓고 말할 수는 없는' 백인들의 분노를 대변하면서 태풍으로 발전하고 있다.
기존 체제에 대한 '대중적 분노'는 기성 '정치가 무능'할 때 폭발한다. 대중이 분노하는데 정치가 싸우지 않으면 대중은 대신 싸워줄 '영웅'이나 싸움을 이끌어줄 '지도자'를 기다린다. 1993년 12월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총리로 임명된 이회창은 '법과 원칙'대로 하려다가 불과 4개월 만에 총리직을 그만뒀는데 이런 '대쪽' 이미지가 거센 '창풍'의 동력이었다. 정치 9단으로 불리던 3김 전성기에 이 정도의 큰 균열을 냈다는 것을 고려하면 역사적으로 '창풍'이 가장 센 바람이었을지도 모른다.
2002년에는 고졸 출신의 노무현 바람 앞에 서울대 출신의 이인제·정몽준·이회창이 차례로 쓰러졌다. 아마도 노무현이 한국 정치 역사상 대중의 분노를 자신의 정치적 에너지로 만드는 데 가장 탁월한 정치인이었을 것이다. 그는 대중이 분노하는 지점을 정확히 읽을 줄 아는 능력도 있었고, 그것을 폭발시킬 수 있는 선동의 기술도 있었다. 노무현은 자기가 무엇에 분노하는지, 누구와 싸우려고 하는지, 어떤 사람들을 대변하려고 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반대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반대를 만들어내기까지 했다. 그는 대중을 위해 싸운 정치인을 넘어, 스스로 '대중'임을 선언한 정치인이었다. 최근 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네 명의 대통령을 순서대로 불러주고 '누구를 좋아하느냐'고 물어보면 2014년 지방선거 이후에는 노무현이 꾸준히 1위로 나온다. 물론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한 탓에 대중의 가슴속에 '대통령 노무현'보다 '인간 노무현'으로 더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2011년 가을에 불어온 '안풍'은 2012년에는 이름 뒤에 '현상'이란 단어가 붙을 정도로 엄청난 태풍으로 발전했다. 2014년 1월에 방송인 김새롬이 한 방송에서 "좋아하는 정치인이 누구냐?"는 질문에 "안철수"라고 밝히고 그 이유를 묻는 질문에 "유행이다"라고 솔직하게 답했는데 '안철수 현상'은 말 그대로 패션이었다. 안철수는 젊은이들이 가장 닮고 싶은 인물이자,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멘토였다. 이명박 정권에 대한 젊은이들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는 야당의 무기력과 내세울 만한 대선주자가 없는 상황이 그를 정치로 불러냈다. 젊은이들이 그를 좋아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매력적 상품을 소비하고픈 욕망과 흡사한 것이었다. 그가 갖고 있는 '강남성'이 젊은이들을 매료시켰다.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 식으로 표현하자면 우리가 스타벅스 커피를 사는 것은 스타벅스 로고(시뮐라크르)를 통해 사실은 '뉴요커가 된 듯한 기분(시뮐라시옹)'을 사는 것이다. 사람들이 안철수를 지지한다고 내놓고 밝힌 것은 사실은 '내가 이런 사람이야'라는 것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젊은이들에게 이런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안철수는 총선에서 지고 대선 전망도 어두웠던 야당에는 '구세주'와 같은 존재였다.
안철수 지지율 떨어진 것은
'새 정치' 열망 담아내지 못하고
합당으로 기성 정치에 굴복한 탓
지지율 겹치는 박원순 존재도 한몫
그래도 10% 가까운 지지는 자산
총선 참패 또는 의석 줄어들면
그다음은 안철수의 시간
총선 후 주어진 시간은 6개월
지지율 15%까지 끌어올린다면
문재인 대항마는 안철수가 될 것
왜 아직 '아이폰'을 만들지 못했나
사실 '안철수 현상'은 '디지털 혁명'으로 불리는 패러다임의 변화 때문에 가능했다. 조직과 세가 없는 개인도 한순간에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1987년에 노태우는 다수당의 다수파로 대통령이 됐다. 1992년 김영삼은 다수당의 소수파로 대통령이 됐다. 1997년 김대중은 소수파의 다수파로 대통령이 됐다. 2002년 노무현은 놀랍게도 소수파의 소수파로 대통령이 됐다. 인터넷의 힘이었다. 2012년 안철수는 그저 '개인'이었는데 대통령이 거의 될 뻔했다. 스마트폰의 힘이었다. 디지털 혁명은 콘텐츠를 만드는 (한계)비용을 '제로'로 수렴시키고, 양을 '무한 복제'하고, '빛의 속도'로 유통시킨다. 이런 세상에서는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정치인도 순식간에 흥하고 한순간에 망한다.
그렇게 불려나온 안철수의 불행은 불러낸 대중도, 불려나온 그도 불러낸 이유를 정확히 몰랐다는 데 있다. 안철수의 '청춘 콘서트'에 몰려간 젊은이들 중에는 한나라당 지지자에서 통합진보당 지지자들까지 다 섞여 있었으므로 그들의 기대도 다양했다. 결국 그는 무엇에 분노하는지, 무엇과 싸우려 하는지, 누구를 대변하려고 하는지, 즉 정치를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추상적인 '새 정치'를 내걸었으나 안철수가 '새 인물'이라는 것 말고는 내용도, 함께하는 인물도 새롭지 못해 설득력이 떨어졌다. 나는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후보를 여전히 점유율 1위이긴 하나 '시대에 뒤떨어진 노키아', '옴니아 수준의 삼성', '아이폰 없는 애플'에 비유한 적이 있다. 결국 노키아가 스마트폰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패자가 되었다. 새누리당이 지금처럼 혁신 없이 간다면 다음 대선에서는 망한 노키아 꼴이 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아직은 문재인도 '갤럭시'를 만들지 못했고, 안철수도 '아이폰'을 만들지 못했다.
안철수는 여전히 세가 없다. 지지율은 반의반 토막이 났다. 안철수의 지지율이 떨어진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새 정치'에 대한 열망을 담아내지 못하고 대선 후보 양보와 독자 정당 창당 포기, 그리고 민주당과의 합당으로 기성 정치에 굴복한 탓이다. 또 다른 이유는 안철수와 지지층이 겹치는 박원순의 존재다. 2014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새누리당의 대권주자였던 정몽준을 크게 이기고 재선에 성공한 박원순 시장이 안철수 지지자를 상당 부분 흡수했다. 그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지지율이 한 자리로 떨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10% 가까운 지지자들이 있다는 것은 엄청난 자산이다. 역사적으로 한국의 대통령이 1당이나 2당에서만 나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민주당과의 합당이 결정적 실수라고 단정하는 것도 아직은 이른 판단이다. 제3당을 만들어 제2당을 붕괴시킨 사례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김영삼, 김대중과 대통령이었던 노무현만이 가능했던 일이다.
한국과 미국 대선을 분석해 보면 치열한 경선을 치르고 본선에서 분열하지 않으면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 2007년 한국 대선에서 이명박과 박근혜가 그랬고, 2008년 미국 대선에서 버락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이 그랬다. 대체로 정권을 빼앗긴 야당의 경우는 정권을 다시 찾아오라는 지지자들의 압력 때문에 분열하기가 쉽지 않다. 결국 당내에서 치열하게 경쟁한 결과 강한 비토 층이 형성되더라도 대선 후보로 확정되면 야당 지지층은 다 흡수할 수 있다. 따라서 문재인 대표와 안철수 의원이 치열하게 싸우는 것은 걱정할 일이 아니다. 실제로 지난 3주간 혁신을 둘러싼 문재인과 안철수의 긴장과 갈등은 두 사람 모두에게 득이 되었다.
문재인, 승부처는 서울이다
누가 뭐래도 지금 야당에서 가장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는 문재인 대표다. 대선 역사상 두번째로 많은 득표를 한 후보이면서 현재 야당의 대표다. 강력한 지지층도 있고, 유일하게 계파로 부를 만한 세를 이끌고 있다. 지금은 어느 모로 보나 문재인의 시간이다. 문재인 대표가 당의 혁신과 통합을 통해 총선 승리를 이끈다면 사실상 문재인 대세론은 조기에 구축될 것이다. 따라서 문재인 대표가 총선에서 승리하려면 안철수 의원은 '혁신'을, 그리고 문 대표는 '통합'을 주도하면서 두 사람이 전면에서 선거를 이끌어야 한다. 혁신위는 문재인 대표에게 부산 출마를 요구하면서 안철수 의원 역시 부산으로 내려가기를 원한 모양인데 나는 그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다. 당연히 문재인 대표에게 서울 출마를 권했어야 한다. 종로에서 새누리당이 오세훈을 낸다면 문재인이나 안철수 두 사람 중 한 사람에게 선봉장의 역할을 맡겨야 하는 것 아닌가. 1985년 신민당 돌풍 당시 이민우 총재가 종로로 나갔듯이 문재인 대표가 나가야 하는 것 아닌가. 노무현도 부산 지역구를 떠나서 종로에서 출마하지 않았는가. 문재인 대표는 당연히 그 길을 선택해야 한다.
1997년 김대중, 2002년에 노무현 모두 호남의 압도적 투표와 지지, 충청 승리, 그리고 수도권에서 큰 표 차 승리의 같은 방식으로 이겼다. 노무현 후보조차 부산, 울산, 경남 어느 지역도 30%를 넘지 못했다. 그러고도 이겼다. 승부처는 서울이지 부산이 아니다. 2012년에는 호남 투표율이 평균 정도로 떨어졌고, 충청은 크게 졌고, 수도권에서는 사실상 비겼다. 그래서 진 것 아닌가. 호남 흔들리고, 충청 밀리고, 수도권 불확실한데 부산 출마가 왜 나오나.
만약 총선에서 참패하거나 적어도 현재보다 의석이 줄어든다면 그다음은 안철수의 시간이다. 문재인의 경쟁력과 지도력에 실망한 야권 지지자들은 다시 안철수 의원을 주목할 것이다. 총선 후 안철수 의원에게 주어진 시간은 6개월 정도뿐이다. 그 짧은 시간에 뭔가를 해야 한다. 2016년 추석이 끝난 직후의 지지율을 15%까지 끌어올린다면 문재인 대표의 경선 대항마는 안철수 의원이 될 것이다. 2011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후보를 양보받았고, 2014년 합당을 통해 재선의 도움을 받은 박원순 시장은 지지율에서 역전되면 나올 명분을 찾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때도 안철수의 지지율이 지금과 같은 상태가 지속된다면 그다음은 박원순의 시간이다. 본격적으로 박원순 시장을 경선으로 불러낼 것이다. 문재인, 안철수의 대선 레이스가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박성민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
정치 컨설턴트. 1991년 설립한 '민(MIN) 컨설팅' 대표. 30년간 정치를 현장에서 관찰하고 수많은 선거를 이끌었다. 전략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승리를 위한 캠페인 방법을 몸으로 익혔다. 세계 최고의 전략컨설팅 회사를 꿈꾼다. 생각이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가 민주주의라고 믿고 있다. '힘든 일은 있어도 나쁜 일은 없다'는 인생관으로 버틴다. 책과 영화, 커피를 사랑하며 걷는 것을 즐긴다. '2017 오디세이아'를 통해 차기 대선을 향한 여정을 독자들과 함께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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